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1호에 사람이 들어왔다
5화. 평소처럼, 아닌 것처럼

5화. 평소처럼, 아닌 것처럼

1501호에 사람이 들어왔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자각은 때로 폭우처럼 갑작스럽게 쏟아지지만, 그것을 일상 속에 감추는 일은 가랑비에 옷 젖듯 지난하고 조심스러운 과정이다.

감정을 자각한 그날 밤 이후, 성진의 세계는 미세하게 축이 틀어졌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는 여전히 아침 10시에 3층 헬스장으로 향했고, 손을 꼼꼼히 씻었으며, 작업대 위 케이블 선의 각도를 강박적으로 맞췄다. 하지만 그 모든 고요한 루틴의 사이사이에, 불쑥불쑥 한서하라는 변수가 끼어들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가 15층에 멈춰 설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1501호의 닫힌 문을 힐끗거리게 되는 시선.

늦게 귀가하는 밤이면 오피스텔 건물 앞에 우두커니 서서 고개를 꺾어 15층 창문의 불빛부터 확인하고는, 속으로 '미친놈인가' 하며 헛웃음을 짓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그 우디하고 서늘한 향을 복도에서 찾고 있는 후각까지.

성진은 자신이 단단히 고장 났음을 인정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성급하게 거리를 좁히거나 티를 내는 부류의 남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좋아할수록, 상대가 부담을 느끼지 않게 평소보다 더 견고한 선을 긋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나는 쪽에 가까웠다.

며칠 뒤, 늦은 오후.

작업실에서 스케치 중이던 성진은 창문을 거칠게 때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일기예보에 없던 갑작스러운 소나기였다. 꽤 굵은 빗줄기가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쏟아지고 있었다.

성진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모니터 우측 하단의 시계로 향했다. 오후 5시 30분. 서하가 공방에서 퇴근해 오피스텔로 돌아올 즈음이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신발장 한구석에 꽂혀 있던 크고 튼튼한 검은색 장우산 하나를 빼 들었다. 굳이 쏟아지는 비를 뚫고 십여 분 거리에 있는 지하철역 앞 편의점까지 갈 참이었다. 오피스텔 건물 1층에도 편의점이 있었지만, '역 앞 편의점에만 파는 탄산수가 있다'는 스스로도 어이없는 핑계를 기꺼이 덧대면서.

성진은 우산을 쓰고 걸어 지하철역 3번 출구 앞 편의점에 도착했다.

딸랑, 하는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비닐우산도 다 나갔어요?"

"네, 갑자기 비가 쏟아져서 퇴근길 손님들이 다 사 갔네요."

카운터 앞에서 가방을 끌어안은 채 텅 빈 우산꽂이를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서하였다. 역에서 내리자마자 쏟아지는 폭우에 코앞 편의점으로 피신했는데, 하필 우산마저 동이 나 오도 가도 못하게 된 모양이었다.

성진은 괜히 냉장고에서 탄산수 한 병을 꺼내 계산대에 올려놓으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우산 없습니까.”

익숙한 저음에 서하가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어? 성진 씨. 네, 하나 사려고 들어왔는데 다 나갔다네요. 비 그칠 때까지 좀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성진 씨는 여기까지 웬일이세요?”

“건물 1층에 탄산수가 떨어져서요. 같이 씁시다.”

성진이 계산을 마친 병을 주머니에 찔러넣으며 무심히 말했다.

“네? 아, 아니에요. 저 진짜 조금만 기다리면 될 것 같은데, 굳이 성진 씨 우산 좁게….”

“어차피 여기서 오피스텔까지 가는 길 똑같은데 언제까지 기다립니까. 퍼뜩 오이소.”

거절할 틈을 주지 않는 단호하고 실용적인 제안이었다. 성진은 편의점 문을 열고 나가, 커다란 검은색 장우산을 펼쳐 들었다. 빗소리가 투둑, 하고 우산 위로 무겁게 떨어져 내렸다.

서하가 머쓱하게 웃으며 우산 아래로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자, 넉넉했던 우산의 공간이 꽉 차는 듯했다. 서하의 어깨가 성진의 팔 언저리에 스칠 듯 말 듯 가까웠다. 성진은 훅 끼쳐오는 서하 특유의 서늘한 나무 향에 숨을 아주 얕게 들이마시며, 우산대의 각도를 서하 쪽으로 미세하게, 그러나 확고하게 기울였다.

오피스텔 로비까지 걸어가는 십여 분의 길.

빗소리 외에는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침묵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다만 성진은 우산 손잡이를 쥔 오른손에 하얗게 핏대가 설 만큼 잔뜩 힘을 주고 있었다. 행여나 보폭이 어긋나 어깨가 닿기라도 할까 봐 온 신경이 오른쪽으로 쏠린 탓에 걸음걸이마저 평소보다 뻣뻣해졌다.

차가운 빗줄기가 우산 밖으로 벗어난 성진의 왼쪽 어깨를 사정없이 때렸지만, 그는 서하와 맞닿을 듯 가까운 오른쪽 어깨의 홧홧한 열기 때문에 오히려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거센 빗소리가 제 귓가를 때리는 불규칙한 심장 박동 소리를 가려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서하는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성진의 왼쪽 어깨가 우산 밖으로 벗어나 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성진 씨, 어깨 다 젖는데요? 우산 이쪽으로 좀 더 오게 하세요.”

“원래 이쪽 어깨가 좀 넓어서 그렇습니다. 신경 쓰지 마이소.”

말도 안 되는 핑계였다. 하지만 혹여나 우산을 가운데로 당겼다가 서하의 어깨와 맞닿기라도 하면 정말로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아, 성진은 끝내 무뚝뚝한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 단호함 앞에서 서하도 더 이상 토를 달 수 없었다.

로비에 도착해 우산을 접는 성진의 왼쪽 어깨와 팔뚝은 빗물에 흠뻑 젖어 짙은 색으로 변해 있었다. 서하가 미안한 얼굴로 가방에서 티슈를 꺼내려 하자, 성진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손으로 물기를 대충 털어냈다.

그저 우산을 같이 쓰고 십여 분 걸었을 뿐인데, 성진의 심장은 금방이라도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서하 쪽에서 오는 일상적인 다정함도 이제는 성진을 속수무책으로 흔들어놓고 있었다.

비가 왔던 다음 날 저녁.

성진이 외출에서 돌아왔을 때, 1502호 문고리에는 깔끔한 종이 쇼핑백이 하나 걸려 있었다.

쇼핑백 안에는 유명 브랜드의 레토르트 전복죽 두 팩과, 깔끔한 간편식 용기가 들어 있었다. 언제 퇴근할지, 언제 밥을 챙겨 먹을지 모르는 성진의 생활 패턴을 고려해 상하지 않고 보관하기 편한 것으로 고른 서하의 꼼꼼함이 돋보였다.

그리고 그 위에는 서하의 반듯한 글씨가 적힌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우산 구세주! 어제 어깨 다 젖으셨던데 감기 안 걸리셨나 몰라요. 언제 드실지 몰라 보관 편한 걸로 샀어요. 작업하실 때 밥 거르지 말고 꼭 데워 드세요! - 1501호

‘그날 무리하셨죠, 미안해요’ 같은 감정적이고 무거운 사과는 없었다. 그저 상대의 젖은 어깨를 살피고 ‘밥 거르지 말라’는, 가장 실용적이고 담백한 챙김이었다.

성진은 쇼핑백을 식탁 위에 올려두고 가만히 메모지를 내려다보았다. 서하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과장되게 감동을 소비하지 않고, 자신이 받은 배려를 상대의 생활에 꼭 필요한 온기로 갚아낼 줄 아는 사람.

“아.”

성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댔다. 입꼬리가 제멋대로 비죽비죽 올라가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빈집의 고요함 속에서 혼자 헤벌레 웃고 있던 성진은, 이내 스스로의 모습이 어이없어 실소를 터뜨렸다.

“와, 큰일 났네. 진짜.”

그는 포장재를 뜯어 전자레인지에 돌린 따뜻해진 전복죽을 식탁에 세팅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한서하라는 사람이 너무 예뻐서, 이 담백한 다정함이 통째로 벅차서, 정말 큰일이었다.

그날 밤.

성진은 1층 엘리베이터 홀에 서서 벽에 걸린 모니터만 멍하니 주시하고 있었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고 올라오다 우편물을 확인하려 1층에 잠깐 내렸을 때, 로비 유리문 너머로 멀리서 뛰어오는 서하의 실루엣을 보았기 때문이다. 늦은 시간까지 공방에 있다가 막 퇴근하는 길인 듯했다.

성진은 막 1층에 도착해 열린 엘리베이터를 그냥 위로 올려보내고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로비 쪽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굳이 서둘러 올라갈 필요가 없었다. 발소리에 맞춰 자연스럽게 버튼을 누르면 될 일이었고, 혹여나 엘리베이터가 늦게 오더라도 로비에서 그녀와 함께 기다리며 몇 초라도 더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타다닥-’

가벼운 발소리와 함께 로비 코너를 돌아 서하가 엘리베이터 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헉, 헉. 비 오기 전에 겨우 도착했네… 어? 성진 씨?”

숨을 몰아쉬던 서하가 성진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성진은 아무렇지 않은 척, 방금 도착한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엘리베이터의 위쪽 버튼을 눌렀다.

“야근했습니까.”

“네, 내일 나갈 물량이 좀 있어서요. 이제 들어가시나봐요?”

“네, 방금 왔습니다. 저도.”

거짓말이었다. 성진은 로비를 주시하며 그녀가 뛰어오기만을 한참이나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기다림의 시간을 굳이 생색내어 제 마음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두 사람이 나란히 오르자 문이 부드럽게 닫혔다. 좁은 밀실 안, 두 사람 사이에 옅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성진의 시선은 정면의 닫힌 문을 향해 있었지만, 그의 모든 감각은 옆에 선 서하를 향해 곤두서 있었다. 서하의 어깨가 숨을 고르느라 작게 오르내리는 리듬, 그녀의 옷깃에서 묻어나는 서늘한 나무 향, 피곤한지 한쪽 발로 짝다리를 짚으며 내쉬는 미세한 한숨 소리까지. 그 모든 것들이 성진의 신경을 팽팽하게 당겼다.

‘오늘 많이 피곤합니까.’

‘가방 내가 들까요.’

‘저녁은 먹고 일한 겁니까.’

혀끝까지 맴도는 질문 수십 개를, 성진은 단단히 닫힌 입술 너머로 꾹꾹 눌러 삼켰다. 지금 자신이 여기서 한 발짝 더 다가가면, 그건 이웃의 친절을 넘어선 명백한 사심의 영역이었다. 아직은 안 된다. 서하가 부담을 느낄 수도 있었다.

“아, 맞다.”

그때, 침묵을 깨고 서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성진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때 팝업 날 다친 손등은 좀 어때요? 밴드 뗐네요.”

성진의 몸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스치듯 지나는 일상 속에서도, 그녀는 성진의 손등에 붙어 있던 작은 밴드의 유무까지 기억하고 확인하고 있었다.

성진은 자신도 모르게 상처가 아물어가는 오른손을 반대쪽 손으로 살짝 덮어 가리며 시선을 비켰다.

“다 나았습니다. 별거 아니었어요.”

“다행이네요. 흉 안 지게 연고는 며칠 더 바르세요.”

“네.”

더 길게 말을 이으면 목소리가 떨리거나, 쓸데없는 말을 덧붙일 것 같아 성진은 말을 아꼈다.

‘띵- 15층입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은 어두운 복도로 걸어 나왔다. 각자의 문 앞에 선 두 사람. 도어락 덮개를 올리려던 서하가 고개를 돌려 가볍게 웃어 보였다.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요. 푹 쉬세요, 성진 씨.”

“네. 서하 씨도 조심히 들어가이소.”

현관문이 닫히고, 성진은 신발을 벗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현관 센서등 아래에 우두커니 섰다.

서하가 무심하게 던진 다정함 하나에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게 날뛰고 있었다. '서하 씨도'라고,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던 자신의 어색한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거렸다.

‘미치겠네.’

성진은 마른세수를 하며 거실로 들어와 소파에 몸을 던졌다. 바지 주머니에서 징징, 진동이 울렸다. 서하가 보낸 문자였다.

오늘 야근하느라 피곤했는데 로비에서 딱 마주치니까 반갑더라고요! 죽은 입맛에 맞으셨나 모르겠네요. 굿밤 되세요🌙

성진은 핸드폰 화면을 켠 채, 커서가 깜빡이는 입력창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엄지손가락이 자음과 모음 위를 배회했다.

죽 잘 먹었습니다.
입력 중

썼다 지우기를 수차례. 자신의 문장 하나가 너무 무겁거나, 너무 사적으로 들리지 않을까 고민하던 성진은 결국 가장 간결하고 단정한 문장 하나를 완성해 전송 버튼을 눌렀다.

죽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서하 씨도 푹 쉬세요.

답장을 보낸 성진은 핸드폰을 소파 위로 던져놓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좋아할수록 무심해지는 척, 다가갈수록 선명하게 선을 지키는 척. 평소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속은 이미 바닥까지 허물어진 어설프고 조심스러운 짝사랑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