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1호에 사람이 들어왔다
25화. 같이 있는데 혼자

25화. 같이 있는데 혼자

어느 날 저녁, 성진은 무리해서 자신의 믹싱 일정을 뒤로 미뤘다. 며칠 째 밥도 제대로 챙겨 먹지 않고 작업대 앞에만 매달려 있는 서하를 억지로라도 앉혀놓고 제대로 된 식사를 먹이기 위해서였다. 아니, 식사는 핑계였고 사실은 대화가 필요했다. 최근 들어 묘하게 자신을 밀어내고 피하는 듯한 서하의 태도에 대한 명확한 이유를 들어야 했다.

성진은 1501호로 건너가, 펜치를 쥐고 있는 서하의 손에서 부드럽게 공구를 빼앗았다.

“오늘 저녁은 1502호에서 먹습니다. 배달시켜 놨으니까 일단 넘어오이소.”

“아, 나 이거 흐름 끊기면 안 되는데….”

“30분만 쉽시다. 얼굴이 반쪽이 됐어요.”

단호한 성진의 이끌림에 서하는 결국 한숨을 쉬며 1502호로 넘어왔다. 식탁 위에는 서하가 좋아하는 초밥과 따뜻한 우동이 차려져 있었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만 날 뿐, 예전처럼 일상적인 대화나 실없는 장난은 오가지 않았다. 성진은 물컵을 매만지며 가만히 서하를 응시했다.

“서하 씨.”

“네?”

“요새, 나 피합니까.”

돌려 말하지 않는 직구였다. 초밥을 씹던 서하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성진의 짙고 고요한 시선이 서하를 곧게 향하고 있었다.

“내가 뭐 실수한 거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자꾸 도와준답시고 귀찮게 해서 부담스럽습니까.”

정확한 지적이었다. 서하는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솔직한 감정들을 만지작거렸다.

‘성진 씨가 내 일을 다 통제해 버려서 내 자리가 없어지는 것 같아요. 성진 씨가 너무 유능해서 내가 한없이 초라해져요.’

하지만 그 말을 뱉으려 고개를 든 순간, 서하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극도로 피로해 보이는 성진의 얼굴이었다.

눈 밑에는 짙은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고, 눈동자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자신의 H사 콜라보 일정을 맞춰주느라 밤을 새우고, 낮에는 본인의 앨범 작업을 하느라 잠을 거의 자지 못한 몰골이었다.

서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나 하나 돕겠다고 저렇게까지 무리하고 있는 사람에게, 자존심이 상한다느니 내 자리가 줄어든다느니 하는 소리를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너무나 배부르고 이기적인 어린애의 투정처럼 느껴졌다.

“……피하긴요. 제가 성진 씨를 왜 피해요.”

결국 서하는 진심을 꾹꾹 눌러 삼킨 채,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변명을 내뱉었다.

“그냥 납기일이 며칠 안 남아서 예민해져서 그래요. 신경 쓸 것도 너무 많고, 체력적으로도 지치고… 그래서 여유가 없었나 봐요. 미안해요, 성진 씨 신경 쓰이게 해서.”

서하의 대답에 성진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완전히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평소의 박성진이라면 여기서 멈추지 않고, 거짓말하지 말라며 서하의 진짜 속마음을 끝까지 파고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성진의 눈에 비친 서하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여기서 자꾸 캐묻고 감정적인 대화를 강요하는 것조차 그녀에게는 버거운 짐이 될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성진이 짧은 한숨과 함께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많이 피곤하죠. 내가 괜한 소리를 했네요. 밥 마저 무이소.”

그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묵묵히 우동 국물을 떠먹었다. 서하를 배려한 성진의 어른스러운 한 발짝 후퇴였다.

하지만 서하의 가슴 한구석에는 싸늘한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눈앞에 마주 앉아 있는데도, 그가 자신의 변명을 덮어주고 거리를 두는 순간 지독한 외로움이 훅 밀려왔다. 자신이 입을 닫아버림으로써, 스스로를 완벽하게 고립시켜 버렸다는 뼈아픈 자각이었다. 같이 있는데도 혼자였다.

대화가 어긋난 그날 이후, 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한층 더 서늘하고 건조해졌다.

그리고 그 불편한 기류를 덮으려는 듯, 서하의 행동은 점점 더 과장되기 시작했다.

다음 날 오후.

성진이 작업실에서 헤드폰을 벗고 기지개를 켜는데, 현관 쪽에서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성진 씨, 이거 작업실로 좀 옮겨줄래요?”

현관에 선 서하의 손에는 커다란 택배 상자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성진이 다가가 상자를 받아 들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이게 뭡니까.”

“하나는 성진 씨 작업할 때 앉는 의자에 두는 고오급 인체공학 쿠션이고요, 하나는 피로 해소에 엄청 좋다는 프리미엄 비타민 세트예요!”

서하가 밝게 웃으며 상자를 뜯어 내용물을 꺼냈다. 성진의 책상 의자에 직접 쿠션을 세팅해 주고, 모니터 앞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비타민 상자를 늘어놓는 서하의 손길은 분주했다.

“성진 씨 요새 나 도와주느라 잠도 못 자고 허리도 아프다면서요. 밥도 맨날 성진 씨가 사주고, 포장재도 성진 씨 돈으로 먼저 결제하고. 내가 너무 받기만 하는 것 같아서 주문했어요.”

성진은 의자에 놓인 비싼 쿠션과 비타민 상자를 번갈아 내려다보았다.

기뻐야 할 상황인데, 입가에는 단 한 줌의 미소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속에서 날카로운 가시가 긁고 지나가는 듯한 따가운 통증이 느껴졌다.

“……서하 씨.”

“응? 왜요? 쿠션 색깔이 맘에 안 들어요? 블랙으로 살까 하다가 다크 그레이가 더 예뻐서 샀는데.”

“내가 보상받으려고 서하 씨 돕는 거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지 않았습니까.”

성진의 목소리가 텅 빈 작업실에 서늘하게 울려 퍼졌다.

서하의 분주했던 손놀림이 딱 멈췄다. 성진은 화를 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깊게 체념한 듯한, 상처받은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밥 사고, 박스 좀 사고, 밤 좀 새운 거. 그거 빚진 거 아닙니다. 애인 사이에 그 정도도 못 해줍니까.”

“빚이라고 생각한 거 아니에요. 그냥, 나도 성진 씨한테 해주고 싶어서….”

“서하 씨가 나한테 선 긋고, 내가 해준 호의를 부채로 만들어서 정산하려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내가 너무 예민한 겁니까.”

정곡을 찌르는 성진의 말에 서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서하는 자신이 짐이 되는 것이 싫었고, 그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내기 위해, 그리고 성진의 희생에 대한 죄책감을 덜기 위해 계속해서 무언가를 ‘지불’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 행동이 성진에게는 자신을 ‘연인’이 아닌 ‘갚아야 할 거래처’로 밀어내는 차가운 선 긋기로 다가갔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나는… 그런 게 아니라….”

서하가 변명을 찾으려 더듬거렸지만, 성진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고맙습니다. 잘 쓸게요.”

성진은 더 이상 긴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언성을 높이고 화를 내는 대신, 그는 서하가 건넨 선물을 무심히 받아들이는 쪽을 택했다. 하지만 그 조용한 체념은 서하에게 그 어떤 불호령보다 차갑고 아프게 꽂혔다.

“그럼… 나 먼저 가서 일할게요.”

서하는 도망치듯 1502호 현관을 빠져나왔다.

문이 닫히고, 성진은 책상 위에 놓인 값비싼 비타민 상자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다정함이 짐이 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녀가 그 짐을 돈으로 환산해 갚아내려 한다는 사실이 성진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었다.

서하 역시 1501호의 현관문을 등 뒤로 한 채, 소리 없는 숨을 삼켜냈다. 상대를 위한다는 각자의 핑계가, 두 사람을 가장 완벽하게 외롭고 쓸쓸한 고도에 가둬버린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