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서랍 속 엽서
1501호의 거실은 무겁고 탁한 공기로 가라앉아 있었다.
며칠 전, 비타민 상자를 두고 벌어졌던 서늘한 대화 이후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서로의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출퇴근 시간에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쳐도, 짧고 건조한 목례만이 오갈 뿐이었다. 서하를 향하던 성진의 그 다정하고 맹목적이던 시선은 거두어졌고, 서하 역시 차마 그를 붙잡지 못한 채 도망치듯 집 안으로 숨어들기 일쑤였다.
주말 오후. 서하는 엉망이 된 마음을 다잡기 위해 억지로 몸을 움직여 대청소를 시작했다. 바닥을 닦고 작업대 위의 은선들을 정리하던 서하는, 오랫동안 열어보지 않았던 책상 맨 아래 칸의 깊은 서랍을 열었다. 안 쓰는 부자재와 예전 스케치 노트들을 정리할 참이었다.
서랍 안쪽의 잡동사니들을 덜어내던 서하의 손이 어느 순간 멈칫했다.
낡은 스케치 노트 밑에 소중하게 눌려 있던, 작은 흰색 무지 봉투 하나가 눈에 띄었다.
고백받던 날, 성진이 그 거대한 붉은 장미 다발과 함께 뚝딱거리며 건네주었던 바로 그 엽서였다.
그날 밤 침대 위에서 수십 번도 넘게 읽고 또 읽으며, 행여나 구겨질까 봐 가장 안전한 서랍 깊숙한 곳에 보관해 두었던 기억이 났다. 그 후로 H사 콜라보 프로젝트 준비에 치이느라 한동안 까맣게 잊고 지내던 물건이었다.
서하는 홀린 듯 봉투를 꺼내어 열었다. 안에는 성진 특유의 반듯하고 힘 있는 글씨체로 빼곡하게 적힌 엽서가 들어 있었다.
[서하 씨.
이 거추장스럽게 큰 꽃을 보고 서하 씨가 웃을지, 부담스러워할지 모르겠네요.
이 엽서도 어떻게 전해줘야 할지 몰라서, 바보같이 한참을 망설이다 적어봅니다.
사실 나는 늦은 밤, 1501호 작업대 앞에서 온전히 자기만의 세계를 지켜내는 서하 씨의 단단한 뒷모습을 참 좋아했습니다. 혼자 끙끙대면서도 타협하지 않는 걸 보며, 참 맑고 곧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서하의 시선이 글씨 위에서 잠시 멈췄다. 처음 이 엽서를 읽었을 때는 그저 자신을 향한 달콤한 애정 표현에 가슴이 설레기만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서하 씨는 늘 남한테 폐 끼치는 걸 미안해하고, 뭐든 혼자 감당하려 애쓰는 사람이니까요. 내 다가감이 서하 씨가 지켜온 그 소중한 세계에 부담이나 짐이 될까 봐 꽤 오래 망설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혼자 들기 버거운 것들, 내 쪽으로 조금은 넘겨주면 좋겠습니다. 나는 무뚝뚝하고 챙기는 방식도 투박해서, 가끔은 내 앞선 호의가 서하 씨를 피곤하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미안하다며 얼버무리고 숨지 말고, 내 방식이 마음에 안 들거나 버거울 땐 언제든 나한테 솔직하게 말해주십시오. 혼자 판단하고 벽 세우지 말고, 안 괜찮을 땐 안 괜찮다고 편하게 화내고 기대주십시오.
기꺼이 서하 씨가 딛고 쉴 수 있는 튼튼한 바닥이 되겠습니다.]
마지막 문장을 읽어 내려간 순간, 서하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툭, 하고 엽서 위로 떨어졌다. 서하는 엽서를 가슴에 꽉 품은 채 소리 없이 오열했다.
성진은 처음부터 서하의 성향을 완벽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신세를 지면 미안해하고, 기어이 혼자 짐을 짊어지려 하는 그녀의 그 견고한 독립성. 그가 내밀었던 거대한 엑셀 표와 단호한 업무 처리들은, 그녀의 세계를 빼앗으려는 게 아니라 그저 그 무거운 짐을 자기가 대신 들어주고 싶었던 투박하고 맹목적인 애정일 뿐이었다.
서하는 젖은 얼굴을 두 손에 묻었다.
H사 미팅에서 느꼈던 소외감, 자신의 몫이 줄어드는 것 같아 숨이 막혔던 그 불편한 감정들은 분명 진짜였다. 그것은 창작자로서 느낄 수밖에 없는 당연한 서운함이었다.
문제는 그 서운함을 ‘말하는 방식’에 있었다.
서하는 성진의 앞선 배려가 벅차고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대신, 옹졸하게 선을 긋고 도망쳤다. 짐이 되기 싫다는 핑계로, 미안하다는 변명으로, 그가 갈아 넣은 진심을 ‘부채’로 깎아내려 쿠션과 비타민으로 정산해버리려 했다.
‘미안하다며 얼버무리고 숨지 않기. 혼자 판단하고 벽 세우지 않기.’
수개월 전, 그가 엽서에 적어두었던 이 간절한 부탁을 가장 잔인하게 깨버린 것은 다름 아닌 서하 자신이었다. 혼자 판단하고, 혼자 상처받고, 혼자 벽을 세워버린 끔찍한 미성숙함. 서하는 자신의 그 지독한 방어기제가 성진에게 얼마나 깊은 상실감을 안겨주었을지 비로소 뼈저리게 깨달았다.
“진짜 바보 같아, 한서하…….”
서하는 소매로 눈물을 벅벅 닦아냈다.
이대로 숨어있을 수는 없었다. 상처받은 것이 사실이라면,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했다. 빚을 갚듯 물건을 내미는 것이 아니라, 솔직하게 마음을 열고 부딪히는 것이 성진의 그 거대한 다정함에 대한 유일한 예의였다.
서하는 꽉 쥐어 구겨진 엽서를 소중하게 펴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느덧 해가 져 어둑해진 15층 복도.
서하는 1502호의 닫힌 철문 앞에 섰다. 당장이라도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고 싶었지만, 서하의 손은 허공에서 잠시 맴돌았다. 이 문 너머에 있을, 상처받은 얼굴의 그를 마주할 용기가 필요했다.
서하는 꽉 쥔 주먹에 힘을 주며, 비밀번호 패드 대신 천천히 손을 뻗어 초인종의 벨을 눌렀다.
‘띵동-’
잠시 후, 굳게 닫혀 있던 1502호의 문이 열리며 성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밀번호를 누르는 대신 굳이 초인종을 누른 서하의 행동에, 성진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스쳤다. 하지만 그 당혹감의 밑바닥에는 사실 며칠 전부터 켜켜이 쌓여온 짙은 불안이 자리하고 있었다.
최근 며칠 동안 성진의 하루는 얇은 살얼음판 같았다. 서하는 눈에 띄게 그를 피하는 것 같았고, 마주 보며 웃어주는 타이밍은 늘 한 박자 늦었으며, 옆에 나란히 앉아 있어도 마음은 저 멀리 한 발짝 물러서 있는 듯한 서늘한 거리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서하 씨.”
성진의 부름에 서하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가득 고여 붉게 짓무른 눈가, 그리고 손에 무언가를 꽉 움켜쥔 채 잔뜩 긴장한 모습.
“성진 씨. 나, 진지하게 할 말이 있어요.”
평소와 달리 몹시 진지하고 무거운 서하의 첫마디에 성진의 어깨가 일순간 돌처럼 굳어졌다.
성진은 애써 입술을 꾹 다물며 무표정하고 차분한 얼굴을 유지하려 애썼다. 하지만 무뚝뚝해 보이는 그 고요한 표정 뒤로, 성진의 심장은 바닥 없는 낭떠러지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혹시, 그만하자는 건가.’
견고했던 1502호 남자의 마음속에, 이별을 통보받을지도 모른다는 생전 처음 겪어보는 새파란 공포가 덮쳐오고 있었다.
피하고 얼버무리던 핑계의 시간을 끝내고 기꺼이 서로의 세계를 부딪치려는 서하의 용기 있는 첫 노크였지만, 문을 연 성진에게는 그 어떤 통보보다 두려운 밤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