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1호에 사람이 들어왔다
23화. 저희라는 주어

23화. 저희라는 주어

다음 날 아침 8시.

1501호 거실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제 H사와의 미팅 여파에 밤늦게까지 이어진 샘플 수정 작업 탓에, 서하의 안색은 창백했고 눈 밑에는 짙은 피로가 내려앉아 있었다. 그녀는 식은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쥔 채 멍한 눈으로 노트북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었다.

‘삐리릭- 철컥.’

성진이 간단한 아침거리를 들고 1501호로 건너왔다. 소파에 구부정하게 앉아 있는 서하를 발견한 성진의 미간이 단번에 좁혀졌다.

“얼굴이 왜 이렇습니까. 어제 몇 시에 잤어요.”

“아… 성진 씨. 그냥, 샘플 디테일 조금 손보느라요.”

성진은 탁자 위에 음식을 내려놓고 서하의 모니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면에는 방금 전 H사 담당자로부터 도착한 메일이 띄워져 있었다.

H사 '새벽 숲' 라인 1차 진행 관련 추가 확인 요청

패키지 사이즈 최종 컨펌

대중형 옵션 수량 배분 비율

바코드 발급용 상품명 영문 표기

최종 납품 일정 재확인 및 담당자 참조 요청

디자인에 관한 피드백은 단 한 줄도 없는, 철저하게 건조하고 빡빡한 실무진의 확인 요청들이었다. 가뜩이나 피곤한 상태에서 숫자가 빼곡한 메일을 마주한 서하가 작게 한숨을 쉬며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답장을 쓰기 위해 키보드에 손을 올리려는데, 성진의 커다란 손이 서하의 손목을 부드럽게 제지했다.

“서하 씨.”

“네?”

“지금 눈 거의 감겼는데. 내가 엑셀로 정리해서 답장 초안 만들어둘 테니까, 서하 씨는 가서 따뜻한 물로 좀 씻고 정신 차리이소. 커피 그만 마시고요.”

성진의 제안은 너무나도 합리적이고 다정했다. 서하 역시 지금 억지로 숫자를 들여다보았다간 실수를 할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마워요. 금방 씻고 올게요.”

서하가 욕실로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테이블 위에 놓인 서하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화면에는 H사 기획팀 담당자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성진은 욕실 문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서하 씨, 휴대폰 울립니다. H사 담당자 같은데, 급한 건가 본데예. 내가 당겨 받을까요?”

“아, 씻는 중이라서요! 급한 걸 수도 있으니까 성진 씨가 먼저 좀 받아주실래요?”

물소리 너머로 서하의 다급한 허락이 떨어졌다. 성진은 지체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십여 분쯤 지났을까. 샤워를 마치고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거실로 나온 서하의 귀에, 통화를 하고 있는 성진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파트장님.”

서하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성진은 노트북 화면의 엑셀 표를 띄워놓고, 능숙한 비즈니스 톤으로 전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패키지 사이즈는 어제 제가 보여드린 B안으로 가시죠. H사 기본 박스 규격이랑도 딱 맞고, 파손 위험도 덜하니까요. 대중형 옵션 비율은 7대 3으로 가겠습니다. 예, 바코드 영문명은 제가 이따 엑셀로 일괄 정리해서 회신 드리겠습니다.”

수화기 너머 담당자의 말을 잠시 듣고 있던 성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 제 번호요? 예, 상관없습니다. 대표님은 작업에 집중하셔야 하니까요. 앞으로 편하게 제 쪽으로도 같이 연락 주십시오. 예, 수고하십시오.”

막힘없이 매끄러운 통화였다. 메일을 보낸 직후 급하게 확인차 걸어온 전화였지만, 성진은 이미 머릿속으로 초안을 다 짜둔 터라 서하의 부재가 무색할 만큼 완벽하게 실무를 쳐내고 있었다.

전화를 끊은 성진이 뒤를 돌아보다 젖은 머리로 서 있는 서하를 발견하고는 부드럽게 웃었다.

“다 씻었습니까.”

“아… 방금, H사 전화….”

“예. 아까 보낸 메일 확인해달라고 전화 왔길래, 마침 초안 쓰던 참이라 내가 바로 답했습니다.”

성진은 자신이 대단한 일을 했다고 생색내지 않았다. 그저 쏟아진 물을 닦아주듯, 아주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태도였다.

“아, 그리고 앞으로 자잘한 실무 확인은 내 쪽으로도 같이 연락하겠다고 하길래 그러라고 했습니다. 안 그래도 서하 씨 피곤한데, 작업하다가 저런 전화까지 일일이 붙들고 있으면 효율 떨어지잖아요. 내 선에서 다 정리해둘 테니까 신경 안 써도 됩니다. 이제 샘플 수정만 보면 돼요.”

숫자와 효율을 근거로 한 완벽한 배려였다.

하지만 서하의 가슴 한구석에는 싸늘한 이물감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내가 모르는 사이, 내 프로젝트의 실무가 완전히 성진 씨 쪽으로 기울었구나.’

분명 한서하라는 1인 창작자의 브랜드인데. 정작 자신이 욕실에 있는 사이, 거래처와 일정을 조율하고 결정을 내리는 모든 실질적인 업무가 성진의 손에서 끝이 나버렸다. 같이 연락을 주겠다는 H사의 말은 정중한 통보일 뿐, 결국 숫자와 일정이 오가는 이 프로젝트의 실질적인 통제권은 완벽하게 성진에게 넘어가 있었다. 마치 자신은 대표가 아니라, 성진이라는 유능한 매니저에게 결과를 ‘전달받는’ 소속 직원이 된 것만 같았다.

하지만 서하는 차마 이 묘한 상실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맞다, 자신이 씻느라 전화를 못 받을 상황이었고 대신 받아달라고 부탁한 것도 자신이었다. 성진이 없었으면 숫자를 놓치거나 실수했을지도 모른다. 성진은 어제부터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오직 자신을 돕기 위해 귀찮은 실무를 대신 떠안아 주고 있는 중이었다.

이 완벽하고 고마운 선의를 향해 ‘왜 내 일을 마음대로 정리하냐’고 따지는 건, 너무나도 배은망덕하고 못난 짓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스스로의 옹졸함이 싫어 서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고마워요. 성진 씨 아니었으면 오늘 하루 종일 헤맸을 거예요.”

“고맙긴요. 자, 이것부터 확인해 보이소. 아까 담당자한테 보낼 확인 메일 초안입니다. 검토해 보고 괜찮으면 서하 씨 메일로 전송만 하이소.”

성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화면을 내어주었다.

수건을 목에 건 채 노트북 앞에 앉은 서하의 시선이, 반듯하게 적힌 비즈니스 메일의 문장들을 따라 내려갔다.

[안녕하세요, H사 기획팀 파트장님.

방금 유선으로 논의한 '새벽 숲' 라인의 세부 진행안을 보내드립니다.

저희가 제안해 드린 대중형 옵션의 단가 조정표는 첨부파일과 같으며,

저희 측에서 부담하기로 한 패키지 비용 및 최종 납품 일정은…….]

서하의 시선이 특정 단어 위에서 우뚝 멈춰 섰다.

‘저희가 제안해 드린’

‘저희 측에서 부담하기로 한’

저희.

어제 미팅 자리에서부터 느꼈던, 그리고 방금 전 통화 소리를 들으며 느꼈던 그 막막한 이물감이, 이 두 글자를 통해 명확한 실체로 다가왔다.

메일의 주어는 당연히 ‘저’여야 했다. 하지만 성진이 쓴 이 완벽한 메일 속에서, 이 프로젝트는 이미 박성진과 한서하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회사의 ‘우리’ 프로젝트로 변모해 있었다.

서하는 마우스를 쥔 손가락 끝에 힘을 주었다. 문장은 매끄러웠고, 상업적으로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철저한 문서였다. 성진이 그동안 쏟아부은 노동과 시간을 생각하면 ‘저희’라는 단어는 너무나도 합당한 말이었다. 오히려 성진의 지분을 지우고 ‘저’라고 고쳐 보내는 것이 비양심적인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 한구석이 텅 비어버린 것처럼 시리고 억울할까.

성진의 방식은 거대한 불도저 같았다. 그녀를 힘들게 하는 돌부리와 잡초들을 완벽하게 밀어버리고 평탄한 아스팔트 길을 깔아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압도적인 보호 속에서, 서하가 직접 흙을 묻히고 땀 흘려 일궈내야 할 작고 소중한 텃밭은 흔적도 없이 아스팔트 아래로 파묻혀버리고 만 기분이었다.

“서하 씨.”

한참 동안 모니터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이 없는 서하를 보며, 성진이 의아한 듯 물었다.

“왜요. 문구 중에 수정할 거 있습니까? 빠진 내용 있어요?”

지극히 실무적이고, 돕기 위해 뻗어오는 선의 가득한 질문.

서하는 입술을 달싹였다. ‘저희가 아니라 저예요. 내 일이지, 우리 일이 아니에요.’ 그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성진의 얼굴을 본 순간, 서하는 끝내 그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밤을 새워 퀭해진 그의 눈가와, 오직 서하의 짐을 덜어주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옅은 뿌듯함을 띠고 있는 그 무해한 표정.

서하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모니터에서 시선을 뗐다.

“……아니요. 없어요.”

“괜찮습니까?”

“네. 문장도 매끄럽고, 완벽하네요. 이대로 보낼게요.”

“다행이네요. 그럼 밥부터 무이소. 식는다.”

성진은 그제야 안도하며 숟가락의 포장을 뜯어 서하의 손에 쥐여주었다.

서하는 숟가락을 쥐었지만,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모래알을 씹는 것처럼 목구멍이 까슬거렸다. 식탁 위에는 일상적인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

“…….”

평소 같았으면 실없는 장난을 치거나 웃음꽃을 피웠을 아침 식사였다. 하지만 오늘 두 사람 사이에는 처음으로 이상할 만큼 무겁고 불편한 정적이 가라앉아 있었다.

성진도 이 숨 막히는 공기를 눈치챈 듯, 슬쩍 서하의 눈치를 살폈다.

‘많이 피곤한가 보네. 입맛이 없나.’

그는 서하가 말없이 숟가락을 뒤적이는 이유를, 며칠간 누적된 극도의 업무 스트레스 탓으로만 여겼다. 서하의 마음속에 어떤 균열이 생기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성진은 그저 자신이 더 많은 실무를 대신 쳐내야겠다고 다짐할 뿐이었다.

서하는 밥을 반도 먹지 못하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했지만, 그 완벽한 보호 아래서 한서하라는 1인분의 이름표는 소리 없이 지워지고 있었다.

1501호의 아침 공기가, 처음으로 서늘하고 불편하게 얼어붙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