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1호에 사람이 들어왔다
8화. 같은 말인데 다르게 들린다

8화. 같은 말인데 다르게 들린다

1501호에 사람이 들어왔다

어떤 감정은 알람 시계처럼 정확한 기점으로 시작되기도 한다. 서하에게는 성진의 쓰리피스 수트 차림을 마주했던 그 금요일 밤이 그랬다.

주말이 지나고 다시 맞이한 월요일 아침.

서하는 출근을 위해 1501호 현관을 나서면서부터 심호흡을 해야 했다. 평소 같으면 아무 생각 없이 벌컥 열었을 문고리를 잡고, 혹여나 맞은편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릴까 봐 귀를 쫑긋 세웠다. 다행히 15층 복도는 고요했다.

‘그래, 어차피 평소랑 똑같은 이웃일 뿐인데 괜히 나 혼자 오버하지 말자.’

서하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하지만 1층 로비에 도착해 건물 밖으로 나가려던 찰나, 서하의 굳은 다짐은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아.”

로비의 육중한 유리문을 열고 들어오던 성진과 정면으로 마주친 것이다.

아침 일찍 헬스장에서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인 듯, 성진은 편안한 회색 후드티에 트레이닝팬츠 차림이었다. 목에는 흰 수건이 걸려 있었고, 약간 젖은 앞머리를 넘기고 있었다. 지극히 평소와 같은 편안하고 무심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유리문을 밀고 있는 성진의 커다란 손, 후드티 너머로 드러나는 넓은 어깨, 그리고 땀에 젖어 살짝 붉어진 목선까지. 그 모든 것들이 너무나 선명하게 시야로 훅 밀려 들어왔다. 주말 내내 서하의 머릿속을 괴롭히던 그 단정한 정장 차림이 투명한 홀로그램처럼 성진의 현재 모습 위로 겹쳐 보였다.

“출근하십니까.”

성진이 밀고 있던 유리문을 놓지 않은 채 멈춰 서서 물었다. 서하가 먼저 나갈 수 있도록 문을 잡아주고 있는, 지극히 ‘박성진스러운’ 배려였다.

“아, 네! 일찍 운동 다녀오시나 봐요.”

서하는 애써 목소리 톤을 높이며 성진이 잡아준 문틈 사이로 몸을 뺐다. 평소라면 “감사합니다” 하고 가볍게 웃으며 지나쳤을 텐데, 오늘은 그를 스쳐 지나가는 짧은 순간 훅 끼쳐오는 옅은 땀 냄새와 서늘한 나무 향에 숨이 턱 막혔다.

“서하 씨.”

건물을 빠져나가려던 서하의 등 뒤로 성진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서하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았다.

“네?”

“밥은 먹고 나가는 겁니까.”

툭 던진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 평범한 안부 인사가 서하의 귓가에 닿는 순간, 이상한 파장을 일으켰다.

‘밥은 먹었어요?’

늘 누군가에게 밥을 챙겨주거나 혼자 대충 때우는 데 익숙했던 서하에게, 아침부터 끼니를 걱정해 주는 성인의 묵직한 음성은 묘한 울림이 있었다. 예전에도 분리수거장이나 엘리베이터에서 비슷한 안부를 들은 적이 있었지만, 오늘은 그 문장의 무게감이 완전히 다르게 다가왔다.

서하는 말문이 막혀 눈만 깜빡였다. 성진은 대답 없는 서하의 얼굴과, 그녀의 손에 들린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번갈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아침부터 빈 속에 그거 마시면 속 다 버립니다.”

“아… 그, 늦어서 빵이라도 하나 사 먹으려고요.”

“가다가 뭐라도 든든한 거 챙겨 무이소. 일도 좋지만 쓰러집니다.”

잔소리가 섞여 나오자 어김없이 부산 억양이 살짝 묻어났다. 예전엔 그저 ‘친절한 잔소리 대마왕’이라고 생각했던 그 억양이, 오늘은 귓가를 간지럽히는 다정한 타박으로 들렸다.

“네, 네. 챙겨 먹을게요. 성진 씨도… 식사 꼭 하시고요!”

서하는 거의 도망치듯 꾸벅 인사를 하고 종종걸음으로 멀어졌다. 성진은 로비 유리문 너머로 멀어지는 서하의 뒷모습을 보며, 자신이 또 아침부터 불필요한 잔소리를 한 건 아닌지 목 뒤를 긁적였다.

그날 저녁.

하루 종일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붕 뜬 기분으로 공방을 마감한 서하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15층 복도에 도착했다.

‘철컥-’

서하가 1501호 도어락 덮개를 올리려던 순간, 등 뒤에서 1502호의 현관문이 열렸다.

“어.”

쓰레기봉투를 들고나오던 성진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 아침에 이어 또다시 예고 없는 마주침. 서하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퇴근하십니까.”

성진이 무심히 인사하며 현관문을 닫았다.

“아, 네. 지금 막…….”

너무 놀란 나머지, 서하의 손가락이 도어락의 숫자 버튼을 헛짚었다. 당황한 서하가 다시 비밀번호를 누르려다, 이번엔 들고 있던 가방의 어깨끈이 스르륵 흘러내리며 팔꿈치에 걸렸다. 가방을 추스르려다 손에 쥐고 있던 카드지갑마저 복도 바닥으로 ‘툭’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우, 진짜….”

평소의 덤벙거리는 허당기가 하필 이 타이밍에 폭발할 게 뭐란 말인가. 서하가 얼굴을 붉히며 다급하게 쪼그려 앉으려 할 때, 시야에 커다란 손이 먼저 불쑥 들어왔다.

성진이 쓰레기봉투를 든 채 반대쪽 무릎을 굽혀 카드지갑을 주워 들었다.

“천천히 하이소. 잡으러 오는 사람도 없는데.”

성진이 서하에게 카드지갑을 내밀었다. 일어서며 건네주는 지갑을 받아 들기 위해 서하가 손을 뻗었을 때, 성진의 거칠고 마디 굵은 손가락 끝이 서하의 손등을 아주 가볍게 스쳤다.

‘찌릿-’

정전기라도 일어난 것처럼, 서하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서하는 흠칫 놀라며 카드지갑을 낚아채듯 받아 들었다. 성진은 그런 서하의 과민한 반응에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평소처럼 무심하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피곤해 보이는데 얼른 들어가서 쉬이소. 저녁 안 먹었으면 대충 때우지 말고 챙겨 드시고요.”

“네, 네! 성진 씨도 안녕히 계세요!”

서하는 허둥지둥 도어락을 열고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서하는 문에 등을 기대고 스르르 주저앉았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 소리가 복도 밖까지 들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방금 전 성진의 손끝이 스쳤던 자신의 손등을 반대쪽 손으로 꼭 감싸 쥐었다.

‘얼른 들어가서 쉬이소.’

‘저녁 안 먹었으면 대충 때우지 말고 챙겨 드시고요.’

문 밖에서 들려왔던 성진의 무심한 당부들이, 빈집의 공기를 타고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왜 자꾸 밥을 챙겨, 진짜….”

서하가 무릎에 이마를 푹 파묻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그는 똑같았다. 처음 이사 온 날 바닥에 박스를 깔라며 잔소리를 하던 모습이나, 분리수거장에서 테이프를 뜯어주던 모습, 엘리베이터에서 떨어진 부자재를 주워주던 모습과 다를 바 없는 ‘박성진의 일상’이었다.

변한 건 오직 서하 자신뿐이었다.

그의 덤덤한 친절이 이제는 온통 나를 향한 사적인 다정함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문을 잡아주는 커다란 손에 설레고, 밥을 먹었냐는 무심한 질문에 심장이 덜컹거렸다.

서하는 고개를 들어 거실 쪽을 바라보았다. 늘 완벽하게 치워져 있던 작업대 위가 아침에 급하게 나가느라 조금 어수선했다. 평소라면 당장 가서 치웠겠지만, 지금은 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여력이 없었다.

오직 맞은편 1502호에 사는 남자의 서늘한 향기, 단정한 수트, 낮게 울리던 목소리만이 서하의 온 감각을 지배하고 있었다.

서하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고개를 뒤로 젖혀 닫힌 현관문에 뒤통수를 기댔다.

좋아하게 되어버렸다.

그것도, 아주 단단히.

부정할 수 없는 명제가 서하의 조용한 거실 안에 무겁게 내려앉은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