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자꾸 손이 가는 사람
1501호에 사람이 들어왔다
이사 후 며칠이 지났다. 1501호 앞을 가득 채우고 있던 종이 상자들은 자취를 감췄고, 복도는 다시 본래의 정적을 되찾은 듯했다. 하지만 성진의 일상에는 미세한 변화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이를테면, 출근 시간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치는 인기척 같은 것들.
“잠시만요! 탑니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막 올랐을 때였다. 닫힘 버튼을 누르려던 성진의 시야로, 복도 코너를 황급히 돌아오는 1501호 서하의 모습이 들어왔다.
성진은 말없이 열림 버튼을 길게 누르고 섰다. 서하는 품에 투명한 플라스틱 트레이와 작은 부자재 상자 두어 개를 아슬아슬하게 겹쳐 안고 있었다.
“감사합니… 앗!”
다급하게 엘리베이터 안으로 뛰어들던 서하의 발끝이 문틀에 살짝 걸렸다. 몸이 휘청이는 것과 동시에, 맨 위에 올려져 있던 얕은 부자재 상자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투둑- 바스락!’
투명한 비닐에 낱개 포장된 수십 개의 시계용 가죽 스트랩들이 엘리베이터 바닥으로 흩어졌다. 서하의 입에서 “아우, 진짜!” 하는 작고 현실적인 탄식이 터져 나왔다.
“죄송해요, 제가 금방 주울게요.”
서하가 서둘러 쪼그려 앉아 바닥에 흩어진 가죽 스트랩들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성진은 조용히 열림 버튼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반대쪽 무릎을 굽혀 바닥에 앉았다. 큼지막한 손이 바닥을 훑자, 비닐에 싸인 가죽 밴드들이 단숨에 한 움큼씩 모여들었다. 자잘한 부속품이었다면 애를 먹었겠지만, 성진의 크고 다부진 손에는 오히려 수월하게 쥐어지는 모양새였다.
“아, 안 도와주셔도 되는데….”
“도우면 더 빨리 줍겠지 않습니꺼”
무심한 대답이었다. 성진은 서하의 상자에 스트랩들을 털어 넣으며, 상자의 헐거운 뚜껑을 눈짓했다.
“이런 거 들고 탈 때는, 다음부터 뚜껑 테이프로 한번 감으이소. 엎으면 수습하기 힘듭니다.”
그 짧은 순간에도 성진의 입에선 실용적인 잔소리와 함께 부산 억양이 툭 튀어나왔다. 서하는 바닥을 더듬던 손을 멈추고 성진을 올려다보았다. 퉁명스러운 말투 같았지만, 구석에 남은 물건이 없는지 엘리베이터 안을 살피는 시선은 꼼꼼했다.
“저, 이사 온 지 며칠 안 됐는데 아침부터 엄청 혼나는 기분인데요.”
서하가 민망한 듯 코끝을 찡긋하며 웃음 섞인 농담을 던졌다. 그 말에 성진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아침부터 남의 일에 너무 간섭했나 싶어 또 머쓱해진 탓이었다.
“혼내는 거는 아이고요.”
성진은 짧게 변명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하 2층 주차장에 도착했다는 알림음이 울렸다.
문이 열리자, 성진은 자연스럽게 서하가 들고 있던 투명 트레이의 한쪽 모서리를 쥐었다. 무언의 '들고 가 줄 테니 앞장서라'는 신호였다.
“어? 진짜 괜찮은데.”
“어딥니까, 차.”
서하가 주춤거리다 결국 “저쪽 기둥 뒤요” 하고 앞장섰다. 성진은 트레이를 나눠 든 채 보폭을 늦춰 그녀의 걸음에 맞췄다. 트레이 안에는 정밀한 세공 공구들과 다양한 굵기의 가죽끈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현관에서 애를 먹던 그 거울 상자도 그렇고, 예사 짐들은 아니었다.
“가죽이나 금속 공예 하십니까.”
“아, 네. 작은 주얼리 공방 하고 있어요. 오늘은 납품할 게 좀 있어서 짐이 많네요.”
서하의 대답에 성진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첫날 열린 문틈으로 보았던 반듯한 작업대가 떠올랐다. 물건을 떨어뜨리고 덤벙대는 생활의 허당기와, 오차 없는 정밀함을 요구하는 직업 사이의 간극이 묘하게 흥미로웠다.
서하의 흰색 소형차 트렁크에 짐을 마저 실어준 성진이 손을 털며 물러섰다.
“오늘도 진짜 감사합니다. 제가 저녁에 문 앞에 뭐 좀 둘게요.”
서하가 트렁크를 닫으며 말했다. 성진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
“안 주셔도 됩니다. 같은 층인데 뭐 할 때마다 그러시면 서로 피곤합니다.”
“그냥 감사하다고만 하면 제가 마음이 불편해서요. 부담스러운 거 아니니까 거절하지 마세요.”
단호하지만 웃음기 밴 목소리. 신세를 지고는 못 배기는, 자기 몫의 성의는 반드시 표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임이 분명했다. 성진은 길게 실랑이하는 것도 피곤해 짧게 한숨을 쉬었다.
“…마음대로 하이소. 출근 잘하시고요.”
“네, 성진 씨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멀어지는 차의 뒷모습을 보며, 성진은 목 뒤를 한 번 쓸어내렸다. 이상하게 자꾸 손이 가는 이웃이었다.
그날 밤.
작업실에서 곡 스케치를 마치고 자정이 다 되어서야 귀가한 성진은, 1502호 도어락 위 문고리에 걸린 작은 종이봉투를 발견했다.
봉투 안에는 개별 포장된 드립백 커피 세 개와 무화과가 박힌 작은 파운드케이크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반듯한 글씨가 적힌 작은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성진은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앞니 두 톨이 살짝 드러나는, 민망할 때나 어이없을 때 나오는 그만의 조용한 웃음이었다. 드립백의 향을 맡아보니 그가 평소 즐겨 마시는 산미가 튀지 않고 묵직한 바디감에 견과류와 다크초콜릿 향이 도는 원두였다.
“취향이 좋은 건지, 우연인 건지.”
성진은 봉투를 식탁에 올려두며 중얼거렸다. 어쨌든 기분 좋은 우연이었다.
두 사람의 마주침은 그 뒤로도 예고 없이, 그러나 생활의 동선 안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며칠 뒤 저녁, 1층 분리수거장.
쓰레기를 버리러 내려온 성진은 분리수거장 한구석에서 낑낑대고 있는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했다. 서하였다. 그녀는 겹겹이 두꺼운 테이프가 발린 커다란 택배 박스를 맨손으로 뜯어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아, 이거 왜 이렇게 안 뜯어져.”
박스와 씨름하는 그녀를 보며, 성진은 조용히 주머니에서 작은 커터칼을 꺼냈다. 작업실에서 케이블을 정리하거나 박스를 뜯을 때 늘 바지 주머니에 넣어두고 다니는 물건이었다.
“손톱 다 상합니다.”
뒤에서 들려온 낮고 차분한 목소리에 서하가 흠칫 놀라 돌아보았다. 성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녀의 발치에 쪼그려 앉아, 박스 모서리를 따라 커터칼을 부드럽게 그어 내렸다. '찌익-'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질긴 테이프가 단숨에 갈라졌다.
“어? 언제 오셨어요? 아, 또 걸렸네.”
“뭘 또 걸렸다고…… 이거 그냥 손으로 뜯으면 박스에 살점 베입니다.”
성진은 능숙하게 박스를 납작하게 밟아 접으며 덧붙였다. 툭툭 던지는 직설적인 말씨였지만, 그 속에는 타인이 다칠지도 모른다는 생활형 걱정이 배어 있었다. 서하 역시 그 결을 눈치챘는지,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멋쩍게 웃으며 다른 박스를 끌어왔다.
두 사람은 분리수거장 구석에 나란히 쪼그려 앉아, 말없이 박스들의 테이프를 제거하고 평평하게 접었다. 묘하게 죽이 잘 맞는 단순 노동이었다.
다음 날 3층 헬스장.
성진이 땀에 젖은 수건을 목에 두르고 러닝머신에서 내려왔을 때였다. 웨이트 존 한구석에서 서하가 레그 익스텐션 머신의 무게 조절 핀을 뽑지 못해 쩔쩔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심지어 그녀의 왼쪽 운동화 끈은 길게 풀려 바닥에 끌리고 있었다.
성진은 물병을 집어 들고 천천히 그녀 쪽으로 걸어갔다.
“안 빠집니까.”
갑작스러운 성진의 등장에 서하가 화들짝 놀라 손을 뗐다.
“아, 네. 이거 핀이 꽉 끼어서 안 움직여서요.”
성진은 머신 쪽으로 허리를 숙여, 핀을 살짝 위로 들어 올리는 동시에 가볍게 뽑아냈다. 힘으로 당기는 게 아니라 기구의 유격을 이용하는 요령이었다.
“기구가 낡아서 각도 안 맞추면 뻑뻑합니다. 그리고,”
성진이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턱끝으로 그녀의 발을 가리켰다.
“신발 끈부터 묶으이소. 그러다 밟고 머신에 부딪히면 크게 다칩니다.”
단호한 목소리에 서하가 황급히 쪼그려 앉아 신발 끈을 단단히 묶었다. 성진은 그녀가 끈을 다 묶고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기 자리로 무심히 돌아갔다.
서하는 땀방울이 맺힌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성진의 넓은 등판을 바라보았다.
'완전 잔소리 대마왕이네.'
그런데 이상했다. 그 직설적이고 무뚝뚝한 잔소리가 묘하게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어린애나 수동적인 존재로 취급하지 않고 오직 '안전'이라는 목적만을 위해 개입했다 빠지는 그 깔끔한 태도가 신뢰감을 주었다.
그날 밤 1501호.
거실 한가운데, 유난히 반듯하고 깨끗하게 정돈된 작업대에 앉은 서하는 핀셋으로 은색 체인을 연결하고 있었다. 세밀하고 오차 없는 작업의 연속. 집중할 때면 평소의 덤벙대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눈빛이 예민하게 가라앉았다.
작업을 1차로 마무리한 서하가 기지개를 켜며, 책상 한구석에 놓인 작은 메모장을 끌어당겼다. 스케치나 잊지 말아야 할 재고 목록을 적어두는 수첩이었다. 그녀는 펜을 들어 그 맨 아랫줄에 작게 끄적였다.
* 1502호, 분리수거랑 헬스장. 또 도움받음. (다음엔 내가 뭐라도 꼭 돕기!)
같은 시각 1502호.
성진은 서하가 며칠 전 문고리에 걸어두었던 드립백 중 마지막 하나를 뜯어 뜨거운 물을 붓고 있었다. 김이 피어오르며 익숙하고 고소하고 묵직한 커피 향이 주방을 채웠다.
커피가 추출되기를 기다리며, 성진의 시선이 책상 위 영수증 트레이에 닿았다. 거기에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라고 적힌 서하의 첫 번째 메모가 여전히 붙어 있었다.
성진은 머그잔의 따뜻한 온기를 손바닥으로 느끼며, 코너를 돌면 나오는 앞집의 닫힌 문을 한 번 상상해 보았다.
'부담스럽게 하지 않는다.'
그것이 성진이 타인을 대하는 가장 기본적인 선이자 원칙이었다. 서하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세를 지면 갚고,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다정함을 잃지 않는 사람.
성진은 완성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눈썹 사이를 작게 눌렀다. 이 건조한 15층 복도에, 꽤 괜찮은 이웃이 생겼다는 잔잔한 안도감. 지금은 딱 그 정도의 생활감이 두 사람의 문 사이를 채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