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1호에 사람이 들어왔다
14화. 문 하나 건너의 연애

14화. 문 하나 건너의 연애

1501호에 사람이 들어왔다

연애가 일상에 스며들기 시작하자, 마주 보고 있는 두 현관문은 사실상 제 기능을 잃어갔다.

밤 11시 30분, 1501호 서하의 거실.

작업대의 밝은 스탠드 조명 아래서, 서하는 은선을 꼬아 체인을 만드느라 한껏 목을 빼고 집중하고 있었다. 온 집안이 고요한 가운데, 그녀의 등 뒤로 ‘삐리릭- 철컥’ 하는 도어락 해제음이 경쾌하게 울렸다.

이제는 노크도 없이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발소리의 주인공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거북목 또 나왔네. 이러다 진짜 자라 되겠습니다, 한서하 씨.”

장난 섞인 성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하가 쥐고 있던 펜치를 내려놓고 고글을 위로 밀어 올리며 뒤를 돌아보자, 성진이 작은 쟁반을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쟁반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우유 한 잔과, 꿀을 발라 노릇하게 구운 식빵 테두리가 먹기 좋게 잘려 있었다.

“아, 배고팠는데. 성진 씨는 내 배꼽시계 알람이라도 맞춰놨어요?”

“어제도 이 시간까지 안 자고 펜치 쥐고 있길래 와봤죠. 불쌍해서 구호물자 좀 챙겨왔습니다. 눈 밑에 다크서클 턱까지 내려왔어요.”

성진은 탁자에 간식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아 있는 서하의 등 뒤로 다가왔다. 그의 커다란 두 손이 서하의 굽은 어깨와 뒷목을 부드럽게 꾹꾹 주물러 주기 시작했다.

“으음, 진짜 시원하다….”

서하가 기분 좋은 탄성을 뱉으며 뒤로 고개를 젖히자, 성진은 피식 웃으며 자신의 단단한 배로 그녀의 뒤통수를 편안하게 받쳐주었다. 평소의 무뚝뚝하고 날 서 있던 박성진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한없이 나른하고 편안한 텐션이었다.

“이것만 먹고 얼른 자이소. 무리하지 말고.”

“네네. 근데 이 빵 진짜 맛있다. 혹시 저 꼬시려고 요리학원 다녔어요? 왜 이렇게 다 잘해.”

“타고난 겁니다. 이제 알았습니까.”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는 성진의 모습에 서하가 소리 내어 웃었다. 무심한 척 챙길 건 다 챙겨주면서도, 장난을 걸면 빼지 않고 능글맞게 받아치는 이 남자의 여유가 서하는 못 견디게 좋았다.

며칠 뒤 저녁, 오피스텔 3층 헬스장.

서하는 러닝머신 위를 빠르게 걷고 있었고, 성진은 그 옆 웨이트 존에서 덤벨을 들고 있었다.

서하의 시선은 런닝머신 모니터가 아니라, 곁눈질로 자꾸만 성진을 향했다. 땀에 젖어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 덤벨을 들어 올릴 때마다 드러나는 단단하고 곧은 팔의 잔근육. 늘 넉넉한 옷이나 단정한 셔츠를 챙겨 입었을 때는 몰랐던, 넓은 어깨와 다부진 골격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새삼스럽게 골격 진짜 좋네…….’

서하가 속으로 감탄하며 러닝머신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성진을 따라 해보겠다며 호기롭게 랫풀다운 기구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하지만 무거운 무게 탓에 자세는 엉거주춤했고, 바를 당길 때마다 어깨가 굽어 끙끙대는 소리가 절로 났다.

“자세가 틀렸습니다. 그렇게 힘으로만 당기면 등에는 자극이 한 개도 안 옵니다.”

어느새 다가온 성진이 서하의 등 뒤에 섰다.

그는 허리를 숙여 기구의 무릎 패드 각도를 서하의 체형에 맞게 낮춰주고는, 두 손으로 서하의 무릎 위쪽 허벅지 근육을 꾹 눌러 고정해 주었다.

“여기 힘 딱 주고, 팔이 아니라 등으로 당긴다는 느낌으로. 자, 올려보이소.”

가르침은 완벽했다. 문제는, 자세를 교정해 주느라 성진의 단단한 가슴팍이 서하의 등 뒤에 거의 맞닿아 버렸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흔들리지 않게 허벅지를 꽉 짚고 있는 성진의 큰 손에서 전해지는 뜨거운 체온 탓에, 서하의 머릿속에는 근육의 움직임 따위는 새하얗게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다.

“어… 아, 네. 잠깐만요….”

서하가 당황한 탓에 숨을 멈추고 바를 당기려 애썼다. 거울 속에 비친 그녀의 얼굴이 운동 때문이 아니라 묘한 텐션 때문에 터질 듯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모습을 등 뒤에서 여유롭게 내려다보던 성진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그는 서하의 허벅지에서 손을 떼며, 짓궂게 허리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얼굴이 왜 이래 빨갛습니까. 무거운 건 뒤에서 내가 다 당겨줬는데.”

귀를 간지럽히는 성진의 능글맞은 장난에 서하는 헉, 숨을 들이켜며 황급히 기구에서 일어났다.

“더, 더워서 그래요! 헬스장 에어컨이 약하네!”

“아하. 한 세트 더 할까요, 그럼? 이번엔 내가 앞에서 잡아줄까요.”

“아니요! 저 먼저 씻으러 갈게요!”

서하가 수건으로 새빨개진 얼굴을 가린 채 후다닥 헬스장을 빠져나갔다. 성진은 도망가는 서하의 귀여운 뒷모습을 보며 소리 내어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연애를 시작하고 나서, 성진의 웃음 장벽은 확실히 형편없이 낮아져 있었다.

그 주 주말 저녁, 1502호.

성진의 집 주방 쪽 식탁에는 오랜만에 영현, 원필, 도운이 모여 배달 온 치킨과 피자를 늘어놓고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있었다.

“행님, 형수님은 언제 오십니꺼? 피자 다 식겠네예.”

“방금 공방에서 출발했다. 씻고 바로 넘어온다고 했으니까 조용히 좀 하고 먹어라.”

성진이 도운에게 타박을 던질 때, 현관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씻고 편안한 차림으로 갈아입은 서하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제가 너무 늦었죠?”

“아유, 아닙니다! 어서 오십쇼, 형수님!”

도운이 식탁 의자를 밀치듯 벌떡 일어나 인사를 하자, 성진이 누구보다 빠르게 옆자리의 빈 의자를 빼내며 서하를 앉혔다.

“머리 안 말리고 나왔네. 감기 걸립니다.”

성진은 서하가 자리에 앉자마자, 자연스럽게 휴지로 젓가락과 숟가락의 물기를 꼼꼼히 닦아 서하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러고는 닭다리 하나를 집어 그녀의 앞접시에 조용히 덜어주었다.

그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다정한 수발(?)을 지켜보던 도운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와, 행님. 이빨 썩겠습니더. 아까 내꺼는 대충 던져주더만은 형수님 젓가락은 물기까지 싹 닦아서 쥐여주네예? 진짜 치사해서 못 살겠다.”

영현 역시 맥주 캔을 들며 얄밉게 거들었다. “내 말이. 우리가 예전에 작업실에서 치킨 먹을 땐 뼈 똑바로 안 버린다고 구박을 그렇게 하더니.”

동생들의 짓궂은 타박과 폭로전에 서하가 민망한 듯 뺨을 붉히며 성진의 눈치를 살폈다. 예전 같았으면 귀끝이 새빨개져서 ‘시끄럽다’고 정색을 했을 성진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성진은 달랐다.

그는 서하에게 치킨 무를 밀어주며, 동생들을 향해 뻔뻔하고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어. 꼬우면 너희도 연애하든가.”

성진의 타격감 제로인 뻔뻔한 직구에 영현과 도운이 말문이 막혀 벙찐 표정을 지었다. 원필만이 턱을 괸 채 재미있다는 듯 키득거렸다.

“참나, 우리도 연애해. 뭐래는 거야! 아니, 저 형 저렇게 능글맞은 사람인 거 알고 만나신 거예요?”

영현의 투정에 서하도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동생들의 놀림에 무안해하기는커녕, 보란 듯이 자신을 더 챙기며 여유롭게 받아치는 성진의 모습이 서하의 눈에는 마냥 든든하고 사랑스러워 보일 뿐이었다.

며칠 뒤,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넷플릭스를 보던 중, 서하가 갑자기 생각난 듯 방으로 들어가 작은 벨벳 상자를 하나 들고나왔다.

“짜잔. 성진 씨 주려고 만들었어요.”

서하가 내민 상자 안에는, 고급스러운 가죽 끈에 은색 금속 펜던트가 정교하게 얽힌 자동차 키링이 들어 있었다. 너무 번쩍이지 않는 무광 은색에, 성진이 좋아하는 가죽의 질감을 완벽하게 살린 맞춤형 디자인이었다.

“와.”

성진은 눈을 반짝이며 키링을 꺼내 들었다. 묵직하고 단정한 것이 완벽하게 그의 취향이었다. 이웃 시절, 엘리베이터 앞에서 스치듯 나누었던 키링 이야기를 잊지 않고 만들어준 서하의 정성이 고마워 가슴이 따뜻해졌다.

“진짜 예쁘네요. 고맙습니다.”

성진은 기분 좋은 얼굴로 즉시 자신의 차 키를 가져와 키링을 매달았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요.”

“이런 거 만들 시간도 없었을 텐데, 언제 다 했습니까.”

“저번에 밥 사주신 것도 있고, 팝업 도와준 것도 너무 고맙고… 제가 맨날 성진 씨한테 얻어먹고 도움받기만 하는 것 같아서요. 제 나름의 보답이에요.”

서하가 뿌듯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그 말을 듣던 성진의 손이, 차 키를 만지작거리다 아주 미세하게 멈칫했다.

“…….”

성진은 고개를 돌려 서하를 가만히 응시했다. 아주 작고 미세한 걸림이었다. 큰 도움을 받을 때마다 어떻게든 자기 몫의 성의를 돌려주려 애쓰는 서하의 예의 바른 습관을, 성진은 연애 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참 예의를 알고, 경우를 아는 잘 없는 괜찮은 이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해준 서하의 태도였다. 하지만 서로의 밑바닥까지 다 내어주기로 약속한 연인이 된 지금도, 무언가를 해줄 때마다 꼬박꼬박 ‘보답’이라느니 ‘얻어먹기만 해서 미안하다’느니 하는 말을 듣는 건 묘하게 선을 긋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디자인도 예쁘고 다 좋은데.”

성진이 서하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장난을 가장한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방금 한 말 중에, ‘보답’이라는 단어만 빼면 더 완벽했겠네요.”

“아… 제가 또 그랬어요? 미안해요. 그냥 진짜 너무 고마워서…….”

“농담입니다. 내 취향 알아주고 시간 내서 만들어준 게 예뻐서 하는 소리예요.”

성진은 자신의 말에 금세 굳어지는 서하의 표정을 읽고, 재빨리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어넘겼다. 서하도 다시 배시시 웃으며 성진의 어깨에 편안하게 기댔다.

서로에 대한 고마움과 애정이 차고 넘쳐서 생기는 사랑스러운 핑퐁, 문제 될 것 없는 작고 귀여운 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