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1호에 사람이 들어왔다
외전 3. 핑계 없는 남편의 유난

외전 3. 핑계 없는 남편의 유난

결혼 2년 차, 가을.

두 사람은 1501호와 1502호를 떠나, 채광이 좋고 방이 세 개 딸린 새 아파트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두 사람의 짐이 완벽하게 섞인 온전한 ‘우리 집’이었다.

일요일 오후, 거실.

임신 7개월 차에 접어든 서하는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부어오른 종아리를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

“아, 다리 저려….”

그 작은 혼잣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거실 한편 작업대에서 헤드폰을 끼고 있던 성진이 귀신같이 고개를 돌렸다.

“자기야. 또 양말 안 신고 돌아다녔지.”

헤드폰을 목으로 휙 내린 성진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과거의 그 깍듯하던 ‘서하 씨’, ‘하이소’ 같은 정중한 말투는 온데간데없었다. 허물없이 편안해진 반말과 자연스러운 애칭 속에는 아내를 향한 익숙한 잔소리가 잔뜩 배어 있었다.

“아니, 보일러 틀어서 바닥 따뜻하단 말이야. 답답한 걸 어떡해.”

“수면 양말 신으라고 몇 번을 말해. 이리 내놔, 발.”

성진은 잔소리를 쏟아내면서도 아주 익숙하게 소파 아래 러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고는 서하의 부은 발목을 자신의 널찍한 무릎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고, 커다란 손으로 꾹꾹 마사지를 시작했다.

“아, 아파! 오빠, 좀 살살 해봐.”

“이게 제일 살살 누르는 거다. 넌 가만 보면 나보다 독해. 아프면 아프다고 찡얼거리기라도 하든가.”

“우리 여보가 이렇게 알아서 척척 주물러주는데, 내가 뭐 하러 입 아프게 말해요~?”

서하가 장난스럽게 말꼬리를 늘이며 성진의 정수리를 발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연애 시절, 혹여나 선을 넘을까 봐 손끝 하나 닿는 것도 조심스러워하던 박성진은 이제 없었다. 성진은 자신의 머리를 찌르는 서하의 발가락을 아프지 않게 꽉 쥐고는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말이나 못 하면. 아주 박성진 머리 꼭대기 위에 앉았지.”

“당연하죠. 내가 누군데.”

“그래. 위대하신 찰떡이 어머니시지.”

성진이 서하의 제법 볼록해진 배를 사랑스럽게 쓰다듬었다. 찰떡이는 두 사람을 찾아온 아이의 태명이었다. 성진의 큰 손이 배에 닿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뱃속에서 작게 ‘툭’ 하는 태동이 느껴졌다.

“어?”

“오, 방금 찼어. 자기야, 느꼈어?”

“어. 진짜 찼네. 와, 얘 자기 닮아서 힘 엄청 센데?”

늘 무뚝뚝하고 차분하던 성진의 두 눈이 토끼처럼 커졌다. 그는 아예 소파에 바짝 엎드려 서하의 배에 귀를 가져다 댔다.

“찰떡아. 아빠다. 한 번만 더 차 봐라.”

동생들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징그럽다며 기겁을 했을지도 모를, 영락없는 아들 바보의 모습이었다. 서하는 자신의 배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남편의 숱 많은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킥킥거렸다.

“아주 유난이야, 박성진.”

“내 아내랑 내 새끼한테 유난 좀 떨면 어때서. 너 임신하고부터 찰떡이가 내 지분 다 뺏어가는 것 같아서 아빠는 솔직히 좀 섭섭해요~”

“질투할 데가 없어서 애한테 질투를 하냐. 귀엽게 진짜.”

서하가 성진의 뺨을 두 손으로 쭈욱 잡아당기며 웃었다. 성진은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얼굴을 내어준 채, 서하의 입술에 가볍게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편안한 침묵 속에서 성진의 다리 마사지가 계속되었다. 부드럽고 일정한 손길에 서하가 노곤하게 눈을 감고 있을 때였다.

“여보옹.”

서하가 평소보다 한 톤 높은, 말꼬리를 길게 늘인 콧소리로 성진을 불렀다.

“응. 왜. 갑자기 왜 여봉야. 뭐 먹고 싶어?”

성진이 마사지를 하던 손을 멈추고 피식 웃으며 서하를 바라보았다. 필요할 때만 튀어나오는 아내의 뻔한 수작질을 이미 완벽하게 간파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는 새벽 2시라도 당장 차 키를 집어 들 기세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거. 옛날에 우리 오피스텔 밑에 있던 편의점에서 팔던 복숭아 아이스크림.”

“……아이스크림?”

“응. 오빠가 나한테 우산 빌려줬던 날. 그때 편의점 냉동고에 있던 거 봤단 말이야. 갑자기 그게 너무 당기네.”

서하의 뜬금없는 요구에 성진이 실소를 터뜨렸다.

“야, 한서하. 그게 언제 적 일인데. 그 아이스크림 벌써 단종됐을걸.”

“아, 몰라. 찰떡이가 그거 먹고 싶대. 아빠 보고 당장 구해오래.”

“찰떡이가 아니라 네가 먹고 싶은 거겠지.”

“아무튼. 구해 오십쇼, 우리 남편.”

서하가 얄밉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성진은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차면서도,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에 걸쳐둔 외투를 챙겨 입고 있었다.

“없으면 공장이라도 털어 올 테니까, 딴 거 주워 먹지 말고 얌전히 있어라.”

“네네~ 안전 운전 하시고요, 여봉님.”

“당연하죠, 사모님.”

현관으로 향하던 성진이 다시 소파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서하의 이마와 통통한 배에 차례로 깊게 입을 맞췄다.

“금방 올게. 문단속 잘하고 있어.”

‘철컥-’

현관문이 닫히고 집 안에는 다시 평화로운 고요가 내려앉았다.

서하는 푹신한 쿠션을 끌어안으며 소파에 편안하게 몸을 기댔다.

1501호와 1502호의 닫힌 철문 앞에서, 혹여나 마음을 들킬까 봐 밤새워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핑계를 찾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세상엔 닫힌 문도, 어설픈 핑계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먹고 싶은 것을 콧소리로 편하게 조를 수 있고, 그 속이 빤히 보이는 애교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외투를 걸치고 나서는 맹목적인 남편의 뒷모습만이 존재할 뿐.

“빨리 와라, 박성진.”

서하가 빈 거실을 향해 기분 좋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창밖으로는 눈부신 가을 햇살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고, 두 사람의 완벽하고 눈부신 계절은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가장 따뜻한 온도로 굴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