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1호에 사람이 들어왔다
24화. 줄어드는 시간

24화. 줄어드는 시간

H사 프로젝트의 1차 납품일이 다가올수록, 1501호의 시계는 평소보다 몇 배는 빠르고 가혹하게 돌아갔다.

서하의 일상은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샌드위치로 대충 끼니를 때우고, 잠자는 시간마저 줄여가며 작업대 앞에 앉아 있는 것의 반복이었다. 성진과의 달콤했던 저녁 식사나 주말의 여유로운 산책 같은 것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다.

물론 성진이라고 한가한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 하반기에 발매될 소속 가수의 정규 앨범 편곡 수정과 믹싱, 외부 미팅 일정이 겹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주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성진은 하루에 단 몇 시간이라도 짬이 날 때면 어김없이 1501호로 건너왔다.

“밥 묵고 합시다.”

밤 10시. 성진이 근처 고급 일식집에서 포장해 온 값비싼 초밥 세트를 식탁 위에 늘어놓았다.

“와, 진짜 맛있겠다. 근데 이거 엄청 비싼 거 아니에요?”

“먹고 힘내야 상자도 접죠. 얼른 와서 드시죠, 대표님.”

성진의 다정한 농담에 서하가 피식 웃으며 마주 앉았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팽팽했던 긴장감이 잠시나마 풀리는 듯했다.

하지만 식사를 마친 직후였다. 성진이 빈 용기를 치우려 일어서는데, 그의 바지 주머니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한 성진의 짙은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한서하 님이 100,000원을 송금하셨습니다. (메모: 박 피디님 특식 & 야근 수당!)]

성진의 시선이 휴대폰 액정에서 서하에게로 향했다. 서하는 쑥스러운 듯 코끝을 찡긋하며 웃고 있었다.

“……이게 뭡니까.”

“아, 초밥값에 제 마음 조금 더 보탰어요. 요즘 성진 씨가 매일 제 일 도와주느라 잠도 못 주무시잖아요.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서하 씨.”

성진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톤 낮게 가라앉았다.

“내가 수고비 받으려고 서하 씨 옆에서 박스 접는 알바생입니까?”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이런 거 하지 마이소. 기분 참 이상하네.”

성진은 단호하게 거절하며 그 자리에서 송금된 돈을 다시 서하의 계좌로 반환해 버렸다. 돈이 다시 돌아왔다는 알림음에 서하의 입술이 살짝 굳어졌다.

서하 입장에서는 그가 갈아 넣은 수면 시간과 체력에 대한 미안함을 어떻게든 갚아내고 싶은 ‘보답의 성의’였다. 하지만 성진의 입장에서는 연인으로서 건넨 순수한 애정을, 철저하게 선을 긋고 정산해야 할 ‘부채’로 취급받는 것 같아 속이 상했다.

그날 이후,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하게 삐걱거리는 톱니바퀴 같은 어긋남이 반복되었다.

며칠 뒤 오후, 성진이 짬을 내어 1501호로 건너왔을 때였다.

거실 한편에는 1차로 포장을 마친 수백 개의 택배 박스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성진이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이거 용달 기사님 불러야겠네요. 내가 아는 퀵 업체 쪽에 전화해서 톤수 맞춰서 부르겠습니다.”

“아, 성진 씨. 괜찮아요.”

서하가 노트북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부드럽게 성진의 말을 잘랐다.

“제가 아까 어플로 예약해 놨어요. 내일 오전 10시에 오시기로 했어요.”

“……언제 예약했습니까. 나한테 말하면 금방 처리해 줬을 텐데.”

“이런 것까지 일일이 성진 씨한테 부탁할 순 없잖아요. 성진 씨도 오늘 믹싱 마감이라 바쁜 거 뻔히 아는데. 제가 알아서 찾아보고 했어요.”

웃으며 뱉어낸 말이었지만, 성진의 손은 갈 곳을 잃고 허공을 맴돌았다. ‘내가 알아서 했다’는 그 독립적인 문장이 묘하게 성진을 밀어내는 유리벽처럼 느껴졌다.

심지어 성진의 얼굴에는 며칠째 잠을 자지 못한 사람 특유의 지친 기색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새빨갛게 핏발이 선 눈, 까슬하게 올라온 수염자국. 오직 서하의 짐을 덜어주겠다는 의지 하나로 미련하게 버티고 있는 것이 서하의 눈에도 너무나 뻔히 보였다.

그의 무리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서하의 가슴 한구석에는 묵직한 돌덩이가 얹어지는 것 같았다. ‘나 때문에… 나 하나 챙기겠다고 저렇게까지 무리하고 있잖아.’ 미팅 때 느꼈던 ‘저희’라는 주어의 박탈감과, 성진을 힘들게 한다는 죄책감이 뒤섞여 서하를 짓눌렀다.

다음 날 저녁.

이른 저녁을 대충 컵라면으로 때우던 성진이, 어김없이 1501호로 건너왔다.

“오늘은 송장 출력해야 하죠. 엑셀 파일 열어두이소. 내가 매칭해서 뽑겠습니다.”

성진이 자연스럽게 서하의 노트북 쪽으로 손을 뻗으려던 찰나였다.

서하가 몸을 틀어 노트북 화면을 가리며, 성진의 팔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성진 씨.”

서하의 입가에는 다정한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차분하고 단단했다.

“피곤하죠. 눈 다 충혈됐어요.”

“……안 피곤합니다. 이것만 마저 끝내놓고 쉴게요.”

“아니요. 놔두세요. 이건 제가 할게요.”

서하가 성진이 쥐려던 마우스를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호한 손길로 빼앗아 책상 한쪽으로 밀어두었다.

“성진 씨도 내일모레까지 넘겨야 할 편곡 음원 있다면서요. 가서 작업해요. 나 혼자 할 수 있어요.”

“같이 하면 한 시간이면 끝납니다. 이거 혼자 다 뽑고 붙이려면 오늘 또 밤새야 돼요.”

“진짜 괜찮아요. 나 혼자 할 수 있는 양이에요.”

성진이 미간을 좁히며 서하의 손을 다시 잡으려 했지만, 서하가 슬쩍 손을 빼내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가서 푹 쉬고, 작업해요. 오늘은 진짜 나 혼자 할 테니까 내일 아침에 얼굴 봐요, 우리.”

웃고 있는 얼굴, 다정하고 상냥한 말투, 상대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배려 깊은 문장.

어디 하나 모난 곳 없는 예쁜 말이었지만, 성진의 귓가에는 그 다정한 목소리가 명백한 ‘퇴거 통보’처럼 서늘하게 꽂혔다.

“……진짜, 혼자 할 수 있겠습니까.”

“네. 걱정 마세요.”

서하의 확고한 대답에 성진은 더 이상 고집을 부릴 명분이 없었다. 아무리 연인이라도, 그녀가 이토록 완고하게 밀어내면 억지로 그 선을 넘고 들어갈 만큼 박성진은 무례한 사람이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무리하지 말고 적당히 끊고 자이소.”

성진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1501호의 현관으로 걸음을 돌렸다. 서하 역시 배웅을 나가는 대신 작업대 앞에 다시 앉아 마우스를 쥐었다.

‘철컥-’

무거운 철문이 닫히고, 성진은 15층 복도에 홀로 남겨졌다.

그는 굳게 닫힌 1501호의 문을 가만히 응시했다.

‘나 혼자 할 수 있어요.’

‘가서 푹 쉬어요.’

그녀의 다정한 배려가 목구멍에 턱, 걸려 삼켜지질 않았다. 서하가 피곤한 자신을 배려해서 밀어냈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에서 찌르르하고 번져가는 이 낯설고 뾰족한 감정은 분명 ‘서운함’이었다. 아무리 힘들고 피곤해도, 그녀가 기대어 준다면 기꺼이 모든 것을 다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데. 서하는 자신의 짐을 나누어주는 대신, 고마움을 돈으로 정산하려 들었고, 끝내 부드럽고 단호하게 그를 문밖으로 세워버렸다.

성진은 자신의 집인 1502호의 도어락을 열고 텅 빈 거실로 들어섰다.

불 꺼진 고요한 거실 한가운데 서서, 그는 처음으로 두 사람 사이에 아주 얇고 투명한 유리벽이 세워졌음을 실감했다.

사랑은 여전히 15층의 공기 속에 머물고 있었지만, 서로를 아끼고 배려하는 방식이 조용히 어긋나기 시작하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