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1호에 사람이 들어왔다
32화. 마주 보는 두 개의 문 (완결)

32화. 마주 보는 두 개의 문 (완결)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 오피스텔 15층 복도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깊은 고요에 잠겨 있었다.

나란히 마주 보고 있는 두 개의 회색 철문.

굳게 닫힌 문 너머에는 각자의 치열하고도 고요한 세계가 굴러가고 있었다.

1501호.

거실 한가운데 놓인 작업대 앞에는 따뜻한 스탠드 조명이 켜져 있었다. 서하는 돋보기를 낀 채, 다음 시즌에 들어갈 새로운 디자인의 스케치에 몰두하고 있었다. 은선을 어떤 각도로 꼬아야 빛이 가장 예쁘게 반사될지 고민하며, 그녀의 펜 끝이 사각사각 종이 위를 스쳤다.

집중하던 서하가 잠시 펜을 내려놓고 기지개를 켰다. 뻐근한 목을 돌리던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굳게 닫힌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

방음이 완벽한 오피스텔이라 밖의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서하는 눈을 감으면 맞은편 1502호의 풍경을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지금쯤 성진은 모니터 앞에 구부정하게 앉아, 미간을 살짝 좁힌 채 건반을 두드리고 있을 것이다. 모니터 스피커에서는 그가 새로 스케치한 묵직하고 차분한 베이스라인이 흘러나오고 있을 테고, 그의 책상 한편에는 서하가 예전에 선물했던 부드러운 우디 향의 디퓨저가 놓여 있을 것이다.

서하는 닫힌 문 너머로 느껴지는 성진의 존재감만으로도, 입가에 편안한 미소가 번지는 것을 느꼈다.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하며 밤을 새우던 과거의 외로움은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와 같은 온도로 밤을 지새우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그 어떤 완벽한 휴식보다도 깊은 안도감을 주었다.

같은 시각, 1502호.

성진은 마우스에서 손을 떼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새 곡의 데모 버전을 멈춘 그는, 피곤한 눈을 비비며 책상 한구석에 놓인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1시 30분.

성진의 고개 역시 자연스럽게 현관문 쪽으로 돌아갔다.

어제 서하가 ‘이번 주말까지 꼭 끝내야 할 스케치가 있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지금쯤이면 돋보기를 끼고 거북목을 한 채 스케치북에 코를 박고 있을 것이 뻔했다.

‘안 말리면 또 밤새우겠네.’

성진은 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방으로 간 그는 따뜻하게 데운 우유 두 잔을 머그잔에 담았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현관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맞은편 1501호.

성진은 익숙하게 도어락의 덮개를 올렸다.

1, 5, 0, 1, 1, 5, 0, 2.

‘삐리릭- 철컥.’

문이 열리자마자 서하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올 줄 알았어요.”

작업대 의자에서 뒤를 돌아본 서하가 눈을 휘어 접으며 웃고 있었다. 성진이 양손에 머그잔을 든 채 거실로 걸어 들어왔다.

“알았으면서 왜 안 자고 있습니까.”

“성진 씨도 안 잤으면서. 방금까지 곡 작업하는 거 다 느껴졌거든요.”

“느껴지긴 무슨. 방음이 이렇게 잘 되는데.”

성진이 퉁명스럽게 대꾸하면서도, 따뜻한 우유가 담긴 머그잔을 서하의 손에 조심스럽게 쥐여주었다. 서하가 머그잔의 온기를 두 손으로 감싸 쥐며 성진의 허리춤에 얼굴을 기댔다.

“오늘 곡은 잘 써졌어요?”

“그럭저럭요. 서하 씨 스케치는 다 했습니까.”

“거의 다요. 내일 아침에 조금만 더 보면 될 것 같아요.”

성진은 서하의 굽은 등과 어깨를 커다란 손으로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거창한 이벤트나 특별한 대화는 없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하루를 보낸 뒤,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나누며 별일 아닌 서로의 하루를 묻는 이 평범한 시간이 두 사람에게는 가장 소중하고 완벽한 보상이었다.

“그만하고 이제 자이소. 불 끕니다.”

성진이 작업대 위의 스탠드 조명을 톡, 끄며 말했다.

서하가 자리에서 일어나 성진의 손을 깍지 껴 잡았다. 거실의 불이 꺼지고, 두 사람은 손을 잡은 채 나란히 안방으로 향했다.

1501호와 1502호.

물리적인 문은 여전히 복도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마주 서 있었지만, 두 사람의 삶을 가로막던 마음의 문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각자의 세계를 온전히 지켜내면서도 언제든 서로의 온기를 나눌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거리.

15층의 고요한 복도 위로, 서로를 마주 본 두 개의 문이 세상 그 어떤 곳보다 따뜻하고 다정하게 이어져 있었다.

-완-

외전 1. 박 피디님의 공방 알바

확장 이전한 서하의 주얼리 공방은, 매월 신제품 출시일이 다가오면 그야말로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오후 2시. 직원인 최 대리와 막내 지은이 산더미처럼 쌓인 종이 상자들을 접느라 진땀을 빼고 있을 때였다.

딸랑-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공방 문이 열리며, 커다란 아이스 아메리카노 네 잔이 담긴 캐리어를 든 성진이 들어섰다. 몸에 딱 떨어지는 검은색 셔츠에 검은색 슬랙스. 휴일을 맞아 서하의 얼굴이나 볼 겸 들른 차림새였지만, 특유의 크고 다부진 체격 덕분에 묘하게 서늘한 압도감이 풍겼다.

“어? 성진 씨! 오늘 쉬는 날 아니었어요?”

안쪽 작업실에서 은선을 꼬고 있던 서하가 화색을 띠며 고개를 들었다. 성진은 테이블에 커피를 내려놓으며, 바닥을 가득 메운 펼쳐진 종이 상자들과 쩔쩔매고 있는 직원들을 쓱 훑어보았다.

“오늘 발송일입니까.”

“네. 저녁 6시까지 기사님 오시기로 했는데, 제가 작업이 덜 끝나서 포장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네요. 큰일 났어요.”

서하가 앓는 소리를 내자, 성진이 말없이 셔츠 소매를 팔뚝 위로 단정하게 걷어 올렸다.

“앞치마 하나 주이소.”

“네? 아니에요, 성진 씨 모처럼 쉬는 날인데….”

“이거 6시까지 다 접으려면 둘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빨리 앞치마나 줘요.”

결국 서하는 웃음을 터뜨리며 자신의 여분 앞치마를 꺼내주었다. 베이지색 캔버스 소재의 공방 앞치마였는데, 성진의 어깨가 워낙 넓은 탓에 끈을 묶고 나니 묘하게 바리스타나 전문 공방 장인 같은 포스가 흘러넘쳤다.

성진은 망설임 없이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아, 막내 지은의 옆으로 종이 상자 더미를 쓱 끌어당겼다.

“와… 성진 님, 진짜 도와주시게요?”

지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성진은 대답 대신 상자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의 무서운 진가가 발휘되기 시작했다.

타닥, 탁. 스윽.

성진의 큰 손이 몇 번 움직이자 상자 하나가 완벽한 직각을 뽐내며 조립되었다.

음악의 파형 하나, 케이블 선 하나 삐뚤어지는 꼴을 못 보는 박성진의 극강의 꼼꼼함은 이 단순 반복 노동에서 엄청난 빛을 발했다. 그는 기계처럼 정확한 속도로 상자의 모서리 각을 칼같이 맞추어 접어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은 씨.”

“네, 넵!”

“이쪽 모서리 안으로 덜 접혀 들어갔습니다. 이렇게 대충 접으면 나중에 위로 쌓을 때 하중 못 버티고 무너져서 안에 든 상품 다 상해요. 다시 접으이소.”

성진의 낮고 단호한 지적에, 지은이 화들짝 놀라며 헐렁하게 접힌 상자를 꾹꾹 다시 눌러 접었다.

“그리고 최 대리님. 바코드 스티커 붙일 때 오른쪽으로 5밀리미터 정도 치우쳤네요. 이런 디테일 하나가 브랜드 이미지를 결정해요. 정중앙에 맞춰서 붙입시다.”

“아… 앗, 네! 시정하겠습니다!”

어느새 공방 거실은 서하의 통제에서 벗어나, 메인 프로듀서 박성진의 완벽한 박스 포장 공장으로 변모해 있었다. 두 직원은 마치 무서운 군대 조교 밑에서 훈련받는 훈련병들처럼 바짝 군기를 든 채 상자를 접어댔다.

그 광경을 안쪽에서 지켜보던 서하는 배를 잡고 끅끅거리며 웃음을 삼켜야 했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났을까.

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젊은 여성 손님 두 명이 공방 쇼룸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오세….”

서하가 인사하며 나가려던 찰나, 바닥에서 상자 각을 잡고 있던 성진이 툭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작업 마저 하이소. 내가 응대할게요.”

성진이 앞치마를 두른 채 쇼룸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진열대 구경을 하던 손님들은, 갑자기 자신들의 앞을 막아선 덩치 큰 남자와 짙은 눈매를 마주하고 순간 흠칫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친절한 공방 사장님을 기대했는데, 웬 조직의 행동대장 같은 남자가 무표정하게 서 있으니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 저기, 펜던트 목걸이 좀 보려고 하는데요….”

손님이 쭈뼛거리며 묻자, 성진이 진열대 안쪽을 가볍게 가리켰다.

“어떤 용도로 찾으십니까.”

“아, 그냥 데일리로 매일 찰 수 있는 거요… 너무 안 화려하고요.”

성진의 짙은 시선이 진열장을 쓱 훑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서하가 가장 최근에 작업했던 무광 은빛 펜던트 목걸이를 꺼내어 테이블 위 벨벳 트레이에 올려놓았다.

“이거 추천합니다.”

성진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쇼룸을 울렸다.

“이거 체인에 코팅이 한 번 더 덧입혀진 거라, 매일 차고 샤워해도 변색 안 됩니다. 펜던트 질감도 무광이라 피부 톤에 튀지 않고 잘 묻어가고요. 며칠 전에 나온 신상인데, 퀄리티 아주 괜찮습니다.”

무뚝뚝한 말투였지만, 제품의 소재와 장점을 완벽하게 꿰뚫고 있는 전문가다운 설명이었다. 매일 밤 서하가 작업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그녀의 꼼꼼한 세공 과정을 눈으로 확인해 온 성진이었기에 가능한 완벽한 브리핑이었다.

손님들의 눈빛이 경계심에서 묘한 신뢰감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어… 진짜 예쁘네요. 코팅이 되어 있어서 튼튼하다고요?”

“예. 대표님이 다 계산해서 만든 거라 웬만해선 안 끊어집니다.”

“그럼, 이걸로 할게요!”

성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능숙하게 카드 결제를 마치고, 자신이 방금 전 칼각으로 접어둔 상자에 목걸이를 담아 예쁘게 리본까지 묶어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손님들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 안쪽 작업실에서 숨죽여 지켜보던 서하가 기어이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최 대리와 지은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와, 성진 씨 진짜 대박. 방금 완전 베테랑 점장님 같았어요! 코팅 들어간 건 또 언제 들었어요?”

“매일 서하 씨 옆에서 박스 접으면서 그 정도도 모르면 바보 아입니까.”

성진이 아무렇지 않은 듯 대꾸하며, 다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덜 접힌 상자를 집어 들었다.

“자, 잡담 그만하고 마저 접읍시다. 6시까지 200개 남았습니다.”

성진의 차분한 호령에 직원들이 다시 후다닥 상자를 접기 시작했다. 서하는 웃음기를 매단 채 작업대로 돌아갔다.

저녁 6시. 기사가 약속한 시간에 맞춰 도착했을 때, 공방 바닥에는 오차 없이 일렬로 반듯하게 쌓인 완벽한 포장 박스들이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기사가 떠나고 직원들도 모두 퇴근한 저녁의 공방.

텅 빈 공간에 서하와 성진 단둘이 남았다. 앞치마를 벗어둔 성진이 소파에 앉아 뻐근한 목을 돌리고 있었다.

서하가 차가운 탄산수 두 병을 꺼내 다가와, 성진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오늘 우리 공식 일일 알바생, 진짜 고생 많았어요. 덕분에 완전 살았네.”

서하가 시원한 병을 성진의 뺨에 톡, 대며 장난스레 웃었다. 성진이 탄산수를 받아 들며 피식 웃었다.

“일당은 쳐 주는 겁니까.”

“당연하죠! 오늘 내가 제일 비싼 저녁 살게요. 뭐 먹고 싶어요?”

“비싼 거 말고, 그냥 집에 가서 밥 무십시다. 밖에서 먹을 기운도 없네요.”

성진이 탄산수를 한 모금 넘기고는, 자연스럽게 서하의 어깨에 제 머리를 툭 기댔다. 하루 종일 바짝 서 있던 덩치 큰 남자가 나른하게 기대어 오자, 서하는 기분 좋게 그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알았어요. 그럼 오늘은 1502호 말고 1501호로 가요. 내가 진짜 맛있는 찌개 끓여줄게요.”

“계란말이도 해주이소.”

“네네. 박 피디님 원하는 거 다 해드릴게요.”

무뚝뚝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유능하고 다정한 일일 알바생의 하루가, 서하의 포근한 손길 속에서 달콤하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외전 2. 그리움의 무게, 맞잡은 손

어느덧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뀌고, 1501호와 1502호 사이의 복도에는 두꺼운 겨울 외투를 입은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익숙하게 울려 퍼지는 한겨울이 되었다.

금요일 밤.

성진의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무릎 위로 커다란 담요를 하나 덮어쓴 채, 테이블 위에 놓인 청첩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성진의 밴드 동아리 선배이자, 지난번 술자리에도 함께했던 지인의 결혼 소식이었다.

“시간 진짜 빠르네요. 영현 씨랑 도운 씨가 축가 부르기로 했다면서요?”

“예. 원래 나보고 피아노 치라 캤는데, 내가 손 굳었다고 튕겼습니다.”

성진이 귤의 껍질을 꼼꼼하게 까서 서하의 입가로 밀어 넣어주며 무심히 대답했다. 서하가 오물오물 귤을 씹으며 청첩장의 예쁜 디자인을 매만졌다.

“근데 성진 씨 주변 사람들도 이제 하나둘 다 가네요. 원필 씨도 내년 봄에 날 잡았다고 했고.”

“그러게 말입니다. 다들 갈 때가 되긴 했죠.”

성진은 남은 귤을 입에 털어 넣고는, 휴지로 손을 닦으며 몸을 서하 쪽으로 살짝 틀었다.

“서하 씨.”

“네?”

“우리도, 내년 가을쯤엔 합칠까요.”

너무나도 덤덤하고 일상적인 말투였다. 마치 ‘내일 점심엔 찌개 먹을까요’라고 묻는 것처럼 힘을 쏙 뺀, 그러나 그 안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섞여 있지 않은 담백한 청혼이었다.

서하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청첩장을 테이블 위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심장이 크게 뛰어야 할 타이밍이었지만, 서하의 얼굴에는 기쁨이나 설렘보다 묘한 그림자가 먼저 내려앉았다.

“……성진 씨.”

“왜요. 가을은 팝업 때문에 너무 바쁩니까? 그럼 겨울로 미루고.”

“아니, 그게 아니라요.”

서하가 무릎 위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양손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 그녀의 태도에서 평소답지 않은 무거운 긴장감이 읽혔다. 성진은 금세 분위기가 달라졌음을 직감하고, 소파에 기대고 있던 등을 떼어 서하와 눈을 맞췄다.

“서하 씨. 무슨 걱정 있습니까?”

부드럽지만 단단하게 파고드는 질문. 서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두 사람이 연애를 시작하고 일상을 공유하면서, 서하는 단 한 번도 성진의 곁에서 불안함을 느낀 적이 없었다. 하지만 ‘결혼’이라는 단어가 수면 위로 올라오자, 마음 깊은 곳에 꽁꽁 숨겨두었던 해묵은 결핍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성진 씨 부모님은, 어떤 분들이세요?”

조심스러운 물음에 성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평범하십니다. 두 분 다 부산에 계시고, 무뚝뚝하지만 정은 많으시고. 내가 워낙 무심한 아들이라, 아마 서하 씨 데려가면 나보다 훨씬 예뻐하실 겁니다. 왜요, 벌써 시부모님 만날 생각 하니까 긴장됩니까?”

“아니요. 예뻐해 주시면 너무 감사한데….”

서하가 힘겹게 숨을 골랐다.

“어른들은… 보통 평범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며느리를 원하시잖아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나, 아빠가 일찍 돌아가셨잖아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성진의 짙은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내가 아주 어릴 때 돌아가셔서, 엄마 혼자 식당 일부터 청소 일까지 안 해본 고생 없이 나를 키우셨어요. 엄마가 너무 고생하는 걸 아니까, 나도 어떻게든 빨리 자리 잡아서 엄마 호강시켜 주고 싶어서… 그래서 더 아등바등 혼자 다 감당하려고 했던 거고요.”

과거, 서하가 타인에게 신세를 지는 것을 그토록 불편해하고 모든 짐을 혼자 짊어지려 했던 그 서글픈 독립심의 기원이 비로소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우리 엄마가 너무 존경스럽고 자랑스럽지만… 세상 어른들 시선은 그게 아닐 수도 있잖아요. 편부모 가정에서, 그것도 없이 자란 애라고… 성진 씨 부모님이 싫어하시거나 걱정하실까 봐. 혹여나 성진 씨한테 내가 흠이 될까 봐, 그게 무서워서요.”

애써 덤덤하게 말하려 노력했지만, 억눌러왔던 속마음을 꺼내놓은 서하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꾹 참으려던 눈물이 결국 툭, 하고 떨어져 무릎을 덮은 담요 위로 둥근 얼룩을 만들었다.

성진은 아무 말 없이 서하를 바라보았다.

‘요즘 세상에 누가 그런 걸 따집니까’라거나, ‘우리 부모님은 절대 그런 분들 아닙니다’라는 가벼운 위로로 서하의 오랜 상처를 대충 덮고 싶지 않았다.

성진은 천천히 손을 뻗어, 불안하게 얽혀 있는 서하의 두 손을 꽉 쥐었다.

“서하 씨.”

성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깊고 단단했다.

“서하 씨 어머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네요.”

“…….”

“혼자서 그 모진 세월 다 버티시면서, 우리 서하 씨를 이렇게 반듯하고 맑고 단단한 사람으로 키워내셨지 않습니까. 내가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고 사랑하는 여자를 이렇게 훌륭하게 키워주신 분인데, 어떻게 감히 부족하다거나 흠이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위로가 아니라, 완벽한 인정과 존경이 담긴 진심이었다. 서하의 뺨을 타고 소리 없는 눈물이 한 줄기 더 흘러내렸다.

성진은 곁으로 바짝 당겨 앉아, 자신의 커다란 손으로 서하의 젖은 뺨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걱정하지 마이소. 우리 부모님도 절대 그런 걸로 사람 잣대질할 분들 아닙니다. 내가 서하 씨를 이만큼 끔찍하게 아끼는데, 나 믿고 키워주신 어머님을 어떻게 안 예뻐하시겠습니까.”

“…….”

“그리고 만약에, 아주 만약에라도 어른들이 속상한 소리 한마디라도 하시면… 내가 다 막습니다. 내 사람 지키는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서하 씨는 그런 쓸데없는 걱정으로 혼자 땅굴 파지 마요.”

성진의 흔들림 없는 맹세에 서하가 붉어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빠가… 보고 싶어요.”

서하가 물기 어린 목소리로 작게 웅얼거렸다.

“내가 이렇게 좋은 사람 만난 거, 아빠가 살아서 봤으면 진짜 좋아했을 텐데. 나 예뻐해 주는 성진 씨 보면서 아빠가 진짜 안심했을 텐데…….”

아버지를 향한 지독한 그리움과 아쉬움이 터져 나오자, 성진은 서하의 어깨를 감싸 안아 자신의 품으로 조용히 끌어당겼다. 서하는 성진의 가슴팍에 이마를 댄 채 소리 없이 어깨만 작게 들썩였다. 어린 시절부터 억지로 강한 척 버텨야 했던 시간들이 성진의 뜨거운 체온 속에서 차분하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아버님도 다 보고 계실 겁니다.”

성진이 서하의 등을 일정한 박자로 토닥이며 낮게 속삭였다.

“서하 씨가 나 만나서 얼마나 예쁘게 웃는지, 내가 우리 서하 씨 눈에 눈물 안 나게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 위에서 다 보고 안심하고 계실 테니까, 속상해하지 마이소. 앞으로 아버님 몫까지 내가 두 배, 세 배로 더 아끼고 챙길 테니까요.”

투박하지만 세상 그 어떤 말보다 든든한 약속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서하의 떨림이 잦아들었을 때, 성진이 살짝 몸을 떼어내고 두 손으로 서하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성진의 짙은 눈동자가 서하의 시선을 올곧게 붙잡았다.

“그러니까 한서하 씨.”

“네에….”

“혼자서 짐 짊어지는 건 오늘까지만 하고, 내년 가을엔 나한테 시집오이소.”

눈물 자국이 남은 서하의 얼굴에 마침내 배시시, 맑은 웃음꽃이 피어났다.

“나 고집도 세고, 손도 많이 가는데. 감당할 수 있겠어요?”

“그 정도는 돼야 평생 모실 맛이 나죠.”

성진이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여 서하의 젖은 눈가에, 그리고 입술에 조심스럽고 깊게 입을 맞췄다.

15층 복도를 사이에 두고 서성거리던 두 사람은 이제 핑계와 오해를 지나, 서로의 가장 깊은 상처마저 기꺼이 껴안는 진짜 가족이 되어가고 있었다.

시리도록 추운 겨울밤이었지만, 맞잡은 두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만큼은 세상 그 어떤 곳보다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