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내 세계를 지키는 구조
H사 최종 샘플 제출 D-2.
1501호의 거실은 그야말로 작은 ‘상황실’처럼 변해 있었다.
평소라면 깔끔하게 비워져 있었을 벽면에는 성진이 출력해 온 거대한 A3 사이즈의 타임라인 표가 떡하니 붙어 있었다. 붉은색 마커로 굵게 그어진 [납기 마감]이라는 글자 아래로, 부자재 발주, 검수, 라벨링, 패킹 등의 단계가 날짜별로 촘촘하게 쪼개져 있었다.
두 사람의 일하는 방식은 완벽하게 달랐다.
작업대 스탠드 아래에 앉은 서하의 세계는 오직 ‘감각’과 ‘완성도’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0.1밀리미터의 오차라도 보이면 가차 없이 은선을 끊어내고 처음부터 다시 세공을 시작했다.
반면, 식탁에 노트북을 펴고 앉은 성진의 세계는 ‘일정’과 ‘리스크 관리’가 최우선이었다.
“한서하 대표님.”
타닥타닥, 엑셀 창을 두드리던 성진이 안경을 치켜올리며 불렀다.
“네, 넵.”
“원가표 보니까 이 체인 부자재 단가, 이거 진짜 맞습니까?”
“아… 네. 원래 쓰던 것보다 코팅이 한 번 더 들어간 거라서 조금 비싸요. 그래도 변색이 안 돼서 퀄리티가 훨씬 좋거든요.”
“퀄리티 좋은 건 알겠는데, 이 단가로 수수료 떼고 패키지 값 빼면 팔수록 손해입니다. 자선사업 합니까, 우리 대표님.”
성진의 뼈 때리는 팩트 폭격에 서하가 입술을 삐죽였다. 성진은 마우스 휠을 굴리며 장난기 어린, 그러나 단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단가 못 낮출 거면 패키징 부피를 줄여서 물류비라도 빼야죠. 상자 사이즈 한 치수 작은 걸로 발주 넣을 테니까, 샘플 배열만 쪼매 수정하이소.”
디자인의 퀄리티를 지키기 위해 물류라는 현실적인 타협점을 찾아내는 성진의 깔끔한 대안에, 서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얼마 뒤, 샘플의 라인업 이름을 정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뜯던 서하가 앓는 소리를 냈다.
“아, 이 나뭇잎 모티브 라인… 이름을 뭘로 하죠. ‘은빛 나뭇잎’… 너무 촌스럽나? ‘실버 리프’… 아, 이건 너무 뻔하고.”
펜을 입술에 툭툭 부딪히며 고민하는 서하의 등 뒤로, 엑셀 창에서 눈을 떼지 않은 성진의 무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벽 숲’ 어때요.”
“……어?”
“어차피 무광 은색이니까. 이슬 맺힌 새벽 숲 같고, 향기 나는 것 같고 좋네요.”
서하의 눈이 번쩍 뜨였다. 직관적이면서도 감성적인, 완벽한 이름이었다.
“와. 진짜 딱이에요! 성진 씨 혹시 작명 학원 같은 데 다녀요? 어떻게 그런 감성적인 단어가 툭툭 나와요?”
“가사 쓰다 보면 흔하게 주워다 쓰는 말입니다. 안 까먹게 빨리 마저 적으이소.”
음악 프로듀서 특유의 예술적 감각까지 보태지니, 서하의 1인 공방은 그 어느 때보다 체계적이고 트렌디한 브랜드의 형태를 갖춰가고 있었다.
새벽 1시.
최종 샘플 라인업을 마지막으로 점검하던 중, 두 사람 사이에 첫 번째 작은 의견 충돌이 발생했다.
성진이 서하가 밤새 세공한 3단 레이어드 체인 목걸이를 집어 들며 미간을 좁혔다.
“서하 씨. 이거는 라인업에서 빼는 게 안 낫겠습니까.”
“네? 왜요? 그거 반응 제일 좋을 것 같은데.”
“체인 세 개를 일일이 간격 맞춰서 연결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거 하나 만드는 데 족히 30분은 걸릴 텐데, 500개 물량 맞추려면 여기서 무조건 병목현상 생깁니다. 효율이 너무 떨어져요.”
숫자와 일정을 근거로 한 완벽한 타당성이었다. 평소의 서하라면 남에게 폐를 끼치거나 일정이 지연되는 것을 극도로 꺼렸기에, 그의 효율적인 논리 앞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서하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책상 위에 놓인 그 목걸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가장 손이 많이 가지만, 그만큼 서하의 취향과 브랜드의 정체성이 가장 진하게 담긴 디자인이었다.
“……아니요.”
서하가 목걸이를 제 품 쪽으로 끌어당기며 입을 열었다.
“이건, 빼기 싫어요.”
단호한 목소리였다. 서하가 성진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제작 시간이 오래 걸려도, 몸이 힘들어도… 이게 제일 제 브랜드다운 디자인이에요. 이번 협업의 메인으로 꼭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단순한 고집이 아니라, 자신의 창작물에 대한 확신이자 대표로서의 분명한 욕심이었다.
자신의 논리가 반박당했음에도, 성진의 얼굴에는 기분 나빠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서하의 단단한 두 눈을 마주하던 그의 입가에 느릿하게 호선이 그려졌다.

“그렇게 말해야 우리 대표님이지.”
성진이 목걸이를 다시 테이블 중앙으로 밀어주며,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대표님이 그렇다 카면 살려야죠. 대신 제작 시간 벌 수 있게, 이 모델은 100개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수량 제한 걸어서 H사 쪽에 제안합시다. 희소성 있어서 마케팅하기도 훨씬 좋을 깁니다.”
서하의 두 눈이 다시금 커졌다.
성진은 ‘효율’이라는 명목으로 서하의 고집을 꺾고 통제하려 든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지키고 싶어 하는 디자인의 세계를 인정하고, 그것이 현실에서 무너지지 않고 안전하게 굴러갈 수 있도록 수량 제한과 마케팅이라는 바깥의 구조를 다시 설계해 준 것이다.
‘함께한다는 게, 내 일을 뺏기는 게 아니었구나.’
서하는 그제야 며칠 전 자신이 느꼈던 그 작은 불안감이 얼마나 바보 같은 감정이었는지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세계를 갉아먹는 사람이 아니라, 그 세계가 가장 온전하게 빛날 수 있도록 든든한 뼈대를 세워주는 사람이었다.
“성진 씨.”
“왜요. 다른 것도 살리고 싶은 거 있습니까?”
“아니요. 그냥, 고마워서요.”
서하의 뜬금없는 인사에 성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서하는 배시시 웃으며 목걸이들을 조심스럽게 샘플 박스에 담기 시작했다.
새벽 3시.
마침내 모든 샘플의 라벨링이 끝나고, 성진이 테이프를 가져와 깔끔하고 빈틈없는 솜씨로 택배 상자를 밀봉했다.
“끝났다.”
성진이 손을 털며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그 옆에 나란히 앉은 서하가 노트북을 열고, H사 담당자에게 보낼 최종 메일의 전송 버튼을 눌렀다.
[메일이 성공적으로 전송되었습니다.]
화면에 뜬 알림창을 보며, 서하는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테이블 위에는 내일 아침 택배 기사에게 인계할 반듯한 샘플 박스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서하는 상자와 성진을 번갈아 보며, 벅차오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진짜 우리 둘이 같이 만든 것 같아요.”
나 혼자 외롭게 짊어졌던 브랜드에, 성진의 체온과 시간과 시스템이 완벽하게 스며들어 만들어낸 첫 합작품.
성진은 뻐근한 뒷목을 손으로 주무르다 말고, 서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피곤함이 묻어나는 얼굴이었지만, 그녀를 담고 있는 짙은 눈빛만큼은 어느 때보다 따뜻하고 다정했다.
“무슨 소립니까.”
성진이 손을 뻗어 서하의 흐트러진 앞머리를 부드럽게 정리해 주었다.
“디자인하고, 밤새 은 깎고, 메일 보낸 건 다 우리 대표님이 한 기고요.”
“…….”
“나는 그냥, 옆에서 박스나 몇 개 접은 게 답니다.”
자신의 공을 지우고 모든 성과를 서하의 왕관으로 씌워주는, 성진다운 담백하고도 단단한 마침표였다. 서하는 왈칵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기 위해, 성진의 넓은 어깨에 제 머리를 툭 기대며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박스 제일 잘 접는 메인 피디님. 진짜 고생했어요.”
성진은 대답 대신, 자신의 품에 파고든 서하의 어깨를 마주 끌어안으며 그녀의 정수리에 가만히 뺨을 비비적거렸다. 새벽 3시의 고요한 1501호. 이제 이 공간은 혼자만의 외로운 작업실이 아니라, 서로의 세계를 가장 안전하게 지탱해 주는 완벽한 요새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