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1호에 사람이 들어왔다
20화. 타협의 온도

20화. 타협의 온도

최종 샘플을 발송하고 사흘 뒤.

평화로웠던 1501호의 저녁은, 알림음과 함께 도착한 한 통의 이메일로 인해 일순간 가라앉았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소파에 나란히 앉아 과일을 먹고 있던 두 사람의 시선이 노트북 화면으로 향했다. 발신자는 H사 플랫폼의 담당 MD였다.

[한서하 대표님. 보내주신 샘플은 임원진 회의에서 아주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특히 ‘새벽 숲’ 라인의 무드가 훌륭하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거 보십시오. 통할 줄 알았다니까.”

성진이 득의양양하게 웃으며 서하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서하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메일의 스크롤을 아래로 내리자, 두 사람의 표정이 동시에 굳어졌다.

[다만, 다가오는 기획전의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해 메인 상품인 ‘새벽 숲’의 디자인을 조금 더 무난하고 심플하게 변경해 주셨으면 합니다. 거친 나뭇잎 펜던트의 질감을 매끄럽게 다듬고, 체인도 한 줄로 단순화하는 방향을 제안해 드립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서하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나뭇잎의 거친 질감은 ‘새벽 숲’이라는 이름의 정체성이자, 서하가 밤을 새워가며 조각도로 수백 번을 긁어내어 만든 가장 공방다운 디자인이었다. 그걸 매끄럽게 다듬고 한 줄로 바꾸라는 건, 서하의 색깔을 지우고 공장제 기성품처럼 만들어 오라는 통보나 다름없었다.

“이럴 거면 동대문에서 떼다 팔지, 핸드크래프트 브랜드랑 협업을 왜 해….”

서하가 속상함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화면을 들여다보던 성진이 미간을 좁히며 낮게 입을 열었다.

“플랫폼 놈들 뻔하죠. 근데,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닙니다.”

“……네?”

“기획전 메인 배너에 걸려면 일단 트래픽이 터져 줘야 합니다. 그러려면 마니아층보다는 불특정 다수가 무난하게 지갑을 열 만한 디자인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고요.”

수많은 앨범을 팔아본 프로듀서다운, 너무나도 차분하고 객관적인 분석이었다.

“음악 할 때도, 앨범 낼 때 타이틀곡 하나 정도는 억지로라도 대중적인 거 씁니다. 일단 차트 진입을 시켜야 사람들이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수록곡들도 들어주니까요.”

“…….”

“이 바닥이 원래 그렇습니다. 메인 상품 딱 하나만 저쪽 요구대로 대중성 챙겨 주고, 그걸 미끼 삼아서 나머지 서브 라인업으로 서하 씨 진짜 색깔 보여주는 건 어떻습니까.”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이었으며, 서하의 브랜드가 상업적으로 가장 빠르고 안전하게 안착할 수 있는 현실적인 전략이었다.

하지만 서하는 선뜻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그녀는 노트북에서 시선을 거두고 성진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성진 씨.”

“예.”

“성진 씨가 이름 붙여줬잖아요. 새벽 숲이라고.”

서하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창작자로서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단단한 심지가 박혀 있었다.

“거친 질감이랑 레이어드 체인은 내 정체성이 제일 진하게 담긴 디테일이에요. 거기서 그걸 다 빼버리면, 그게 내 이름 달고 나가는 의미가 뭐가 있어요. 그게 제일 제 브랜드다운 부분인데.”

그녀의 올곧은 눈빛과 흔들림 없는 대답.

순간, 성진의 말문이 탁 막혔다.

성진은 자신이 무의식중에 상업 음악 바닥에서 굴러먹던 ‘생존의 논리’를 그녀의 소중한 결과물에 함부로 들이밀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하에게 이 목걸이는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밤을 새워가며 깎아낸 그녀의 세계 그 자체였다.

“……아.”

성진은 짧은 탄식과 함께 마른세수를 했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고집하거나 변명하지 않았다. 성진은 곧바로 자세를 고쳐 앉으며, 서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미안해요. 내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

“이건 내가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네요. 대표님이 지킬 건 지켜야죠. 서하 씨 말이 다 맞습니다.”

자신의 실수를 깨닫자마자 변명 없이 즉각 인정하고 물러서는 태도. 성진은 철저하게 서하의 소유권과 결정권을 존중하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성진의 깔끔한 인정에, 잔뜩 날을 세우고 있던 서하의 어깨도 그제야 스르르 풀려 내렸다. 성진은 노트북을 제 쪽으로 조금 당기며, 이번에는 ‘평가자’가 아닌 ‘조력자’의 눈빛으로 화면을 응시했다.

“메일로 바로 거절 답장 쓰지 말고, 일단 내일 대면 미팅부터 잡읍시다.”

“미팅이요?”

“예. 글로만 주고받으면 저쪽도 기싸움한다고 절대 안 굽힙니다. 직접 만나서 쇼부 칩시다.”

성진이 빠른 속도로 머리를 굴리며 전략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원본 ‘새벽 숲’ 디자인은 서하 씨 브랜드의 프리미엄 시그니처 라인으로 무조건 유지하는 겁니다. 대신, H사가 원하는 대중형 버전을 아예 별도의 기획 옵션으로 따로 빼서 제안해 봅시다. 단가도 좀 낮춰서요. 그러면 저쪽도 명분이 생기니까 함부로 다 엎자고는 못 할 겁니다.”

서하의 눈이 커졌다.

디자인의 오리지널리티는 완벽하게 지켜내면서, 플랫폼의 상업적인 요구까지 충족시켜 주는 완벽한 타협안이었다.

“와… 그런 방법이 있네요. 성진 씨 진짜 천재예요?”

“천재는 무슨. 하도 까여봐서 맷집이 생긴 것뿐입니다.”

성진이 픽 웃으며 서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서하는 성진의 조언대로 H사 담당자에게 내일 오후 미팅을 요청하는 정중한 메일을 작성해 보냈다.

위기는 성진의 빠르고 영리한 대처 덕에 부드럽게 넘어간 듯 보였다.

하지만 그날 밤.

침대에 누운 서하는 묘하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싸운 것도 아니었고, 성진이 자신의 의견을 묵살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고집을 전적으로 존중해 주었다.

그런데 왜일까. 가슴 한구석에 아주 작은 모래알이 굴러다니는 것처럼 껄끄러운 이물감이 가시질 않았다. 성진의 머릿속에서 너무나도 쉽게 튀어나오던 상업적인 타협의 논리들. 그것이 현실임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그가 자신의 작품을 철저하게 ‘대중의 입맛을 맞춰야 할 상품’으로만 분석했다는 찰나의 서운함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서하는 뒤척이며 이불을 목끝까지 끌어당겼다.

‘그래, 혼자였다면 절대 이런 영리한 타협안은 생각지도 못했을 거야.’

성진이 없었다면 억울함에 눈물만 쏟거나, 자존심을 꺾고 공장제 같은 디자인을 내놓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서하는 자신을 위해 누구보다 빠르게 머리를 굴려 방패를 세워준 그의 든든함을 떠올리며, 작게 일었던 서운함을 애써 털어냈다.

오히려 그가 곁에 있음에 감사하자고 스스로를 다독이자, 복잡했던 머릿속이 조금씩 편안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내일 미팅도 그가 옆에 있다면 어떻게든 잘 풀릴 거라는 믿음이 서하의 무거운 눈꺼풀 위로 조용히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