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어울리지 않는 꽃
1501호에 사람이 들어왔다
다음 날 아침.
서하는 전신 거울 앞에서 벌써 세 번이나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평소라면 대충 후드티나 셔츠를 걸치고 나갔을 텐데, 오늘은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눈을 감을 때마다 어젯밤 성진의 넓은 가슴팍에 안겨 있던 감각과, 귓가를 울리던 그의 낮고 거친 목소리가 생생하게 되살아나 얼굴이 터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느 미친놈이, 이웃이 걱정돼서 이렇게 피가 마릅니까.’
“아, 진짜 미쳤어…….”
서하는 붉어진 두 뺨을 양손으로 감싸 쥐며 주저앉았다.
취객으로 놀랐던 기억은 아직 가슴 한쪽을 서늘하게 찌르고 있었다. 다만 그보다 더 선명하게 남은 건, 자신을 끌어안고 괜찮다고 말하던 성진의 체온과 흔들리던 목소리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이웃의 정’이라는 얄팍한 핑계가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킨 서하가 조심스럽게 1501호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어.”
맞은편 1502호의 문이 열려 있었다. 현관 앞에 서서 운동화 끈을 묶고 있던 성진이 고개를 들었다.

“아, 좋은 아침이요, 성진 씨. 일찍 나가시네요?”
어색함을 감추려 서하가 한 톤 높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성진은 운동화 끈을 마저 묶고 일어나며, 특유의 덤덤하지만 짙은 시선으로 서하를 내려다보았다.
“일찍 나가는 거 아닙니다.”
“네? 아, 녹음이 미뤄지셨구나….”
“아니요.”
성진이 현관문을 닫고 서하의 앞으로 다가왔다.
“서하 씨 기다린 겁니다.”
훅 치고 들어오는 직구에 서하의 숨이 턱 막혔다.
“어제 그런 일도 있었는데, 혼자 엘리베이터 타고 주차장 내려가게 두는 거… 신경 쓰여서요. 같이 가시죠.”
성진이 자연스럽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어제까지만 해도 ‘마침 나가는 길이었다’며 핑계를 댔을 텐데. 성진은 더 이상 자신의 행동을 숨기거나 돌려 말하지 않았다. 대놓고 ‘당신이 걱정되어 기다렸다’고 말하는 그의 직진에 서하는 귓바퀴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엘리베이터 안,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그것은 피하고 싶은 불편함이 아니라, 오히려 한 발짝 더 다가가고 싶어 숨을 참게 되는 쪽에 가까웠다. 온통 서로에게만 쏠린 의식이 손끝마저 간지럽게 만들었다.
“몸은 좀 괜찮습니까.”
“아, 네! 완전 멀쩡해요. 어제 성진 씨가… 안, 아니, 붙잡아 주셔서 안 넘어졌잖아요.”
말을 더듬던 서하가 ‘안아주셔서’라는 단어를 황급히 삼켰다. 성진의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가 번졌다 사라졌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가까워질 즈음, 서하가 조심스럽게 먼저 입을 열었다.
“저기, 성진 씨. 오늘 저녁 약속은… 그대로 괜찮죠?”
성진의 시선이 곧장 서하에게 닿았다. 어젯밤 일 때문에라도 먼저 미루자고 말해야 하나, 그는 아침 내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무리면 미뤄도 됩니다. 어제 그런 일도 있었고.”
“아니요. 저 그 약속 기다렸어요.”
서하가 작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오늘은… 혼자 있고 싶지 않기도 하고요.”
그 말 하나에 성진의 굳어 있던 어깨가 아주 조금 풀렸다. 어젯밤의 공포가 두 사람의 약속을 망가뜨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약속을 더 붙잡고 싶은 이유가 되어버린 셈이었다.
오후 4시, 원필이 운영하는 아담하고 화사한 꽃집 앞.
며칠 전, 금요일 저녁 약속이 잡히던 그 밤, 성진은 원필에게 전화를 걸어 단단히 신신당부를 해둔 참이었다. ‘부담 안 가지게, 무조건 은은하고 작고 수수한 걸로 만들어 놔라.’
묵직하게 문을 열고 들어서며 성진이 입을 열었다. 고백을 앞두고 바짝 긴장한 탓에, 특유의 짙은 사투리가 툭 튀어나왔다.
“원필아, 오늘이다.”
“어, 형. 왔어? 꽃은 다 준비해 놨지.”
카운터 안쪽에서 원필이 고개를 들었다. 늘 입던 오버사이즈의 편안한 옷을 대충 툭 걸치고 왔을 뿐인데도, 바짝 긴장한 성진의 깊고 진한 눈매가 오늘따라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매매 신경 써서 맹글어 놨제?”
제대로 신경 써서 만들어 놨느냐며 성진이 묻던, 그 순간이었다.
탁, 도르륵.
카운터 옆 가벽 안쪽 테이블에서 펜이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성진이 무심코 시선을 돌리자, 타블렛을 앞에 두고 앉아 있던 웬 처음 보는 여자가 입을 반쯤 벌린 채 자신을 빤히, 그것도 완전히 넋을 잃은 표정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뭐지.’
성진은 원필이 요즘 새롭게 만나기 시작했다던 사람이 혹시 저 사람인가 보다, 하고 뒤늦게 짐작했다.
성진이 그 짐작을 미처 정리하기도 전, 여자의 시선을 눈치챈 원필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여자의 표정을 확인한 순간, 원필의 눈빛이 살벌하게 돌변했다.
갑자기 원필이 다급하게 카운터를 돌아 나오더니, 자신이 정성껏 만들어둔 작고 수수한 꽃다발 대신 매장 한편에 디스플레이용으로 꽂혀 있던 거대한 붉은 장미 다발을 덥석 뽑아 들었다.
원필은 그 어마어마한 크기의 장미 다발을 성진의 품에 억지로 쥐여주고는, 성진의 양어깨를 두 손으로 꽉 잡아 문 쪽으로 180도 홱 돌려세웠다.
“야, 야, 김원필 와이라노? 먼데!”
당황한 성진이 얼결에 원필이 미는 대로 이끌려 갔다. 질투에 눈이 먼 원필의 힘이 상상을 뛰어넘는 것도 있었다.
“어, 형! 알았어. 형 마음 다 알았으니까! 꽃 세상에서 제일 빡세고 화려하게 만들어 놨으니까 고백 무조건 성공할 거야! 오늘 컨디션 관리해야지! 밥 잘 먹고 와, 형! 잘 가!”
철컥.
원필은 성진이 뭐라 항변할 틈도 주지 않고 그를 문자 그대로 가게 밖으로 밀어내고는 문을 잠가버렸다.
꽃집 밖에 덩그러니 남겨진 성진은, 제 품에 안긴 거대한 붉은 장미 다발과 닫힌 문을 번갈아 보며 헛웃음을 쳤다.
“아니 미친놈아. 내는 작고 수수한 걸로 해달라 캤는데…….”
부담 안 가지게 은은한 걸로 부탁해 놨건만. 안에 있던 여자가 자신을 쳐다본다는 이유로 아무 꽃이나 닥치는 대로 쥐여주고 내쫓아버린 동생의 만행에, 성진은 황당함에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만한 크기면 고백이 아니라 구애의 춤을 춰야 할 판이었다. 성진은 해가 조금 기울기 시작한 거리를 힐끗 보며 걸음을 재촉했다. 금요일 저녁 7시 반. 예약해둔 자리와 선결제까지 이미 끝나 있었고, 이제 남은 건 자신이 더 이상 이웃이라는 핑계 뒤로 숨지 않는 일뿐이었다.
저녁 6시, 1502호 작업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성진은 책상 한편에 떡하니 놓인 붉은 장미 다발을 한 번, 그리고 서랍에서 꺼내둔 흰색 엽서 몇 장을 한 번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젯밤의 일이 마음에 걸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 안에서 “저 그 약속 기다렸어요”라고 말하던 서하의 목소리가 계속 귓가에 남았다. 오늘 저녁을 피하는 것은 배려가 아니라, 또다시 겁이 나 도망치는 일일지도 몰랐다.
성진은 결국 의자에 앉아 펜을 들었다. 화려한 말을 쓰는 재주는 없었다. 다만, 그동안 숨겨온 마음만큼은 더 이상 돌려 말하고 싶지 않았다.
무뚝뚝한 이웃 남자의 치밀하고도 서툰, 금요일 저녁의 고백이 조용히 준비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