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1호에 사람이 들어왔다
22화. 말하지 못한 불편함

22화. 말하지 못한 불편함

미팅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

조수석에 앉은 서하는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고생 많았습니다. 첫 단추 치고는 아주 훌륭하게 꿰었어요.”

운전대를 잡은 성진이 기분 좋은 목소리로 정적을 깼다. H사와의 팽팽했던 기싸움에서 서하의 마지노선을 지켜냈다는 사실에 그는 내심 크게 안도하고 있었다.

“네. 다 성진 씨 덕분이에요. 고마워요.”

서하가 고개를 돌려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성진의 그 치밀한 엑셀 표와 협상 능력이 없었다면, 오늘 서하는 저들의 날카로운 실무 질문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디자인마저 빼앗겼을지도 모른다.

성진은 신호 대기 중에 태블릿 PC를 켜서 방금 전 회의 내용을 빠르게 메모하기 시작했다.

“일단 H사 물류 센터로 들어갈 패키지 규격부터 다시 잡아야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내가 박스 업체 쪽에 발주서 수정해서 다시 넣을게요. 바코드 리스트도 옵션 확정되는 대로 내가 일괄로 돌려놓을 테니까, 서하 씨는 신경 쓰지 말고…….”

빠르고 정확한, 완벽한 프로젝트 매니저의 모습.

하지만 서하의 대답은 한 박자 늦었다.

“……아, 네. 알겠어요.”

평소 같았으면 “진짜 성진 씨 없었으면 어떡할 뻔했어요!”라며 호들갑스럽게 안도했을 텐데, 서하의 반응은 묘하게 건조하고 느릿했다. 성진이 태블릿에서 눈을 떼고 서하의 안색을 살폈다.

“안색이 안 좋은데. 많이 피곤합니까?”

“아… 네. 그냥 긴장했다가 풀려서 그런가, 좀 지치네요.”

“가서 따뜻한 물로 씻고 바로 자이소. 저녁은 내가 간단하게 차려 갈 테니까.”

성진의 다정한 당부에 서하는 입술을 꾹 깨물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왜 이러지.’

서하는 무릎 위에 올려둔 가방 끈을 만지작거렸다. 미팅 내내 느꼈던, 그리고 돌아오는 길 내내 가슴을 짓누르는 이 먹먹한 이물감을 도무지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녀의 이름이 걸린 브랜드였고, 그녀가 밤을 새워 만든 작품이었다. 그런데 회의실 안에서 사람들의 시선은 철저하게 성진만을 향해 있었다. 숫자와 효율이 엮이는 순간, 그들에게 이 프로젝트의 대표는 서하가 아니라 성진이었다. 서하는 그저 성진이 잘 포장해 준 물건을 만든, 손재주 좋은 외주 제작자 중 한 명이 된 것만 같았다.

‘내 일인데, 내가 조금씩 작아지고 있는 기분이야.’

하지만 서하는 차마 이 마음을 성진에게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성진은 잘못한 것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갈아 넣어 오직 서하를 돕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 완벽한 선의를 향해 ‘왜 내 자리를 뺏어갔냐’고 탓하는 건, 너무나도 옹졸하고 배은망덕한 짓이었다.

성진이 없었다면 이 계약 자체를 성사시키지 못했을 거라는 명백한 현실이, 서하의 입을 더욱 굳게 틀어막았다. 자신이 느끼는 이 서운함이 한낱 어린애 같은 자격지심인 것 같아 서하는 스스로가 한없이 초라해졌다.

오피스텔 주차장에 도착해 15층으로 올라온 두 사람은, 여느 때처럼 각자의 현관문 앞에 섰다.

“씻고 있으이소. 밥 차려서 넘어갈 테니까.”

성진이 도어락을 열며 자연스럽게 말했다. 1501호의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그가 밥을 차려 넘어오는 건 이제 너무나 익숙한 그들의 루틴이었다.

하지만 서하가 성진의 옷깃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성진 씨.”

“예. 왜요?”

“오늘은… 혼자 쉴게요. 밥 생각도 없고, 그냥 씻고 바로 자고 싶어서요.”

서하의 말에 성진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늘 피곤해도 같이 밥을 먹거나 그의 품에 기대어 쉬려 했던 서하였다. 이렇게 명확하게 선을 긋고 혼자 있겠다고 한 적은 연인이 된 이후 처음이었다.

하지만 성진은 서하의 파리한 안색을 보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무리했으니 그럴 만하죠. 오늘은 아무 생각 말고 푹 쉬이소. 내일 아침에 문 두드릴게요.”

성진이 서하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는 1502호 안으로 들어갔다.

철컥-

두 개의 문이 닫히고, 서하는 어두운 거실 한가운데 우두커니 섰다.

늘 위로가 되어주던 성진의 체온도, 다정한 잔소리도 지금은 온전히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그저 캄캄한 작업대 앞에 앉아, 웅크린 채 텅 빈 마음을 가라앉혀야만 했다.

같은 시각, 1502호.

성진은 겉옷을 벗어 걸고 데스크 앞에 앉았다. 노트북을 켜고 H사와의 다음 일정을 정리하려던 그의 손이 잠시 허공에 멈췄다.

방금 전 15층 복도에서 보았던 서하의 얼굴이 묘하게 잔상으로 남았다.

큰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고 돌아온 날이었다. 평소의 서하라면 피곤하더라도 성진에게 매달려 ‘진짜 고마웠다, 다행이다’라며 쫑알거렸을 테고, 성진이 밥을 차려주면 품에 기대어 나른하게 응석을 부렸을 것이다.

성진은 고개를 돌려 굳게 닫힌 현관문 쪽을 바라보았다.

“……왜 안 붙잡았지.”

성진이 낮게 중얼거렸다. 처음 느껴보는 아주 미세한 위화감이었다. 서하가 이렇게 아무런 미련 없이, 마치 자신을 밀어내듯 혼자만의 공간으로 쏙 들어가 버린 것이 낯설었다.

하지만 성진은 이내 고개를 젓고 마우스를 잡았다.

‘혼자 1인 공방 하던 사람이, 대기업이랑 엮이는 큰 판을 벌였으니 신경 쓸 게 오죽 많겠어. 긴장도 많이 했을 거고.’

성진은 서하의 그 알 수 없는 침울함과 거리감을, 순전히 낯선 대형 프로젝트가 주는 압박감과 ‘업무 피로’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내가 더 확실하게 틀을 잡아줘야겠네. 신경 덜 쓰게.’

그것이 성진이 내린, 사랑하는 연인을 위한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이었다.

그는 내일 서하를 대신해 처리할 외주 업체 목록과 납품 동선 계획을 더욱 치밀하게 짜내려 가기 시작했다.

자신의 이 견고하고 완벽한 배려가, 맞은편 1501호에 혼자 남겨진 서하를 더욱 고립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