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새로 정한 룰
간밤의 폭풍 같은 눈물과 화해가 지나가고 맞이한 아침.
1501호의 거실 공기는 며칠간 짓누르던 먹먹함이 씻은 듯이 사라져, 맑고 투명했다.
성진은 평소처럼 아침 일찍 1501호로 건너와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커피 머신에서 기분 좋은 원두 향이 피어오르는 사이, 그는 싱크대에 기대서서 거실 작업대 앞에 앉은 서하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어젯밤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난 뒤라 피곤할 법도 한데, 서하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편안하고 개운해 보였다.
‘묻지 않고 선 넘지 않기. 결정은 무조건 한서하 대표님이.’
성진은 속으로 어제 세웠던 새로운 룰을 주문처럼 몇 번이나 되뇌었다. 수십 년간 몸에 밴 통제와 배려의 습관을 하루아침에 고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불쑥 손이 먼저 나갈 것 같아, 성진은 따뜻한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꽉 쥐며 스스로를 다잡았다.
“자, 이거면 어제 1차로 쳐낸 물량 검수는 다 끝났고요. 이제 패킹만 하면 되는데….”
서하가 스탠드 조명 아래서 돋보기를 벗으며 기지개를 켰다. 성진은 머그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서하의 작업대 쪽으로 다가왔다. 늘 그랬듯, 완성된 제품들을 상자에 담아 라벨을 붙이려는 참이었다.
성진의 커다란 손이 서하의 책상 위에 놓인 은색 체인과 완충재 쪽으로 뻗어 나가던 순간.
그의 손길이 허공에서 브레이크가 걸린 듯 멈칫했다.
“…….”
성진은 허공에 뜬 제 손과 서하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슬그머니 손을 뒤로 빼며 헛기침을 했다.
“서하 씨.”
성진이 뒷목을 가볍게 긁적이며, 짐짓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거, 내가 상자에 넣고 포장해도 됩니까? 아니면 서하 씨가 직접 리본 묶을 겁니까.”
그 뚝딱거리는 어설픈 물음에 서하의 입술 사이로 푸스스 웃음이 터져 나왔다.
물건 하나를 만지면서도 꼬박꼬박 결재를 받듯 허락을 구하는 이 커다란 남자의 노력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마치 주인의 ‘먹어’ 신호를 기다리며 꼬리를 흔드는 커다란 대형견 같았다.
“음, 상자 접고 완충재 까는 건 성진 씨가 해주세요. 대신 그 위에 제품 올리고 보증서 넣는 건 제가 할게요. 방향이 틀어지면 안 되거든요.”
“알겠습니다, 대표님. 지시하신 대로 하죠.”
서하의 명확한 업무 분장에, 성진이 그제야 안도한 듯 입꼬리를 올리며 맞은편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각자의 몫을 해내기 시작했다.
성진이 칼같이 각을 맞춰 상자를 조립해 넘겨주면, 서하가 그 안에 조심스럽게 목걸이를 담고 보증서를 덮었다. 일방적으로 성진이 다 치워주던 때보다 전체적인 속도는 조금 느려졌을지 몰라도, 묘한 안정감과 소속감이 두 사람 사이를 끈끈하게 채우고 있었다.
그때였다.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서하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화면에 뜬 발신자는 [H사 기획팀 파트장]이었다.
순간, 1501호의 거실에 옅은 긴장감이 돌았다. 며칠 전 성진이 서하를 대신해 이 전화를 받으면서 두 사람의 뼈아픈 갈등이 시작되었던, 바로 그 거래처의 번호였다.
성진의 손이 반사적으로 움직이려다, 이내 허벅지 위로 꽉 쥐어졌다. 서하의 일을 덜어주기 위해 본능적으로 움직이던 스스로를 애써 잠재우며, 그는 서하의 휴대폰 쪽으로 향하던 시선을 거두고 조용히 자신의 노트북 화면만을 응시했다.
서하는 그런 성진을 힐끗 보고는 가볍게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주저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파트장님. 한서하입니다.”
수화기 너머로 H사 파트장의 빠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대표님. 다름이 아니라 15일에 들어갈 초도 물량 입고 건 때문인데요. 저희 쪽 메인 물류 창고 공간이 지금 다른 기획전이랑 겹쳐서 꽉 차버렸습니다. 혹시 500개 물량을 한 번에 넣지 말고, 1차와 2차로 날짜를 쪼개서 납품해 주실 수 있을까요?
서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물류 동선을 쪼갠다는 건 그만큼 배차 일정을 두 번으로 다시 잡아야 하고, 포장된 상자들을 공방에 며칠 더 보관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일정이 밀리면 용달 비용이 두 배로 들 텐데. 이걸 우리가 부담해야 하나?’
어떻게 대답해야 자신들에게 손해가 아닐지, 당장 머릿속으로 계산이 서지 않아 서하가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옆에 앉아 있던 성진이 소리 없이 자신의 노트북 화면을 돌려 서하의 눈앞으로 쓱 밀어주었다.
화면에는 성진이 어제 미리 짜두었던 [플랜 B: 분할 납품 시 일정표] 엑셀 시트가 띄워져 있었다. 성진의 곧은 검지손가락이 화면의 한쪽을 톡톡 두드렸다. 그곳엔 ‘물류 보관 지연에 따른 배송비 차액 H사 부담 청구’라는 메모가 붉은색 글씨로 적혀 있었다.
서하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성진이 짚어준 화면을 보며 한결 차분하고 단단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분할 납품 가능합니다. 대신 일정이 쪼개지면서 발생하는 추가 용달 배차 비용은, 계약서상 명시된 대로 H사 측에서 부담해 주시는 조건으로 진행하겠습니다. 괜찮으시겠어요?”
아… 네, 네. 그렇게 하시죠. 어차피 저희 쪽 사정으로 딜레이 된 거니까요. 그럼 배차 비용 청구서도 나중에 같이 첨부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세부 일정은 정리해서 이따 메일로 다시 회신드리겠습니다.”
서하가 전화를 끊고 폰을 내려놓았다.
“와.”
서하가 크게 숨을 내쉬며 두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진짜 떨려 죽는 줄 알았네.”
그런 서하를 보며, 성진이 조용히 유리잔에 시원한 물을 따라 건넸다.
“잘했습니다. 아주 매끄럽던데요, 대표님.”
성진의 칭찬에 서하가 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활짝 웃었다.
“다 성진 씨가 옆에서 커닝 페이퍼 보여준 덕분이죠. 안 그랬으면 또 당황해서 ‘네, 알겠습니다’ 하고 배송비 다 떠안았을 거예요.”
“나는 화면만 띄워줬고, 협상하고 결정 내린 건 온전히 서하 씨였습니다.”
성진은 무심히 상자를 접으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 순간 서하는 깨달았다.
내 뒤에 이토록 유능하고 똑똑한 사람이 버티고 서 있다는 것이, 결코 내 자리를 지워버리거나 뺏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오히려 그 든든한 등대 덕분에, 나는 더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내 브랜드를 책임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진짜 고마워요, 성진 씨.”
“고맙다는 말 대신, 점심에 짬뽕이나 한 그릇 사주이소. 상자 접었더니 허기지네요.”
“콜. 탕수육도 대자로 사줄게요.”
한 시간 뒤, 1501호 거실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해물 짬뽕 두 그릇과 바삭한 탕수육이 차려졌다.
서하는 탕수육을 소스에 푹 찍어 성진의 앞접시에 놓아주며 기분 좋게 웃었다.
“아까 전화 끊고 나니까, 나 진짜 대표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고요.”
“대표 맞잖습니까.”
“아니, 명함에만 적힌 대표 말고 진짜 CEO요. 옆에서 이렇게 똑똑한 비서실장이 알아서 플랜 B 엑셀까지 딱딱 띄워주는데, 완전 성공한 사업가 느낌이랄까?”
서하의 장난스러운 비유에 짬뽕 국물을 떠먹던 성진이 피식 웃었다.
“비서실장 월급이 고작 짬뽕 한 그릇입니까. 노동 착취가 너무 심한데.”
“대신 평생 고용 보장해 줄게요. 어때요, 괜찮은 조건이죠?”
젓가락을 쥐고 있던 성진의 손이 잠시 멈췄다. ‘평생’이라는 단어가 주는 묵직하고 달콤한 무게감에 그의 짙은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예. 평생 계약, 콜입니다. 대신 악덕 업주가 되지 않게 내가 옆에서 잘 감시해야겠네요.”
두 사람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얼큰한 짬뽕 냄새와 섞여 거실을 따뜻하게 채웠다.
여전히 서로의 타이밍을 맞추느라 조금 서툴고 어색한 부분도 있었다. 성진은 몇 번이나 나서려던 본능을 참아내야 했고, 서하는 홀로 서기 위해 조금 더 어깨에 힘을 줘야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제 정확히 알고 있었다.
서로의 세계를 침범하지 않고도, 완벽하게 기댈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방식을 찾아냈음을.
은선이 부딪히는 맑은 금속 소리와, 마우스가 딸깍거리는 소리가 평화롭게 거실의 공기를 가르고 섞였다. 오피스텔 1501호는 더 이상 고단하고 외로운 1인 공방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함께 나누어 가진, 세상에서 가장 견고하고 따뜻한 요새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