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 완벽한 타이밍
어느덧 태명 ‘찰떡이’는 ‘박이준’이라는 예쁜 이름을 얻어 생후 6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자정이 가까워진 시간, 안방 한쪽에 자리 잡은 원목 아기 침대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웅크리고 있었다.
“자기야. 이것 좀 와서 봐봐. 미쳤어, 진짜.”
숨죽인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주체할 수 없는 흥분과 감격이 가득 차 있었다. 성진은 아기 침대 난간에 이마를 댄 채, 곤히 잠든 이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오빠. 아까부터 도대체 뭘 보라는 거야?”
거실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고 들어온 서하가 어이없다는 듯 다가왔다.
“아니, 방금 이준이가 자면서 ‘푸르르’ 하고 입술을 떨었는데, 그게 진짜 기가 막히게 귀여워서 그래. 와… 내 새끼지만 어쩜 이렇게 잘생겼지? 코 오똑한 것 좀 봐라.”
“오빠, 벌써 40분째 침대 앞에 그러고 서 있는 거 알아? 애 얼굴 닳겠다, 진짜. 좀 냅둬.”
서하가 성진의 넓은 등을 찰싹 때리며 타박했다. 카리스마 넘치고 철두철미하던 메인 프로듀서 박성진은, 아들 앞에서는 형편없이 무장해제된 영락없는 ‘아들 바보’였다.
성진은 그제야 아쉬운 듯 침대에서 한 걸음 물러나며, 허리를 쭉 펴고 기지개를 켰다.
“아, 진짜 보고 있어도 보고 싶네. 박이준.”
“아주 그냥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시네요. 나보다 이준이가 더 좋지, 이제?”
서하가 짐짓 입술을 삐죽거리며 장난스레 토라진 척을 했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아기 침대만 뚫어져라 보던 성진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성진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와, 찻잔을 들고 있던 서하의 허리를 자신의 단단한 팔로 휙 감아안았다.
“무슨 섭섭한 소리를 그렇게 한답니까, 우리 절세미인.”
성진이 서하의 정수리와 이마에 연달아 쪽쪽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
“이준이는 당연히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만큼 예쁘지. 근데, 내 1순위는 예나 지금이나 무조건 한서하야. 이준이는 2순위고.”
“말이나 못 하면. 아까 퇴근하고 들어오자마자 나한테는 눈길도 안 주고 이준이한테 직진했으면서.”
“그건 당신이 아기 띠 매고 있어서 허리 아플까 봐 빨리 안아주려고 그런 거지.”
능청스럽고도 다정한 변명이었다. 성진은 서하의 손에서 찻잔을 빼앗아 탁자에 내려놓고는, 그녀의 손목과 뻐근한 어깨를 큰 손으로 부드럽게 주물러주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도 고생했어, 자기야.”
목덜미를 쓸어내리는 성진의 체온이 유난히 뜨겁게 느껴졌다. 서하가 노곤한 한숨을 내쉬며 성진의 넓은 가슴팍에 고개를 기대자, 성진의 팔이 서하의 허리를 더욱 꽉 끌어당겼다.
거실과 안방에 켜진 옅은 간접 조명, 새근새근 들려오는 아기의 규칙적인 숨소리.
고요하고 평화로운 침묵 속에서, 서하의 목덜미를 주무르던 성진의 손길이 아주 미세하게 느려졌다.
“서하야.”
늘 부르던 ‘자기야’ 대신, 낮고 짙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부르는 이름. 서하가 고개를 들어 성진을 올려다보았다. 성진의 짙은 눈동자가 아까 침대를 내려다보던 꿀 떨어지던 눈빛과는 완전히 다른, 위험하고 서늘한 온도를 띠고 있었다.
성진의 커다란 손이 서하의 뺨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서하의 아랫입술을 살짝 문지르자, 서하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애기 깨.”
서하가 모기만 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성진은 물러서지 않고 고개를 비스듬히 숙였다. 그의 코끝이 서하의 코끝을 스쳤다.
“안 깨. 방금 분유 넉넉하게 먹여놔서, 적어도 세 시간은 풀로 잘 거야.”
“오빠, 그래도…….”
“우리 부부끼리 시간 보낸 지도 너무 오래됐잖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진의 입술이 서하의 입술 위로 부드럽게 포개지곤 이내 숨이 턱 막힐 만큼 깊게 변해갔다. 성진의 한 손은 서하의 뒤통수를 감싸 쥐고, 다른 한 손은 그녀를 자신의 품 안으로 빈틈없이 밀착시켰다.
“흐읍….”
서하의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새어 나왔다. 달아오른 공기가 안방을 꽉 채웠다. 성진은 서하의 입술을 괴롭히던 것을 멈추고, 입술의 궤적을 턱선과 귓바퀴로 느릿하게 옮겨갔다.
“하아….”
성진의 거친 숨결이 서하의 귓가에 닿았다.
그가 서하의 허리와 무릎 뒤쪽으로 팔을 넣어, 그녀를 가뿐하게 안아 올리려던 찰나였다.
“으앙! 으아아앙—!!”
안방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6개월 된 아기의 우렁찬 울음소리였다.
“……!”
서하를 안아 올리려던 성진의 동작이 돌상처럼 뚝 멈췄다.
세 시간은 풀로 잘 거라던 성진의 확신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준이는 숨넘어가게 발버둥을 치며 맹렬하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서하가 화들짝 놀라며 성진의 품에서 황급히 빠져나왔다.
“이, 이준이 깼나 봐! 기저귀 갈아야 하나?”
달아올랐던 붉은 뺨을 수습할 새도 없이, 서하가 후다닥 아기 침대 쪽으로 달려갔다.
거실 쪽으로 서하를 안고 나가려던 자세 그대로 허공에 멈춰버린 성진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푹 숙였다.
“하아…….”
바닥이 꺼질 듯한, 깊고 무거운 한숨이었다.
방금 전까지 서하의 허리를 꽉 안고 있던 커다란 두 손이 갈 곳을 잃고 허공을 허우적대다, 이내 자신의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박이준… 진짜,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네….”
성진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아들 바보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결정적인 순간에 완벽한 훼방을 놓은 2순위에 대한 짙은 허탈함만이 가득했다.
침대에서 이준이를 달래던 서하가, 넋이 나간 채 서 있는 성진의 모습을 보곤 기어이 푸하학, 하고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오빠! 거기서 한숨만 쉬지 말고 빨리 와서 분유 좀 타 와! 우리 2순위님 배고프시대!”
“아, 예… 갑니다. 가요. 상전님 수발들러 가야지.”
성진이 넓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터덜터덜 주방으로 향했다. 투덜거리는 목소리였지만, 분유 포트의 물 온도를 맞추는 손길만큼은 세상 그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했다.
뜨겁게 달아오르려던 부부의 오붓한 시간은 완벽하게 날아갔지만, 칭얼거리는 아기와 분유병을 흔드는 남편이 있는 이 시끌벅적한 밤의 온도 역시, 서하에게는 더없이 따뜻하고 행복한 일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