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문이 닫힌 뒤
1501호에 사람이 들어왔다
현관문이라는 물리적 경계가 사라진 연인에게, 서로의 집을 오가는 일은 아주 빠르고 자연스럽게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문이 닫힌 둘만의 공간 안에서, 두 사람의 물리적 거리 역시 시간의 흐름과 함께 서서히 좁혀지고 있었다.
어느 주말 저녁, 1502호 거실.
저녁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나란히 소파에 앉아 넷플릭스로 영화를 보고 있었다. 처음 이 집에 초대받았을 때만 해도 서로 멀찍이 떨어져 앉아 탄산수만 축내던 서하였다.
하지만 지금 서하의 등은 아주 자연스럽게 성진의 넓은 가슴팍에 기대어져 있었고, 성진의 한쪽 팔은 서하의 어깨를 편안하게 감싸 안고 있었다.
화면 속 영화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가고 있었지만, 성진의 시선은 자꾸만 제 품에 안긴 서하의 정수리로 향했다. 좋은 향기가 났다. 성진은 서하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손을 느릿하게 움직여, 그녀의 팔을 타고 내려가 작은 손을 찾아 쥐었다.
단단하고 마디 굵은 손가락이 서하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들며 빈틈없이 깍지를 꼈다. 서하가 영화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깍지 낀 성진의 손등을 제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문질렀다.
성진은 그 작은 간지럼에 픽 웃으며, 깍지 낀 두 손을 들어 올려 서하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촉, 하는 부드러운 소리와 함께 서하가 고개를 돌려 성진을 올려다보았다.
“영화 재미없어요?”
“아니요.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성진은 태연하게 대답하며 서하의 뺨에 다시 한번 짧게 입을 맞췄다. 서하는 간지러운 듯 작게 웃으며 성진의 품으로 조금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편안함과 설렘이 완벽한 비율로 섞인, 더없이 달콤한 주말의 온도였다.
며칠 뒤, 평일 밤 11시. 1501호.
거실 작업대에서 돋보기를 낀 채 작은 펜던트와 씨름하고 있던 서하의 등 뒤로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아직도 안 끝났습니까.”
성진이 무심한 목소리로 물으며 다가왔다. 그는 작업대 옆에 서서 서하가 하는 양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불쑥 커다란 손을 뻗어 서하의 굽은 등 한가운데를 짚었다.
“……자세.”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묵직한 체온과 힘에 서하가 반사적으로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그렇게 구부리고 하면 허리 다 나간다고 몇 번을 말합니까.”
성진은 서하의 등을 받쳐준 채로, 다른 한 손을 뻗어 의자 뒤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쿠션을 가져왔다. 그러고는 서하의 허리 뒤쪽으로 쿠션을 단단하게 받쳐주었다.
아주 자연스럽고 실용적인 개입이었다. 하지만 서하의 등 뒤로 바짝 다가와 허리춤을 만지는 그의 움직임에, 서하는 침을 삼키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졌다.
“목도 한 번 돌리이소. 뻣뻣하게 굳었네.”
성진의 큰 손이 이번엔 서하의 뒷목으로 올라왔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뻐근하게 뭉친 서하의 목덜미와 어깨선을 지그시 눌러 내렸다. 악력은 적당히 강했고, 손길은 다정했다. 서하가 참지 못하고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뒤로 젖히자, 성진의 탄탄한 배 위로 그녀의 정수리가 툭 닿았다.
“아, 진짜 시원해요….”
“시원할 게 아니라,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무식하게 참지 말라는 소립니다.”
성진의 타박 섞인 목소리가 서하의 정수리 바로 위에서 떨어졌다.
그가 서하의 목덜미를 주무를 때마다, 반팔 티셔츠 아래로 드러난 단단한 팔뚝이 서하의 뺨을 스칠 듯 말 듯 아른거렸다. 거실에는 시계 초침 소리와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고요하게 내려앉았다.
성급하게 분위기를 잡으려는 의도는 조금도 없어 보였다. 그저 연인의 아픈 곳을 살피는 당연하고 지극히 실용적인 다정함이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 통제된 다정함이 서하를 속수무책으로 긴장하게 만들었다.
가벼운 스킨십에는 제법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피부에 직접 닿아오는 성진의 묵직한 체온은 또 다른 차원의 아찔한 긴장감을 몰고 왔다.
그리고 다시 며칠 뒤, 금요일 밤.
종일 외부 스튜디오에서 편곡 수정과 미팅 일정을 소화한 성진이 15층으로 올라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는 자신의 집인 1502호 대신, 아주 자연스럽게 1501호의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렀다.
‘삐리릭- 철컥.’
“어, 성진 씨. 왔어요?”
거실에서 노트북으로 시안을 정리하던 서하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서하의 시선이 성진에게 닿는 순간, 그녀는 하마터면 마우스를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
오늘 외부 일정이 꽤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자리였던 모양이었다. 평소의 편안한 차림은 온데간데없고, 몸에 딱 떨어지는 짙은 투버튼 자켓에 넥타이까지 맨 단정한 정장 차림이었다. 피곤한 눈가에는 얇은 반테 안경이 얹혀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고 서하의 심장을 덜컹거리게 만들었던 바로 그 차림새였다.

단정하게 각이 잡힌 성진 특유의 서늘한 분위기가, 1501호의 따뜻한 거실 공기를 단숨에 압도했다.
“오늘 엄청 피곤해 보이네요.”
“말도 마이소. 종일 시달렸더니 기가 다 빨리네.”
성진은 넥타이 매듭을 느슨하게 끌어내리며 서하의 작업대 쪽으로 다가왔다. 늘 맡던 그의 우디 향이 오늘따라 정장 원단의 빳빳한 냄새와 섞여 훨씬 짙고 성숙하게 느껴졌다.
“오늘 새로 나온 믹싱본 있는데. 들어볼랍니까.”
“아, 들을래요!”
성진은 주머니에서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음원을 재생하고는, 목에 걸고 있던 헤드폰을 벗어 서하에게 다가왔다.
“자요.”
헤드폰을 그냥 손에 건네줄 줄 알았는데, 성진은 허리를 숙여 서하의 양 귀에 직접 헤드폰을 씌워주었다. 그가 몸을 숙이자, 셔츠 너머로 느껴지는 그의 넓은 어깨와 가슴팍이 서하의 얼굴 앞으로 훅 다가왔다.
헤드폰의 이어패드를 서하의 귀에 맞춰 조절하는 동안, 성진의 팔이 서하의 뺨을 스치고 그의 따뜻한 숨결이 서하의 이마 언저리에 희미하게 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음량 괜찮습니까.”
“아… 네. 괜찮아요.”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지만, 서하의 귓가에는 음악보다 더 크게 요동치는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만이 가득 찼다.
헤드폰을 씌워준 성진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서하가 앉은 의자 팔걸이에 한 손을 짚은 채 비스듬히 몸을 숙여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서하가 침을 꼴깍 삼켰다. 너무 가까웠다.
성진은 서하의 떨리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짚지 않은 반대쪽 손을 들어 올려, 피곤한 듯 자신의 눈가에 얹혀 있던 반테 안경을 천천히 벗어냈다.
‘스윽-’
안경다리가 접히는 미세한 금속 소리와 함께, 그가 안경을 책상 위로 무심히 내려놓았다. 안경이라는 얇은 막 하나가 사라지자, 그의 깊고 진한 눈동자가 한 치의 여과도 없이 서하를 똑바로 옭아맸다.
서하는 헤드폰 너머로 흐르는 차분한 곡의 템포와 달리,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짜릿한 떨림에 숨을 죽였다.
“서하 씨.”
성진이 음악 소리를 뚫고 들어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나지막이 불렀다.
그의 시선이 서하의 눈에서 시작해, 살짝 벌어진 입술로 느리게 미끄러졌다.
가볍게 손을 잡고 영화를 보던 주말 저녁, 허리에 쿠션을 받쳐주고 목덜미를 주물러주던 다정함. 그 시간 동안 차곡차곡 쌓여온 모든 스킨십의 밀도가, 단숨에 짙고 노골적인 분위기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성진의 커다란 손이 서하의 뺨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일, 내일 아침에 마저 하면 안 됩니까.”
애원도, 명령도 아닌 지극히 나른하고 낮게 깔린 목소리.
“……왜요?”
서하가 헤드폰을 쓴 채 홀린 듯이 되물었다. 성진이 서하의 뺨을 감싼 손에 조금 더 힘을 주며, 입술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짙게 속삭였다.
“나 더 이상 얌전히 기다려줄 인내심이 안 남아서요.”
헤드폰 속에서 곡의 하이라이트가 터져 나옴과 동시에, 성진의 입술이 서하의 입술 위로 무겁고 깊게 겹쳐졌다.
닫힌 1501호의 문 안쪽.
시간을 두고 조심스럽게 쌓아 올린 두 사람의 진짜 연애가, 마침내 일상의 모든 빈틈을 지우며 완벽하고도 아찔하게 얽혀드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