9화. 기대와 착각 사이
1501호에 사람이 들어왔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의 밀도가 달라졌다.
가장 먼저 달라진 것은 연락의 온도였다.
예전에는 ‘우산 감사합니다’, ‘택배 박스 치워주셔서 고마워요’ 같은 철저히 실용적인 목적의 문자가 전부였다면, 이제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시시콜콜한 말들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서하가 보낸 문자에, 작업실 의자에 앉아 있던 성진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성진은 평소처럼 단정한 답장을 적어 보냈다가, 잠시 망설인 뒤 문장 하나를 덧붙였다.
1501호의 서하는 그 짧은 문장 하나에 또 속수무책으로 무장해제되어 휴대폰을 쥔 채 실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주 사소한 안부의 교환. 대화는 짧게 끝났지만, 두 사람은 각자의 공간에서 한참 동안이나 휴대폰 화면을 끄지 못했다.
서로의 일과 세계를 엿보게 되는 순간들도 늘어났다.
주말 오후, 운명처럼 우연처럼 복도에서 두 사람은 마주쳤다. 성진은 목에 커다란 헤드폰을 걸치고 있었고, 서하는 손에 작은 스케치북을 들고 있었다.
“작업 중이셨나 봐요.”
서하가 성진의 헤드폰을 가리키며 묻자, 성진이 무심히 헤드폰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데모곡 스케치하던 중이라서요.”
평소의 성진이었다면 딱 여기까지만 대답하고 인사를 나눈 뒤 각자의 문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성진은 자신의 미완성 작업물을 남에게 들려주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완벽주의자였으니까. 하지만 성진은 닫힌 자신의 현관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더니, 목에 걸려 있던 헤드폰을 서하 쪽으로 불쑥 내밀었다.
“……한 번 들어볼랍니까.”
“네? 아, 저야 영광이죠. 들어봐도 돼요?”
서하가 눈을 반짝이며 다가왔다. 성진이 서하의 머리에 조심스럽게 헤드폰을 씌워주었다. 서하의 귓가로 묵직하면서도 규칙적인 베이스라인과 차분한 비트가 흘러들어왔다. 화려하지 않지만 단단하게 밑바닥을 받쳐주는, 묘하게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곡이었다.
헤드폰을 쓴 채 가만히 눈을 감고 리듬을 타는 서하의 얼굴을, 성진은 숨죽인 채 내려다보았다. 곡에 대한 평가가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냥, 자신의 음악을 듣고 있는 서하의 맑은 얼굴이 지나치게 예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와.”
얼마 후, 서하가 헤드폰을 벗어 성진에게 돌려주며 환하게 웃었다.
“곡이 딱 성진 씨 같아요.”
“……무슨 뜻입니까.”
“단단하고 차분한데, 계속 듣고 싶어지는 느낌? 겉으론 무뚝뚝해 보여도 엄청 세심하게 신경 쓴 티가 나요. 진짜 좋아요.”
자신의 본질을 꿰뚫어 본 듯한 서하의 감상에 성진의 귀끝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그는 민망함에 또다시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뭐…… 대충 짠 겁니다.”
“나중에 완성되면 제일 먼저 들려주셔야 해요.”
서하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자신이 들고 있던 스케치북을 펼쳐 보였다. 거기엔 은색 펜던트와 가죽끈이 엮인 새로운 팔찌 디자인이 그려져 있었다.
“저도 이거 이번에 새로 디자인한 건데, 완성되면 성진 씨한테 제일 먼저 보여드릴게요. 저번에 성진 씨 키링 보니까 이런 가죽 느낌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요.”
성진은 스케치북에 그려진 거칠고 투박한 가죽의 질감을 보며 속으로 작게 감탄했다. 스치듯 나누었던 키링 이야기를 기억하고, 자신의 취향을 정확히 짚어낸 서하의 눈썰미가 놀라웠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성진이 부드럽게 대답했다. 물리적인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던 두 사람이, 비로소 서로의 내밀한 세계 안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놓는 순간이었다.
그날 밤.
서하는 평소보다 일찍 공방에서 퇴근해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1501호 도어락을 열려던 그녀의 시선이, 1502호 문고리에 걸린 작은 종이 쇼핑백에 머물렀다.
성진의 짓이 분명했다. 서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쇼핑백 안에 든 메모지를 확인했다.
쇼핑백 안에는 얇고 부드러운 소재의 손목 보호대가 들어 있었다.
서하는 며칠 전 엘리베이터에서, 펜치를 너무 오래 쥐고 있었더니 손목이 시큰거린다고 무심코 흘리듯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 스쳐 지나가는 투정을 기억하고, 부담스럽지 않게 ‘여분이 남아서’라는 무심한 핑계를 덧대어 약국에서 보호대를 사 왔을 성진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이 남자의 배려는 늘 이런 식이었다. 요란하게 생색내지 않지만, 내 생활의 가장 아프고 불편한 구석을 정확히 찾아내어 조용히 메워주는 사람.
“진짜…… 치사해.”
자꾸만 마음을 걷잡을 수 없게 만드는 성진의 다정함에, 서하는 울 듯이 코끝을 찡긋거리며 웃었다.
얼마 뒤, 분리수거를 위해 현관문을 열고 나오던 성진은 1501호 문 앞에 놓인 작은 디퓨저 병을 발견했다.
깊고 묵직한 우디 향. 성진이 평소 즐겨 쓰는 향수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결의 향기였다. 병에는 서하의 반듯한 글씨가 적힌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집 안으로 돌아온 성진은 신발을 벗자마자 곧장 책상으로 향했다. 그는 자신이 원래 쓰던 값비싼 디퓨저를 미련 없이 집어 들어 현관 신발장 위로 치워버렸다. 그리고 서하가 준 작은 디퓨저 병을,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모니터 바로 옆,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각 잡혀 정리된 자신의 데스크 정중앙에 조심스럽게 올려두었다.
방 안을 맴돌던 건조한 공기 위로, 서하가 만들어준 묵직하고 익숙한 우디 향이 부드럽게 퍼져 나갔다.
성진은 의자에 앉아 그 작은 유리병을 가만히 응시했다.
‘성진 씨 냄새랑 똑같길래.’
단순히 메모의 글씨를 읽었을 뿐인데, 꼭 서하가 눈앞에서 특유의 맑은 목소리로 속삭인 것처럼 생생하게 귓가를 맴돌았다. 성진은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깊은숨을 내뱉었다.
서하는 워낙 예의 바르고, 다정한 이웃에게 기꺼이 성의를 돌려주는 착한 사람이었다. 이 디퓨저 역시 그저 고마움의 표시일지도 모른다. 지레짐작으로 기대감을 키웠다가 혼자 실망하는 건 박성진의 방식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도, 날 좋아하면 좋겠다.’

나무 향이 은은하게 퍼지는 방 안에서, 성진은 작게 입술을 깨물며 생각했다. 너무 큰 기대는 하지 않으려 스스로를 다독여도, 속절없이 새어 나가는 단 하나의 진심이었다.
‘참 좋다. 이 사람이.’
같은 시각, 1501호.
서하 역시 외투도 벗지 않은 채 거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자신의 오른쪽 손목에 단단하게 감겨 있는 살구색 보호대에 머물러 있었다. 메모지에 반듯하게 적혀 있던 ‘여분이 남아서’라는 투박한 핑계를 떠올리자 또다시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서하는 소파 쿠션을 끌어안고 그 위로 얼굴을 푹 파묻었다.
‘괜히 혼자 착각해서 기대하지 말자. 원래 다정하고 남 배려하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잖아.’
애써 마음을 다잡으려 해 보아도, 손목을 감싼 부드러운 온기가 자꾸만 귓가에 대고 다른 말을 속삭이는 것 같았다.
한참 뒤, 서하는 쿠션에 묻고 있던 얼굴을 들어 휴대폰을 다시 집어 들었다. 손목 보호대에 대한 고마움도, 팝업 날부터 쌓여 있던 마음의 빚도, 더 이상 메모지 하나로 눌러둘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제는 핑계라도 좋으니 그와 조금 더 긴 시간을 마주 앉아 있고 싶었다.
문자를 보내놓고도 서하는 한동안 화면을 내려놓지 못했다. 너무 티가 났나. 그냥 고맙다는 말만 할 걸 그랬나. 뒤늦은 후회가 손끝까지 차오르려던 찰나, 답장은 생각보다 빠르게 도착했다.
서하는 휴대폰을 붙든 채 소리 없이 발끝을 동동 굴렀다. 자신이 밥을 사겠다고 했는데도 예약을 먼저 챙기겠다는 저 무뚝뚝한 단정함이 또 사람 마음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같은 시각, 1502호.
성진은 서하가 보내온 식당 링크를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벽시계를 확인했다. 밤 9시. 아직 식당이 영업 중일 시간이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번호를 눌러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예, 수고하십니다. 다가오는 금요일 저녁 7시 반, 두 명 예약하려고 하는데요.”
성진은 창밖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부탁드릴 게 하나 있는데. 일행 모르게 제가 미리 식사 비용을 결제해 두고 싶어서요. 가능하면 창가 쪽 제일 조용한 자리로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예약을 마치고 전화를 끊은 뒤에도 성진은 한동안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금요일 저녁. 단순히 밥 한 끼를 먹는 자리로 흘려보내기엔, 이미 마음이 너무 멀리 와 있었다.
결국 그는 다시 연락처를 열어 원필의 이름을 눌렀다.
“원필아. 다가오는 금요일 저녁에 꽃 하나만 준비해줄 수 있나.”
“꽃? 형이? 와, 뭔데. 고백해?”
“쓸데없는 소리 말고. 부담 안 가지게, 무조건 은은하고 작고 수수한 걸로. 흰색이나 푸른색 섞어서.”
“알았어, 알았어. 형 마음 다 알겠으니까 내가 알아서 예쁘게 해놓을게.”
전화를 끊은 성진은 꺼진 휴대폰 화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표정은 평소처럼 무뚝뚝했지만, 귓바퀴 끝만큼은 이미 들킬 만큼 붉어져 있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둔 각자의 공간.
행여나 혼자만의 착각일까 봐 섣부른 기대는 접어두려 애쓰면서도, 서로가 남긴 사소한 온기에 속수무책으로 흔들리고 마는 두 사람의 조심스러운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