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1호에 사람이 들어왔다
10화. 오해하기 좋은 밤

10화. 오해하기 좋은 밤

1501호에 사람이 들어왔다

‘착각하지 말자, 한서하. 저 사람은 원래 다른 사람의 불편함을 가볍게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일 뿐이야.’

하루 종일 공방에서 은선을 구부리며 서하는 수백 번도 넘게 스스로를 세뇌했다. 성진이 ‘여분이 남아서’라며 챙겨준 손목 보호대를 볼 때마다, 그의 덤덤하고 묵직한 목소리가 떠오를 때마다 자꾸만 부풀어 오르는 기대감을 억누르기 위해서였다.

며칠이 지나, 금요일 약속을 하루 앞둔 목요일 밤 11시 40분.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오피스텔 15층에 내린 서하는, 피곤한 눈을 비비며 복도 코너를 돌았다.

그리고 그 순간, 서하의 발걸음이 돌처럼 굳어버렸다.

“아씨… 왜 안 열려, 썅….”

1501호. 자신의 집 현관문 앞에, 웬 낯선 덩치의 남자가 몸을 가누지 못한 채 기대어 도어락을 쾅쾅 내리치고 있었다.

술 냄새가 복도 끝까지 진동했다. 남자는 제멋대로 비밀번호를 누르다 경고음이 울리자, 화가 난 듯 주먹과 발로 철문을 거칠게 걷어차기 시작했다.

“문 열라고! 씨발, 왜 안 열려!”

서하는 숨을 헉 들이켰다. 너무 놀라 뒷걸음질을 친다는 것이 그만 복도에 놓인 작은 소화기를 건드려 ‘툭’ 하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남자의 초점 없는 불쾌한 시선이 서하를 향해 천천히 돌아갔다.

“뭐야, 넌….”

남자가 비틀거리며 서하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위협적인 덩치와 형형한 눈빛에 서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벽에 바짝 붙어 얼어붙었다.

“야. 니가 여기 잠궜어? 문 열어.”

“저, 저기요… 층수를 착각하신 것 같은데….”

서하가 바들바들 떨며 대답했지만, 이성을 잃은 취객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남자가 갑자기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서하의 어깨를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

“문 열라고 했잖아, 이씨!”

“아악! 이, 이거 놓으세요! 살려주세요!”

남자가 서하를 도어락 쪽으로 거칠게 질질 끌었다. 어깨뼈가 부서질 듯한 악력에 서하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쳤다. 남자가 그런 서하를 위협하기 위해 다른 한 손을 높이 치켜든 찰나였다.

벌컥- 쾅!!

맞은편 1502호의 철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복도 벽에 세게 부딪혔다.

“……어디에 손을 대, 개새끼야.”

끓어오르는 불길을 억지로 잠재운 듯, 서늘하고 살기 어린 목소리.

성진이었다.

그는 서하를 위협하던 남자의 뒷덜미를 우악스럽게 낚아채더니, 그대로 복도 반대편 벽을 향해 짐짝처럼 내동댕이쳐버렸다.

“커억!”

압도적인 완력에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남자가 욕설을 뱉으며 비틀비틀 일어나려 하자, 성진은 자비 없이 남자의 멱살을 다시 틀어쥐고 벽으로 거칠게 밀어붙였다. 성진의 턱 근육이 터질 듯이 꿈틀거렸고, 평소의 이성적인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두 눈에는 걷잡을 수 없는 격노만이 형형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서, 성진 씨……!”

놀란 서하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 성진을 불렀다. 그 목소리에 성진은 남자를 향해 뻗으려던 주먹을 가까스로 멈추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남자의 멱살을 쥔 채,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112를 눌렀다.

잠시 후, 경찰과 관리소 직원이 올라와 상황은 금세 정리되었다. 취객은 다른 층에 사는 거주자가 맞았고, 연신 욕설을 퍼부으며 끌려 내려갔다.

소란이 휩쓸고 간 15층 복도에는 다시 서하와 성진, 단둘만 남게 되었다.

경찰이 사라지고 복도에 정적이 내려앉자, 그제야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서하의 긴장의 끈이 속절없이 끊어져 내렸다.

“괜찮습니까. 어디 안 다쳤어요?”

성진이 다급하게 다가와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서하의 상태를 살폈다.

“네… 괜찮, 흑, 괜찮아요. 성진 씨 아니었으면, 저 진짜…….”

애써 의연하게 대답하려던 서하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커다란 눈망울에서 눈물이 후드득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까 남자가 어깨를 틀어쥐었을 때의 공포가 뒤늦게 해일처럼 밀려온 것이다. 서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어린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성진은 핏기가 가신 채 바들바들 떠는 서하를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역시 아까 남자가 서하의 어깨를 쥐고 흔들던 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심장이 서늘해져 손끝이 저릿할 지경이었다.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성진이 서하의 팔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서하가 힘겹게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서려 했지만, 공포에 질려 힘이 풀린 다리가 푹 꺾이며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앗…….”

바닥으로 넘어질 뻔한 서하를, 성진이 재빨리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흐윽, 흑…….”

서하의 얼굴이 성진의 넓고 단단한 가슴팍에 묻혔다. 서하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성진의 옷자락을 꽉 움켜쥔 채 통곡하자, 성진은 그녀를 밀어내는 대신 자신의 크고 두꺼운 팔로 서하의 떨리는 등과 허리를 빈틈없이 꽉 껴안았다.

“괜찮습니다. 다 끝났어요.”

성진의 묵직하고 따뜻한 목소리가 서하의 정수리 위로 떨어졌다. 그는 걷잡을 수 없이 울음을 터뜨리는 서하의 등을 일정한 박자로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그녀가 온전히 진정할 때까지 묵묵히 어깨를 내어주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서하의 울음소리가 잦아들고 간헐적인 딸꾹질 소리만 남았을 즈음, 성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늦게 다니지 마이소.”

“…….”

“아니, 늦을 것 같으면 연락을 하든가.”

성진의 입에서 날 선 타박이 튀어나왔다. 화가 나서가 아니라,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던 놀란 마음을 숨기지 못한 탓에 나온 거친 말투였다.

서하가 성진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조그맣게 대답했다.

“그냥 이웃끼리… 늦게 들어온다고 무슨 연락을 해요….”

그래, 이웃. 아침 내내 착각하지 말자고 그토록 다짐했던 그 선.

그 말에 서하를 안고 있던 성진의 팔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그는 서하를 품에서 떼어내지 않은 채, 낮게 으르렁거리듯 속삭였다.

“어느 미친놈이, 이웃이 걱정돼서 이렇게 피가 마릅니까.”

“……성진 씨.”

“나는 내 이웃이 늦은 밤에 험한 꼴 당할 뻔했는데, 집구석에 발 뻗고 잘 만큼 속 편한 사람은 못 됩니다. 그러니까, 늦으면 데리러 갈 테니까 무조건 연락하란 소립니다.”

명백한 선 넘기였다.

이웃이라는 핑계를 대고 있었지만, 자신을 안고 있는 이 맹목적인 체온과 떨리는 목소리는 결코 평범한 이웃이 내보일 수 있는 온도가 아니었다.

‘혼자 착각하지 말자’고 하루 종일 쌓아 올렸던 서하의 방어벽이, 그의 품 안에서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위기의 순간 자신을 구해주던 넓은 어깨, 무섭게 화를 내며 걱정해 주는 목소리.

이토록 단단한 다정함 앞에서, 어떻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다음부턴, 연락할게요.”

성진의 품에 안긴 서하가 붉어진 눈가로 작게 대답했다.

그제야 서하의 등을 안고 있던 성진의 굳은 어깨가 서서히 풀렸다. 그는 서하가 떨리는 손으로 1501호의 도어락을 열고 안으로 완전히 들어갈 때까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그녀의 등 뒤를 지켜주었다.

철문이 닫히고, 서하는 현관문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취객에 대한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서하는 방금 전까지 성진의 체온이 닿아있던 자신의 뺨을 감싸 쥐며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착각하지 않으려는 노력은, 오늘 밤을 기점으로 완벽하게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