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멋있는 대표님
H사 콜라보 오픈을 앞두고, 1501호의 거실에는 다시 한번 약간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 진짜 떨리네.”
서하가 노트북 화면에 띄워진 화상 회의 링크를 보며 마른입술을 축였다. 오늘은 H사 기획팀과의 최종 점검 화상 미팅이 있는 날이었다. H사 콜라보 기획전의 메인 디스플레이 존에 서하의 ‘새벽 숲’ 라인을 추가로 배치하겠다는 H사 측의 긍정적인 제안 때문에 급하게 잡힌 일정이었다.
서하의 옆자리에는 성진이 태블릿 PC를 든 채 나란히 앉아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성진이 화면의 정중앙을 차지하고 서하가 그 옆에 빗겨 앉아 있었겠지만, 오늘 화면의 정중앙에 자리한 것은 오롯이 한서하 한 명뿐이었다.
성진은 화면 앵글 끝자락에 살짝 걸친 채, 철저하게 조력자의 위치를 지키고 있었다.
“긴장할 거 없습니다. 대표님이 다 결정하신 내용이고, 나는 옆에서 숫자만 띄워줄 테니까 편하게 하이소.”
성진이 테이블 아래로 서하의 손을 꽉 쥐어주며 낮게 속삭였다. 그 묵직한 체온에 서하가 깊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화면 너머로 H사 파트장과 MD가 접속했다.
아, 대표님. 안녕하세요. 옆에 성진 님도 같이 계시네요.
화면 너머의 파트장이 두 사람을 보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네, 파트장님. 제안해주신 추가 디스플레이 건, 보내주신 메일은 잘 확인했습니다.”
서하가 부드럽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회의의 포문을 열었다. 서하는 미리 정리해 둔 브랜드의 연출 방향과, 메인 존에 들어갈 부자재들의 질감을 어떻게 시각적으로 살릴지에 대해 막힘없이 브리핑을 이어갔다.
성진은 묵묵히 서하의 설명을 들으며, 그녀의 말이 끝날 타이밍에 맞춰 태블릿에 정리해 둔 예상 시안 이미지를 화면에 부드럽게 띄워주었다. 말하지 않아도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톱니바퀴 같은 호흡이었다.
역시, 대표님 기획안은 언제 봐도 깔끔하네요. 저희 쪽 연출팀도 아주 만족할 것 같습니다.
파트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곧이어, 실무적인 문제로 화제가 넘어가자 파트장의 시선이 습관적으로 화면 구석의 성진을 향했다.
그런데 메인 존에 물량이 추가로 들어가면 1차 납품 수량도 늘려야 할 텐데요. 박성진 님, 혹시 3일 안으로 초도 물량 200개 추가 생산해서 물류 센터로 입고시키는 거, 일정상 문제없을까요?
순간, 서하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굳어졌다.
지난 대면 미팅 때처럼, 중요한 실무와 숫자의 결정권이 자신을 건너뛰고 성진에게 넘어가는 익숙하고도 뼈아픈 상황이었다. 서하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성진의 입술을 향했다.
하지만 성진은 파트장의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태블릿 PC를 테이블 위로 소리 없이 내려놓고는, 고개를 돌려 서하를 바라보았다. 대답을 대신해 주는 대신, 그녀가 스스로 입을 열기를 기다리는 부드럽고 단단한 눈빛이었다.
성진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살짝 기대며, 아주 자연스럽게 화면의 정중앙을 서하에게 온전히 내어주었다. 상대를 무안하게 만들지 않으면서도, 이 질문에 대답할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행동만으로 명확히 보여주는 완벽한 양보였다.
그 침묵의 지지에 서하의 가슴 속에서 뭉클하고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그녀의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벽이 아니라, 그녀가 당당하게 설 수 있도록 무대를 내어주는 가장 다정한 핀 조명이었다.
서하는 성진과 짧게 눈을 맞춘 뒤,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화면 너머의 파트장을 똑바로 응시했다.
“파트장님. 3일 내로 200개 추가 생산, 가능합니다.”
서하가 성진이 띄워준 태블릿의 데이터 화면을 곁눈질하며,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대답을 이어갔다.
“다만, 수작업 공정의 퀄리티를 유지하기 위해 기존에 협의된 2차 납품 물량 중 일부를 뒤로 미루는 조건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정확한 차수별 입고 스케줄은 미팅 직후에 엑셀로 정리해서 메일로 송부해 드리겠습니다.”
무리해서 일정을 맞추지도, 그렇다고 요청을 거절하지도 않는 현실적인 방안이었다.
아, 네! 좋습니다. 대표님 말씀대로 2차 물량 일정 조정해서 진행하시죠. 그럼 세부 스케줄 메일 기다리겠습니다.
화면 너머의 파트장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서하를 향해 미소 지었다. 방금 전까지 성진에게 향했던 그들의 시선이, 이제는 온전히 ‘한서하 대표’ 한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서하의 인사를 끝으로 화상 회의 창이 종료되었다. 노트북의 검은 화면이 내려앉자마자, 고요했던 1501호의 거실에 서하의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
서하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성진 씨, 나 방금 진짜 떨렸던 거 알아요? 아, 심장 터지는 줄 알았네!”
“떨리긴 뭘 떨어요. 완전 프로 같더구만.”
성진이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채, 흥분해서 방방 뛰는 서하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짙은 눈동자 속에는 숨길 수 없는 애정과 짙은 대견함이 가득 차올라 있었다.
“진짜요? 나 대표 같았어요?”
“예. 진짜 멋있는 한서하 대표님 같았습니다.”
성진의 칭찬에 서하가 참지 못하고 그에게 다가가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의자에 앉아 있던 성진이 갑작스러운 포옹에 뒤로 살짝 밀리면서도, 커다란 두 손으로 서하의 허리를 빈틈없이 단단하게 안아 올렸다.
“다 성진 씨 덕분이에요.”
서하가 성진의 어깨에 뺨을 부비며 속삭였다.
“아까 나 쳐다보면서 뒤로 빠져줬을 때, 나 진짜 속으로 엄청 든든했어요. 성진 씨가 내 뒤에 버티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하나도 안 무섭더라고요.”
“나는 당연한 거 한 겁니다. 대표님이 대답하는 게 맞으니까.”
성진이 서하의 허리를 안은 채, 그녀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려 시선을 맞췄다. 그의 코끝이 서하의 코끝에 기분 좋게 닿았다 떨어졌다.
“오늘 브리핑 진짜 완벽했습니다. 퀄리티 핑계 대고 2차 물량 뒤로 뺀 건 나도 생각 못 했던 건데, 협상 스킬이 아주 많이 늘었어요.”
“그쵸! 나 방금 좀 똑똑해 보였죠?”
서하가 콧대를 높이며 으스대자, 성진이 결국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 서하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자신의 품으로 바짝 당겼다.
“예. 예뻐 죽겠습니다, 아주.”
성진이 나지막이 속삭이며 서하의 입술에 깊게 입을 맞췄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입맞춤이 끝난 뒤, 성진이 서하의 이마에 제 이마를 툭 기댄 채 낮게 웅얼거렸다.
“대표님.”
“네, 비서실장님.”
“미팅도 잘 끝났는데, 우리 오늘 저녁은 밖에서 맛있는 거 먹고 들어올까요.”
“비서실장님이 사는 건가요?”
서하의 장난스러운 도발에 성진이 그녀의 콧잔등을 가볍게 깨물며 피식 웃었다.
“예. 내가 쏘겠습니다. 우리 서하 씨 진짜 고생했으니까.”
성진의 넓은 품 안에서 서하의 맑은 웃음소리가 거실을 가득 채웠다.
서로의 몫을 완벽하게 존중하고, 가장 든든한 핑계가 되어주는 두 사람. 오피스텔 15층의 밤이, 그 어느 때보다 달콤하고 찬란하게 무르익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