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처음으로 심장이 튀는 날
1501호에 사람이 들어왔다
익숙함은 종종 사람의 눈을 가린다. 매일 보는 이웃, 편안한 후드티, 덤덤한 말투에 가려져 있던 어떤 실체가 전혀 다른 외피를 두르고 나타났을 때, 그 낙차는 예상치 못한 파동을 만들어낸다.
금요일 밤 10시.
서하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오피스텔 1층 로비에 들어섰다. 내일 나갈 주문 건을 맞추느라 하루 종일 작업대 앞에 앉아 있었더니 뒷목이 뻐근했다. 빨리 씻고 맥주나 한 캔 마시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녀는 습관적으로 엘리베이터의 위쪽 버튼을 눌렀다. 지하 주차장에서부터 올라오고 있는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천천히 바뀌었다. B2, B1, 그리고 1층.
‘띵-’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은색 문이 스르륵 열렸다. 서하는 무심코 발걸음을 떼려다,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우뚝 멈춰 섰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짙은 네이비색 쓰리피스 수트. 군더더기 없이 몸에 감기는 베스트와 재킷, 구김 하나 없이 날이 선 바지, 그리고 얇은 안경까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통제되고 정돈된, 서늘할 만큼 단정한 차림이었다.
“안 탑니까.”
남자가 낮고 익숙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서하의 두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
박성진이었다. 늘 품이 넉넉한 오버사이즈 맨투맨이나 와이드 팬츠를 입고, 젖은 머리를 대충 털어 말린 채 쓰레기를 버리러 나오던 1502호 남자.
“아, 네. 타, 타요.”
서하는 얼떨결에 말을 더듬으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
성진이 닫힘 버튼을 누르자 좁은 밀실 안에 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평소와 같은 서늘한 나무 향이 났지만, 오늘은 그 향이 빳빳한 정장 원단의 냄새와 섞여 훨씬 묵직하고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서하는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성진의 모습을 훔쳐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옷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공간을 채우는 존재감 자체가 달랐다. 다부진 체격은 맞춤옷처럼 떨어지는 수트 핏 안에서 오히려 더 크고 단단해 보였고, 앞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얼굴은 평소의 순한 인상보다 훨씬 이목구비가 진하고 날카로워 보였다.
“오늘도 늦으셨네요.”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성진이었다. 서하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아, 네. 작업이 좀 길어져서요. 성진 씨도… 오늘 되게 늦으셨네요.”
“외부에서 중요한 미팅이 좀 길어졌습니다.”
성진은 짧게 대답하며 한 손에 들고 있던 묵직한 가죽 브리프케이스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피곤한 듯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다른 한 손으로 얼굴에 얹혀 있던 은테 안경을 벗어 쥐었다.
스윽, 하고 안경다리가 접히는 금속 소리가 좁은 공간 안에서 유난히 크게 울렸다.
서하는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성진의 손끝에 고정했다. 안경을 벗어 든 성진은 눈썹 사이를 길고 굵은 손가락으로 꾹 누르더니, 이내 답답한 듯 재킷 안쪽의 베스트 단추를 하나 풀었다. 그리고 손을 올려 단정하게 매여 있던 넥타이 매듭을 잡아 느슨하게 끌어 내렸다.
‘툭, 투둑-’
셔츠의 가장 윗단추가 풀리며, 곧게 뻗은 목선과 쇄골 언저리가 살짝 드러났다.
숨 막힐 정도로 흐트러짐 없던 정장이, 성진의 커다란 손길 한 번에 아주 미세하게 허물어지는 그 찰나의 순간. 서하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지는 것을 느꼈다.
‘뭐지.’
심장이, 이상한 박자로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동생들 앞에서는 어쩔 줄 몰라 쩔쩔매고, 자신이 쏟은 가죽 스트랩들을 묵묵히 주워 담아주던 편안한 이웃 남자가 아니었다. 완전히 낯선, 너무나도 선명한 성인 남자의 물리적인 무게감이 서하를 압도하고 있었다.
“저기, 서하 씨.”
“네? 네!”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 성진이 고개를 돌려 서하를 불렀다. 서하가 필요 이상으로 군기를 바짝 든 채 대답하자, 성진이 의아한 듯 미간을 살짝 좁혔다.
“어디 안 좋습니까. 얼굴이 좀 붉은데.”
성진이 걱정스러운 듯 한 걸음 다가왔다. 큰 키 때문에 그의 그림자가 서하의 정수리 위로 훅 덮여왔다. 서하는 반사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손사래를 쳤다.
“아뇨! 괜찮아요. 그냥, 엘리베이터 안이 좀 더워서요.”
변명을 내뱉는 서하의 목소리가 꼴사납게 삑사리를 냈다. 성진은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이었지만, 더 캐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그때, 구원처럼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울렸다.
‘띵- 15층입니다.’
문이 열리자마자 서하는 거의 도망치듯 복도로 빠져나왔다. 평소 같았으면 “먼저 내리세요”라며 서로 순서를 양보했을 텐데, 지금은 성진의 곁에 1초라도 더 붙어 있다간 심장 소리를 들킬 것만 같았다.
“먼저 들어갈게요! 푹 쉬세요!”
서하는 성진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허공에 대고 다급하게 인사를 던지고는, 도어락을 부서져라 누르고 집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복도에 홀로 남겨진 성진은, 황당하다는 듯 닫힌 1501호의 문을 빤히 바라보다가 작게 목 뒤를 긁적였다.
‘철컥-’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서하는 그 자리에 주저앉듯 문에 등을 기댔다.
“미쳤나 봐, 진짜. 왜 이래.”
가방을 바닥에 내팽개친 서하가 양손으로 자신의 두 뺨을 감싸 쥐었다. 손바닥에 닿은 뺨이 터질 것처럼 뜨거웠다.
방금 전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잔상들이 머릿속에서 슬로모션처럼 재생되고 있었다.
네이비색 쓰리피스 수트.
단추를 푸르던 크고 굵은 손가락.
느슨해지던 넥타이.
안경을 벗고 눈을 내리깔던 피곤한 얼굴.
그리고 가까이 다가왔을 때 훅 끼치던, 서늘하고 묵직한 나무 향.
쿵, 쿵, 쿵.
귀에서 맥박 뛰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늘 편안하고 고마웠던 배려의 기억들이, 방금 마주한 시각적인 충격과 뒤섞여 완전히 다른 질감의 감정으로 변이하고 있었다.
서하는 비틀거리며 거실로 걸어 들어가 소파에 몸을 던졌다.
늘 반듯하게 치워져 있어야 직성이 풀리던 작업대가 엉망이었지만, 치울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쿠션을 끌어안고 그 위로 얼굴을 푹 파묻었다.
박성진. 1502호 남자.
자꾸만 손이 가고 챙겨주고 싶었던 그 사람의 일상적인 얼굴이, 처음으로 '남자'의 얼굴을 하고 서하의 세계로 강렬하게 침범해 들어왔다.
“어떡해, 나.”
쿠션에 파묻힌 서하의 입술 사이로 작고 어설픈 탄식이 새어 나왔다.
그날 밤, 서하는 침대에 누워서도 오랫동안 뒤척여야만 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써도, 자꾸만 눈앞에 그 은테 안경과 풀어진 넥타이가 어른거려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좋은 이웃의 언어가, 좋아하는 사람의 언어로 번역되기 시작하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