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1호에 사람이 들어왔다
21화. 그늘의 크기

21화. 그늘의 크기

오후 2시, 대형 쇼핑 플랫폼 H사의 본사 1층 로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두 사람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긴장의 종류는 명백히 달랐다.

서하는 한 손에 소중하게 쥔 벨벳 트레이 박스 안의 샘플들이 혹여나 흔들릴까 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밤을 새워 깎아낸 디자인의 의도와 정체성을 어떻게 하면 저 차가운 대기업 MD들에게 온전히 전달할 수 있을지, 철저히 ‘창작자’로서의 긴장이었다.

반면, 성진의 시선은 태블릿 PC 화면에 띄워진 엑셀 창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옵션별 원가표와 바코드 넘버링, 그리고 협상 테이블에서 마지노선으로 던질 납기 일정표를 머릿속으로 빠르게 굴리며 시뮬레이션하고 있었다. 수많은 앨범 계약을 성사시켜 온 ‘메인 프로듀서’다운, 철저한 협상가로서의 긴장이었다.

“긴장 풀어요. 우리가 준비한 대안이면 저쪽도 무조건 오케이 할 겁니다.”

성진이 서하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다정하게 말했다. 서하가 작게 심호흡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내받은 회의실은 넓고 차가웠다. 투명한 통유리와 차가운 대리석 테이블 맞은편에는 H사의 기획전 담당 MD와 파트장이 앉아 있었다.

회의의 시작은 서하의 몫이었다.

서하는 조심스럽게 트레이를 열어 ‘새벽 숲’ 라인의 목걸이와 귀걸이 샘플들을 테이블 중앙에 내려놓았다. 회의실 조명 아래서 은은하게 빛나는 무광 은빛의 거친 질감은 화면으로 볼 때보다 훨씬 더 압도적이었다.

“보내주셨던 메일은 잘 읽었습니다. 하지만 이 거친 질감의 펜던트와 레이어드 체인은, 이번 ‘새벽 숲’ 컬렉션의 가장 핵심적인 무드입니다. 이걸 매끄럽게 다듬는다면 저희 브랜드와 협업하는 의미가 퇴색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서하의 차분하고 단단한 설명에 담당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실물을 직접 확인한 파트장 역시 디자인의 완성도와 오리지널리티에는 이견이 없는 듯 보였다. 회의의 분위기는 서하가 주도하는 듯했다.

하지만 질문의 방향이 디자인에서 ‘현실적인 조건’으로 넘어가는 순간, 회의실의 공기가 미세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디자인이 훌륭한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 레이어드 체인, 수작업이 들어가면 제작 시간이 꽤 걸릴 텐데요. 기획전 오픈 일인 15일까지 초기 물량 500개, 불량률 2% 미만으로 납품 가능하신가요?”

파트장의 날카로운 질문에 서하가 머릿속으로 공방의 작업 시간을 빠르게 계산하려던 찰나였다.

“가능합니다.”

서하의 옆에 앉아 있던 성진이 태블릿 화면을 테이블 중앙으로 돌려 보여주며, 막힘 없이 대답을 이어갔다.

“메인 시그니처인 원본 라인은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수량을 100개로 제한해서 병목현상을 잡을 겁니다. 나머지 400개는 H사에서 요청하신 대중적인 단일 체인 옵션으로 분산시킬 거고요. 여기 보시면 옵션별 SKU(재고 식별 코드)와 바코드 매칭 리스트, 그리고 물류 동선까지 모두 정리해 두었습니다.”

파트장과 MD의 눈빛이 일순간 번쩍였다.

1인 공방의 규모에서 기대하기 힘든, 완벽하게 체계화되고 계산된 비즈니스 시스템이었다.

“아,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희소성을 주면서 대중성까지 잡는다… 기획이 아주 좋네요. 단가는 어떻게 됩니까?”

“대중형 옵션은 공정 단가가 빠지는 만큼 납품가를 15% 낮출 수 있습니다. 마진율 표 확인해 보시죠.”

핑퐁 게임이 시작되었다.

질문과 대답이 오가는 속도가 무섭게 빨라졌다. 가격, 대량 생산 여부, 리드타임, 반품 기준. 철저히 상업적인 숫자와 일정표가 회의실을 지배했다. 성진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때로는 단호하게 방어하고 때로는 여유롭게 타협안을 던지며 협상을 이끌었다.

서하는 자신의 무릎 위에 놓인 두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맞은편 H사 담당자들의 시선은 온전히 성진만을 향해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서하에게 질문하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 서하는 테이블 위에 놓인 예쁜 ‘상품’의 제조자일 뿐, 이 복잡한 프로젝트를 굴리고 협상하는 실질적인 매니저는 명백히 성진이었다.

서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분명 자신의 이름이 걸린 브랜드이고, 자신이 밤을 새워 만든 작품을 논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자신은 어느새 이 회의 테이블에서 철저하게 배제된 관람객처럼 겉돌고 있었다.

“그럼, 성진 님이 정리해 주신 방향대로 진행하면 되겠습니다.”

파트장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계약서 폼을 넘겼다.

“대중형 버전의 디자인은 성진 님이 정리해 주신 판매 구조 기준으로 어느 쪽이 더 판매력이 있을까요?”

그 질문에 성진이 태블릿 화면을 넘기며 가장 무난한 옵션을 짚으려던 순간이었다.

“잠시만요.”

조용하던 서하의 목소리가 회의실의 빠른 공기를 단숨에 갈랐다.

성진이 놀라 고개를 돌렸고, 맞은편의 MD와 파트장 역시 서하를 쳐다보았다.

서하는 테이블 중앙에 놓여 있던 샘플 트레이를 자신의 앞으로 조금 당겼다.

“이 부분은 제가 말씀드릴게요.”

높낮이 없는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창작자이자 브랜드의 대표로서 결코 침범받고 싶지 않은 단단한 심지가 박혀 있었다. 서하는 성진의 태블릿에 띄워진 옵션 대신, 자신이 직접 스케치해 온 별도의 시안 노트를 테이블 위에 펼쳤다.

“대중성을 위해 체인을 하나로 줄이더라도, 메인 펜던트의 나뭇잎 잎맥 디테일은 살릴 겁니다. 그게 빠지면 프리미엄 라인과의 연결성 자체가 사라지니까요. 대신 크기를 줄여서 단가를 맞추는 방향으로 가겠습니다.”

서하가 길게 설명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분명하게 선을 긋고 주도권을 가져오자 회의실의 공기가 일순간 숙연해졌다.

파트장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서하의 시안을 진지하게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제야 서하는 제품 옆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제조자가 아니라, 다시 이 협업의 주체인 ‘대표 한서하’로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미팅은 완벽한 성공이었다.

원본 디자인의 오리지널리티는 지켜냈고, H사의 상업적인 조건도 충족시켰다.

하지만 회의실을 나서는 순간에도 서하의 마음 한편에는 가볍게 걷히지 않는 그늘이 남아 있었다. 방금 자신이 되찾은 목소리 옆으로, 성진의 완벽한 실무 능력이 만들어낸 커다란 그림자가 함께 서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