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1호에 사람이 들어왔다
31화. 생활을 조율하는 방식

31화. 생활을 조율하는 방식

오피스텔 1501호의 거실을 숨 막히게 채우고 있던 종이 박스와 부자재, 그리고 어지럽게 널려 있던 포장용 테이프들은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서하는 H사와의 콜라보레이션 기획전이 이른바 ‘초대박’을 친 이후, 더 이상 15층 오피스텔 거실에서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없는 규모의 브랜드를 이끌게 되었다. 밀려드는 주문량과 입점 제안서들을 혼자서 쳐내다간 본업인 디자인에 쏟을 시간마저 사라질 위기였다.

결국 서하는 결단을 내렸다. 오피스텔에서 두 블록 떨어진, 층고가 높고 채광이 좋은 상가 건물 2층에 번듯한 사무실 겸 작업실을 얻었다.

혼자서 끙끙대던 CS와 발주, 회계 등 꼼꼼한 실무를 전담해 줄 ‘최 대리’와, 서하의 손을 맞춰 세공의 기본기를 보조해 줄 싹싹한 막내 직원 ‘지은 씨’도 정식으로 채용했다. 언제나 ‘1인 공방 사장님’이라 불리던 그녀는, 이제 두 명의 직원을 책임지고 시스템을 굴려야 하는 어엿한 주얼리 브랜드의 진짜 ‘대표’가 되어 있었다.

서하의 일상이 그렇게 새로운 공간에서 체계를 잡고 안정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반면, 맞은편 1502호의 불은 연일 꺼질 줄을 몰랐다.

밤 11시 40분.

사무실에서 퇴근해 씻고 편안한 홈웨어로 갈아입은 서하는, 자신의 집이 아닌 1502호의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렀다.

‘삐리릭- 철컥.’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어둡고 탁한 공기와 함께 훅 끼쳐오는 짙은 피로의 냄새에 서하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거실 한가운데 위치한 작업대 앞. 성진은 모니터 화면에 잡아먹힐 듯 구부정하게 목을 뺀 채,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하고 있었다. 모니터 앞에는 다 마신 테이크아웃 커피 컵 세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스피커에서는 똑같은 10초짜리 베이스 루프 구간이 강박적으로 무한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성진 씨.”

서하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부르자, 성진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돌렸다.

“……왔습니까.”

“커피를 하루에 몇 잔이나 마신 거예요. 오늘도 소속사에서 튕겼어요?”

서하가 책상 위를 치우며 묻자, 성진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게 기대며 쓰게 웃었다.

“진짜, 미치겠네요. 애초에 지들이 내 데모 듣고, 내 스타일로 앨범 전체 프로듀싱해달라고 찾아와 놓고는… 막상 마감 코앞으로 다가오니까 말이 싹 바뀝니다.”

성진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잠겨 있었다. 며칠째 제대로 된 수면을 취하지 못한 탓에 턱 밑으로는 까슬하게 수염이 올라와 있었고, 날카로운 예민함이 넓은 어깨 위로 겹겹이 쌓여 있었다.

“이번에 데뷔하는 신인 그룹이라, 대중성이 무조건 있어야 한답니다. 내보고 템포 좀 더 올리고 베이스 질감을 가볍게 빼라는데… 그렇게 팝한 소스들 다 얹을 거면 나를 왜 썼답니까. 공장형 트랙 메이커 쓰면 될걸.”

성진의 불만은 억지가 아니었다. 그는 이번 신인 그룹의 데뷔 앨범 메인 프로듀서로 섭외되었고, 그의 이름값과 고유의 색깔을 믿고 맡기겠다던 소속사는 데뷔일이 다가올수록 불안감에 휩싸여 끝없이 ‘대중적인 안전장치’를 요구하고 있었다. 프로듀서로서의 자존심과 기획사의 상업적 요구 사이에서, 성진은 며칠째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는 중이었다.

예전 서하가 H사 콜라보 준비를 하며 극도로 예민해져 있던 시절, 불 꺼진 거실에 웅크려 있던 그녀의 모습 딱 그대로였다.

서하는 억지로 그를 일으켜 세우거나 마우스를 빼앗지 않았다. 예전의 성진이었다면 ‘내가 다 정리해 줄 테니 일단 쉬라’며 무식하게 팔을 걷어붙였겠지만, 서하는 남의 작업의 무게를, 그것도 수년의 짬을 가진 프로듀서의 고뇌를 섣불리 대신 짊어질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창작자였다.

대신 서하는 조용히 주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고, 찬장을 뒤져 성진이 평소에 잘 마시지 않는 캐모마일 티백을 찾아냈다. 따뜻하게 우려낸 차를 머그잔에 담아온 서하는, 그것을 성진의 키보드 옆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목은 왜 이렇게 빼고 합니까. 거북목 됩니다, 박성진 씨.”

서하가 예전 성진이 자신에게 했던 잔소리를 장난스레 똑같이 흉내 내며, 그의 등 뒤로 다가갔다. 그리고 뻣뻣하게 굳은 그의 어깨와 뒷목을 두 손으로 꾹꾹 주물러주기 시작했다.

“아….”

성진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루 종일 바짝 곤두서 있던 신경과 근육이, 서하의 체온이 닿자 그제야 조금씩 느슨해지며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성진은 눈을 감은 채 뒤로 고개를 젖혀 서하의 배에 머리를 기댔다.

“차 좀 마셔요. 커피 너무 많이 마셔서 머리 아플 땐 따뜻한 차 마셔야 해요.”

“……고맙습니다.”

성진이 서하가 내어준 머그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넘겼다. 따뜻한 향기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요동치던 속이 조금 가라앉았다. 성진은 한숨을 돌린 뒤, 마우스를 딸깍거려 프로그램 창에 두 개의 트랙을 띄웠다.

“서하 씨.”

“네.”

“1번이 원래 내가 짰던 편곡이고, 2번이 오늘 소속사 피드백 받고 하루 종일 팝하게 수정해 본 버전입니다. 한 번 들어볼랍니까.”

서하는 말없이 성진이 씌워주는 헤드폰을 썼다.

음악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서하의 귀에도 두 곡의 차이는 명확하게 느껴졌다. 1번 트랙은 묵직하고 서늘한 베이스가 중심을 잡고 흘러가는, 조금은 어둡지만 묘한 여운을 남기는 곡이었다. 딱 박성진의 짙은 눈동자나 그가 뿌리는 우디 향수를 닮은 소리였다. 반면 2번 트랙은 훨씬 템포가 가볍고 트렌디한 효과음들이 얹혀 있어 귀에 쏙쏙 박혔지만, 어딘가 모르게 기성품처럼 가볍게 날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두 곡이 끝난 뒤, 서하가 헤드폰을 벗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저는 무조건 1번이요.”

1초의 망설임도 없는 서하의 대답에 성진이 쓴웃음을 지었다.

“……1번요? 소속사에서 대중성 없다고, 차트 진입 힘들 것 같다고 깐 건데요.”

“대중적이고 귀에 잘 꽂히는 건 2번일지 몰라도, 1번이 훨씬 성진 씨가 치열하게 고민하고 깎아낸 소리 같거든요. 그 기획사에서 처음 성진 씨를 메인으로 불렀던 이유도 1번 같은 색깔 때문 아니에요? 2번은… 솔직히 길거리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흔한 아이돌 노래 같아요.”

서하의 대답은 과거 H사 미팅 전날 밤, 성진이 서하에게 ‘새벽 숲’ 디자인을 대중적으로 타협하자고 제안했을 때 서하가 느꼈던 상실감의 포인트와 정확히 맞닿아 있었다.

“성진 씨가 예전에 나한테 그랬잖아요.”

서하가 성진의 어깨를 주무르던 손을 멈추고, 의자 팔걸이를 짚으며 그의 눈높이에 맞춰 몸을 숙였다.

“브랜드가 망가지는 건 못 팔아서가 아니라, 돈 몇 푼 더 벌자고 내가 지키고 싶었던 디테일을 버릴 때라고. 앨범도 똑같지 않을까요? 결국 메인 프로듀서인 성진 씨가 조율해야 할 문제지만… 저는 그쪽에서 원했던 성진 씨의 원래 색깔을 끝까지 설득해 보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1번 소리가 훨씬 단단하고 멋있거든요.”

성진의 짙은 눈동자가 잔잔하게 일렁였다.

전문적인 데이터 분석이나 차트 성적을 논하는 해결책이 아니었다. 그저 창작자로서 그가 겪고 있는 고뇌를 온전히 인정해 주고, 남들의 평가가 어떻든 그의 원래 색깔을 맹목적으로 지지해 주는 단단한 믿음.

그것은 과거 성진이 서하의 디자인을 인정하고 지지해주었던 방식 그대로였다. 자신이 서하에게 주었던 구원이, 이제는 거울처럼 반사되어 지쳐있던 성진의 마음을 단단하게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성진은 팔걸이를 짚고 있는 서하의 손을 자신의 큰 손으로 겹쳐 쥐고는, 그 작은 손등에 자신의 뺨을 가볍게 부비적거렸다.

“……맞습니다. 애초에 내 스타일 보고 찾아왔으면 내 방식을 믿고 가야지. 여기서 타협하면 이도 저도 안 되겠네요.”

“그쵸? 내일 소속사 사람들한테 기싸움 지지 마요. 내일 미팅 갈 때 내가 특별히 행운의 부적처럼 뽀뽀 세 번 해줄 테니까. 알았죠?”

서하의 장난스러운 위로에 성진의 입가에 며칠 만에 깊고 편안한 미소가 번졌다.

“예. 대표님 말씀 새겨듣겠습니다.”

서하는 그의 세계를 억지로 통제하려 들거나 정답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지치지 않게 어깨를 주물러주고, 따뜻한 차를 내어주며, 그가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조용히 곁을 지킬 뿐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의 짐을 덜어주고 지탱하는 방식은, 예전의 맹목적인 희생을 넘어 훨씬 깊고 성숙해져 있었다.

며칠 뒤, 쾌청한 가을 오후.

모처럼 일찍 믹싱을 마친 성진이 근처 카페에서 산 커피 캐리어를 세 개나 들고 서하의 사무실을 찾았다. 소속사와의 지난한 미팅 끝에 결국 1번 트랙 원안을 바탕으로 약간의 편곡만 수정하는 선에서 타협을 이끌어내고 한결 후련해진 얼굴이었다.

상가 건물 2층으로 올라가 투명한 유리문 너머를 들여다보던 성진의 걸음이 멈췄다.

사무실 안쪽의 커다란 회의 테이블. 서하가 최 대리, 지은 씨와 함께 도면과 스와치(소재 샘플)들을 잔뜩 펼쳐놓고 다음 시즌 디자인 회의를 주도하고 있었다.

“최 대리님, 이 부자재는 우리가 생각한 마진율에 비해 단가가 너무 높아요. A업체 쪽에 비슷한 질감의 대체품 있는지 오늘 내로 컨택 좀 해주세요. 그리고 지은 씨, 이거 체인 연결할 때 작업 동선 꼬이지 않게 이쪽 끝부분부터 샘플 먼저 잡아주시고요.”

직원들에게 명확하게 업무를 지시하고, 리스크를 분석하며 롤을 배분하는 서하의 모습은, 예전 1501호 좁은 거실에서 박스 더미에 파묻혀 혼자 끙끙대며 밤을 새우던 시절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녀는 더 이상 성진의 엑셀 표나 일정 정리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았다. 스스로 시스템을 굴릴 줄 아는, 완벽하게 통제력을 갖춘 진짜 ‘대표’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성진은 문을 열고 들어가는 대신, 그 단단하고 멋진 대표님의 모습을 방해하지 않으려 밖에서 가만히 미소 지은 채 기다렸다. 창작에 매달리느라 위태로웠던 그녀가 이렇게 단단하게 자립한 모습을 보는 것이, 성진에게는 그 어떤 곡의 완성보다도 벅찬 감동이었다.

잠시 후 회의가 끝나고 유리문 밖의 성진을 발견한 서하가 쪼르르 달려 나왔다.

“언제 왔어요! 들어오지.”

“우리 한 대표님 카리스마에 기가 눌려서 감히 못 들어가고 밖에서 대기 탔습니다.”

성진이 능청스럽게 대답하며 커피 캐리어를 건네고는, 서하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직원들에게 커피를 돌리며 싹싹하게 인사를 나눈 성진은, 서하의 개인 사무실 안쪽에 마련된 작은 소파로 안내받았다. 큰 창문 너머로 나른하고 달콤한 오후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아, 이제야 살 것 같네.”

성진은 넥타이도 없는 편안한 셔츠 차림이었지만, 며칠간 쌓인 피로가 몰려온 듯 소파에 앉자마자 길게 기지개를 켰다. 그러더니 아주 자연스럽게 서하의 허벅지를 베고 눕듯이 길게 몸을 뉘었다.

서하는 좁은 소파에서 제 무릎을 내어준 채, 성진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곡은 잘 넘겼어요? 소속사에서 뭐라 안 하고?”

“대표님이 아침에 부적처럼 뽀뽀 세 번이나 해줬는데, 거기서 내가 어떻게 밀립니까. 애초에 내 스타일로 섭외한 거니 나 믿고 가자고 세게 나갔고, 결국 그쪽에서도 오케이 했습니다.”

“거 봐요. 내가 뭐랬어. 성진 씨 색깔 밀고 나가면 무조건 먹힌다니까.”

서하의 뿌듯한 칭찬에 성진이 눈을 감은 채 픽 웃었다.

“요새 서하 씨 손 타니까 자꾸 잠이 쏟아지네요. 사무실 소파가 왜 우리 집 침대보다 편하지.”

“며칠 동안 잠도 못 자고 엄청 피곤했잖아요. 이대로 십 분만 눈 붙여요. 직원들 못 들어오게 할 테니까.”

성진은 대답 대신 서하의 허리를 껴안으며 그녀의 배에 얼굴을 묻었다. 바쁘고 치열한 일상 속, 거창한 데이트가 아니어도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완벽한 충전이 되는 짧고 달콤한 휴식이었다.

계절이 바뀌어 찬 바람이 매섭게 불기 시작한 초겨울.

1502호 거실 테이블 위에는 두 대의 노트북과, 색깔 펜으로 일정이 빼곡하게 적힌 탁상 달력 두 개가 나란히 펼쳐져 있었다.

“나 다음 주 목요일부터 백화점 연말 홀리데이 2차 팝업 스토어 들어가요. 이번엔 물량이 저번의 두 배라서 짐이 엄청 많아요. 지은 씨랑 최 대리님이 같이 가주시기로 했는데도 빠듯할 것 같아요.”

“나는 금요일이 신인 그룹 앨범 마스터링 음원 넘기는 최종 마감입니다. 그날 저녁엔 발매 기념으로 레이블 사람들 다 모여서 전체 회의도 있고요.”

서하와 성진이 각자의 일정을 짚어가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두 사람 모두 각자의 본업에서 가장 숨 막히는 클라이맥스 일정이 하필이면 정확하게 겹쳐버린 것이다. 예전 같았다면 어땠을까.

과거의 서하였다면 성진의 바쁜 일정을 방해하지 않으려 팝업 짐이 많다는 사실을 눈치를 보며 꾹 숨겼을 것이다. 과거의 성진이었다면 자신이 금요일 마감으로 밤을 새워야 한다는 사실은 숨긴 채, 어떻게든 목요일 밤에 무리해서라도 서하의 팝업 짐을 다 옮겨주고 자신은 코피를 쏟으며 쓰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두 사람의 대화는 달랐다.

“일단 목요일 밤 폐점 시간에 맞춰서 팝업 매장에 집기 세팅하고, 새벽까지 2차 패킹 마무리해야 해요. 직원 두 명이 같이 가긴 하는데, 진열장이 너무 무거워서 남자 일손이 하나 필요하긴 하거든요.”

“목요일 저녁은 내가 자정까지 합주실에서 세션 녹음 마무리해야 됩니다. 거기서 빠질 수는 없고… 대신 금요일 새벽 1시에 합주 끝나자마자 백화점으로 넘어갈게요. 무거운 진열장 나르는 건 내가 할 테니까, 가벼운 박스들만 서하 씨 직원들이랑 먼저 하고 있으이소.”

성진이 달력의 목요일 밤 시간대에 동그라미를 치며 자신의 타협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서하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절대 안 돼요. 금요일이 성진 씨 최종 음원 마감인데, 새벽 1시에 넘어와서 힘쓰면 금요일 낮 회의에서 성진 씨 쓰러져요. 진열장 세팅은 어차피 백화점 측 용달 기사님한테 추가 수당 드리고 부탁하면 돼요. 박스 접는 것도 이제 우리 지은 씨가 저보다 더 빠르고요.”

“그래도 무식하게 몸 갈아 넣으면서 일할 텐데, 내가 옆에 없으면 마음이 안 쓰입니까.”

“마음은 쓰이지만, 성진 씨 앨범이 망가지는 건 더 싫거든요. 대신 일요일 아침에 백화점 팝업 물건 재고 채우러 픽업 갈 때, 성진 씨 차만 좀 빌려주실래요? 내 차에는 부피가 커서 다 안 들어갈 것 같아서.”

자신이 무리하게 짊어져야 할 부분은 단호하게 끊어내고, 꼭 필요한 실질적인 도움, 차량 대여만을 명확하게 요구하는 서하의 현실적인 제안. 성진은 그 단단해진 서하의 태도에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가능합니다. 차만 빌려주는 건 정 없고, 일요일 아침엔 내가 운전해서 같이 픽업 갈게요. 주말이니까 내 일정도 널널하거든요. 대신 일요일 저녁은 무조건 내가 쏘는 소고기 먹으러 가는 걸로 픽스하시죠. 이번엔 계산대 앞에서 실랑이 안 합니다.”

“콜. 제가 제일 비싼 꽃등심으로 다 먹어치울 거예요. 성진 씨 지갑 거덜 날 준비 하세요.”

탁, 탁.

마우스 클릭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복잡하게 얽혀있던 일정이 완벽하고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서로가 도울 수 있는 선과 각자 감당해야 할 선을 명확히 나누고, 그 안에서 빈틈을 메워주는 완벽한 합의였다.

무식하게 몸을 갈아 넣어 상대를 돕는 것이 사랑의 전부라 믿었던 시간들을 지나, 이제 두 사람은 서로의 생활을 망가뜨리지 않으면서도 가장 효율적으로 의지하는 법을 터득했다.

노트북 화면을 닫은 성진이 테이블 너머로 손을 뻗어 서하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진짜 다 컸네요, 우리 서하 씨. 혼자 끙끙대면서 숨기지도 않고, 안 되는 건 단호하게 쳐내고, 필요한 것만 딱딱 요구도 잘하고.”

“이게 다 훌륭한 메인 프로듀서님 밑에서 혹독하게 트레이닝을 받은 덕분이죠. 이제 요령이 좀 생겼거든요. 성진 씨가 안 무리하게 부려 먹는 방법.”

서하가 장난스럽게 성진의 손바닥에 뺨을 부비며 웃었다. 성진도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연애란 그저 눈을 맞추고 달콤한 사랑을 속삭이는 것만이 아니었다.

이렇게 서로의 캘린더를 겹쳐 펼쳐놓고, 치열한 삶의 무게와 피로를 조율하며 나란히 앞을 향해 걸어가는 것. 때로는 짐을 나누어 지고, 때로는 상대가 온전히 제 발로 서도록 뒤로 물러서 주는 것.

그것이 15층의 두 남녀가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찾아낸, 서로를 가장 건강하게 사랑하고 지키는 방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