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1501호에 사람이 들어왔다
1501호에 사람이 들어왔다
오피스텔 15층은 언제나 고요했다. 복도 끝에 마주 보고 있는 두 개의 문, 1501호와 1502호.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코너를 돌아야만 나오는 이 구석진 공간은 바깥의 소음마저 한 겹 걸러진 듯 늘 적막했다. 지난 반년 동안 1501호가 비어 있었던 탓에, 이 적막은 오롯이 1502호 거주자인 박성진의 몫이었다. 그는 그 고요가 퍽 마음에 들었다.
오전 10시. 건물 3층 헬스장에서 가볍게 러닝과 웨이트를 마친 성진이 수건으로 뒷목을 닦아내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품이 넉넉한 짙은 회색 후드티에 편안한 트레이닝팬츠 차림이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를 덮고 있었지만, 이목구비가 워낙 진한 탓에 피곤하거나 늘어져 보이지는 않았다.
'띵- 15층입니다.'
기계적인 안내음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성진은 늘 그렇듯 무심한 걸음으로 코너를 돌았다. 그리고 걸음을 멈췄다.
익숙해야 할 복도 풍경이 달라져 있었다. 늘 굳게 닫혀 있던 1501호의 회색 철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앞엔 푸른색 플라스틱 이삿짐 박스들과 종이 상자들이 위태롭게 탑을 쌓고 있었다. 복도 공기에는 오래된 먼지 냄새와 새 종이 상자 특유의 텁텁한 냄새가 뒤섞여 맴돌았다.
“아, 그건 저쪽 방으로 넣어주시면 돼요! 네, 조심하시고요.”
열린 문틈 사이로 맑고 높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성진은 짧게 눈썹 사이를 한 번 눌렀다. 누군가 새로 이사를 오는 모양이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주말 아침에.
그는 타인의 삶에 불필요한 호기심을 두는 편이 아니었다. 열린 문 안쪽을 기웃거리지도, 박스에 적힌 글씨를 읽어보려 애쓰지도 않았다. 성진은 그저 바닥에 끌리는 테이프 조각을 피해 자신의 집인 1502호 문 앞에 섰다. 도어락 버튼을 누르려던 찰나, 1501호 문 밖으로 빈 박스를 들고 나오던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쳤다.
헐렁한 하늘색 셔츠의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붙인 한서하였다. 대충 질끈 묶어 올린 머리칼이 이마 옆으로 흘러내려 있었고, 얼굴엔 이삿날 특유의 피곤함과 정신없음이 묻어났다. 하지만 성진과 눈이 마주친 순간, 서하의 눈이 살짝 커지더니 이내 작게 목례를 해왔다.
성진 역시 가볍게 고개를 까딱여 답하고는 미련 없이 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철컥-'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바깥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차단되었다. 성진은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두고 가장 먼저 화장실로 직행해 손을 씻었다. 거품을 내어 꼼꼼히 손을 씻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는 동작에는 오랜 시간 몸에 밴 규칙성이 있었다.
거실로 나온 그는 작업용 책상 위에 놓인 케이블 선들을 습관적으로 나란히 정렬했다. 헤드폰의 각도를 맞추고, 어제 마시다 만 생수병을 치웠다. 타인이 보기엔 책상 위가 기계와 악보들로 어수선해 보일지 몰라도, 성진의 시야 안에서는 모든 것이 정확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완벽한 질서였다.
바깥에서 간헐적으로 쿵, 하는 무거운 짐 내려놓는 소리가 벽을 타고 넘어왔다. 성진은 소파에 깊숙이 기대앉아 목 뒤를 큰 손으로 느릿하게 주물렀다. 당분간 15층의 적막은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실용적인 체념을 하며, 그는 노트북 화면을 열어 어제 작업하던 데모 트랙을 띄웠다.
두 시간쯤 지났을까. 헤드폰을 끼고 트랙의 베이스 라인을 수정하던 성진의 귓가에 미세한 진동음이 섞여 들었다. 초인종 소리였다.
성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헤드폰을 목으로 내렸다. 인터폰 화면에는 아까 복도에서 마주쳤던 서하가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작은 종이봉투를, 다른 한 손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이 든 캐리어를 든 채였다.
성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시원한 커피 향과 함께 서하가 산뜻하게 휘어지는 눈웃음으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오늘 앞집으로 이사 온 사람입니다. 주말인데 이사 소음 때문에 많이 시끄러우셨죠. 죄송합니다.”
“아. 예. 뭐… 괜찮습니다.”
성진은 짧게 대답하며 상대의 눈치를 살폈다. 억지로 꾸며낸 과장된 미안함이 아니라,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진심으로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거, 별건 아니고요. 근처에 맛있는 빵집이 있길래 커피랑 조금 사 왔어요. 불편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서하가 내미는 종이봉투와 커피 캐리어를 성진이 얼떨결에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하고 문을 닫으려던 찰나, 성진의 시야에 1501호 열린 문 너머로 커다란 양문형 냉장고를 밀어 넣고 있는 이삿짐센터 직원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장판 바닥이 찍히는 위태로운 소리가 성진의 귓가를 거슬리게 했다.
그는 문손잡이를 잡은 채로 무심코 입을 열었다.
“저기.”
“네?”
서하가 돌아보았다. 성진은 턱끝으로 1501호 안쪽을 가리켰다.
“저거 저렇게 그냥 밀면 바닥 다 긁힙니다. 나중에 방 뺄 때 다 물어내야 돼요.”
“아….”
“냉장고나 세탁기 넣기 전에, 기사님들한테 밑에 박스 쪼가리라도 하나 깔고 밀어달라 하이소.”

자신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생활형 잔소리였다. 편해지거나 무언가를 짚어줄 때면 어김없이 묻어나오는 부산 억양이 끝을 맺었다. 아차, 오지랖이었나. 초면에 너무 딱딱하게 굴었나 싶어 성진이 짧게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비켜냈다.
하지만 서하의 반응은 성진의 예상과 달랐다. 불쾌해하거나 무안해하는 기색 없이, 서하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바로 손뼉을 작게 쳤다.
“아, 맞다. 바닥! 전혀 생각 못 하고 있었어요. 알려주셔서 진짜 감사합니다!”
서하는 성진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지체 없이 1501호 안쪽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기사님! 잠시만요, 거기 바닥에 이 패드 먼저 깔고 밀어주실 수 있을까요? 네, 제가 할게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안으로 쏙 들어가 버리는 서하의 뒷모습을 보며, 성진은 잠시 닫히다 만 현관문 틈에 서 있었다. 생각보다 수용이 빠른 사람이네. 그는 입꼬리를 미세하게 올렸다가 이내 문을 닫았다.
식탁 위에 서하가 준 종이봉투와 커피를 올려둔 성진은 다시 책상 앞 의자에 앉았다. 무례하지 않은, 선을 아는 이웃. 첫인상으로는 나쁘지 않았다.
밤 11시.
하루 종일 열려 있던 1501호의 문이 닫히고, 복도에는 다시 익숙한 정적이 찾아들었다.
작업을 마무리한 성진은 분리수거를 위해 현관을 나섰다. 한 손에는 납작하게 접은 택배 상자들을, 다른 한 손에는 플라스틱이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와 함께 코너를 돌려던 성진의 걸음이 또다시 멈췄다.
“아우, 진짜. 왜 안 들어가, 이거.”
1501호 앞. 서하가 사람 키만 한 길쭉한 거울 상자와 씨름을 하고 있었다. 상자가 묘하게 현관문 틈에 끼어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서하는 끙끙대며 상자를 밀어 넣으려 했지만, 무거운 데다 각도가 틀어져 있어 오히려 문틀에 더 꽉 끼어버린 모양새였다.
손목에는 얇은 은팔찌가 찰랑거렸고, 묶었던 머리는 다 풀려 부스스했다. 하루 종일 이삿짐을 정리하느라 진이 다 빠진 게 분명했다.
성진은 가만히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냥 모른 척 지나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냥 못 지나치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명백한 곤란함을 외면하는 것은 그의 생활 양식에 위배되는 일이었다.
성진은 들고 있던 재활용 쓰레기봉투를 복도 벽면에 잠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소리 없이 다가가 1501호의 철문을 큰 손으로 턱, 잡았다.
“어, 어?”
갑자기 나타난 커다란 그림자에 서하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성진은 서하의 당황한 얼굴을 빤히 보지 않고, 오직 문틀에 낀 상자의 각도만을 정확하게 살폈다.
“그거 힘으로 밀면 문틀 다 상합니다.”
“아, 그게… 갑자기 끼어서요.”
“손 빼보이소.”
성진은 낮고 덤덤한 목소리로 말하며 서하가 쥐고 있던 상자 모서리 쪽으로 손을 뻗었다. 서하가 얼떨결에 한 발짝 뒤로 물러나자, 성진은 한 손으로는 무거운 현관문을 지탱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거울 상자의 하단을 잡아 살짝 들어 올렸다.
상자가 문틀에서 살짝 떴을 때, 그는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45도 각도로 상자를 비틀어 안으로 부드럽게 밀어 넣었다.
‘스윽-’
하루 종일 서하를 괴롭히던 거울 상자가 거짓말처럼 현관 안쪽으로 매끄럽게 미끄러져 들어갔다.
성진은 문이 닫히지 않게 한쪽 발로 지탱한 채, 손을 털며 뒤로 물러섰다.
“됐다. 이제 밀고 들어가면 됩니다.”
“와….”
서하가 작게 탄성을 내뱉으며 성진과 상자를 번갈아 보았다.
“감사합니다. 저 진짜 이거 때문에 삼십 분째 땀 빼고 있었거든요.”
“별거 아입니더.”
성진이 다시 바닥에 내려두었던 쓰레기봉투를 집어 들며 몸을 돌리려 했다. 서하가 다급하게 그를 불러 세웠다.
“저, 앞집 분 맞으시죠?”
성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해요, 아침에도 그렇고 지금도. 저는 한서하라고 합니다.”
서하. 한서하.
성진은 속으로 그 이름을 한 번 발음해 보았다. 그리고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서하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목 뒤를 긁적였다.
“박성진입니다. 1502호.”
“네, 성진 씨. 늦은 시간에 죄송했어요. 조심히 다녀오세요.”
서하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꾸미지 않은 민낯이었지만, 그 웃음만큼은 이 복도의 어두운 조명을 다 빨아들인 것처럼 맑았다. 성진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1501호의 도어락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분리수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성진은 식탁 의자에 기대앉았다. 아침에 서하가 주고 간 커피 컵은 씻어서 건조대에 엎어두었고, 빵이 들어있던 종이봉투는 납작하게 접어두었다.
성진은 종이봉투 표면에 작게 붙어 있던 노란색 포스트잇을 떼어냈다.
반듯하고 정갈한 글씨체였다. 성진은 포스트잇을 손가락 끝으로 문질러 보았다. 고마움을 그저 말로 퉁치지 않고, 어떻게든 자신의 방식으로 돌려놓으려 하는 사람. 아침의 빵도, 바닥 패드에 대한 즉각적인 피드백도, 방금 전 현관에서의 분명한 인사도 모두 같은 결을 가리키고 있었다.
“예의 있네.”
성진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헛기침을 한 번 했다. 그리고 그 작은 포스트잇을 버리지 않고, 책상 위 영수증이 모여 있는 작은 트레이 한구석에 무심하게 붙여두었다.
같은 시각, 1501호.
서하는 현관에 무사히 안착한 거울 상자를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짐 정리는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거실 한편에 마련해둔 작업대만큼은 유난히 반듯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포장재, 리본, 펜치, 그리고 반짝이는 은색 부자재들이 종류별로 완벽하게 분류되어 통 안에 담겨 있었다.
서하는 뻐근한 허리를 두드리며 현관문 쪽을 바라보았다. 1502호. 박성진.
큰 키에 무뚝뚝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아침에 툭 던진 바닥 패드 조언이나 방금 거울을 밀어 넣어주던 손길은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고 정확했다. 무엇보다 자신을 도와주면서도 생색내거나 과하게 참견하지 않고 깔끔하게 물러나는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다행이다. 좋은 이웃 같아서.”
서하는 작게 미소 지으며 헐렁한 셔츠 소매를 다시 걷어붙였다. 피곤했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은 이삿날의 밤이었다.
복도의 조명이 일정 시간이 지나 '탁' 소리를 내며 꺼졌다. 하지만 비어 있던 15층의 절반, 늘 어둠에 잠겨있던 1501호에는 이제 사람 사는 온기가 은은하게 배어났다. 1502호와 마주본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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