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1호에 사람이 들어왔다
17화. 조금 큰 제안

17화. 조금 큰 제안

평범하던 목요일 저녁, 1501호.

노트북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서하의 입에서 작고 떨리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어떡해….”

서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가, 이내 마우스를 쥔 손을 바들바들 떨며 화면을 아래로 내렸다. 메일함에 도착한 발신자는 최근 2, 30대 사이에서 가장 트렌디하기로 소문난 대형 쇼핑 플랫폼, H사였다.

다가오는 가을 시즌, H사의 쇼핑 플랫폼에서 서하의 공방 이름으로 단독 협업 라인을 선보이자는 공식 제안서였다.

“진짜, 미쳤다.”

서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거실을 뱅글뱅글 돌았다. 1인 공방을 운영하는 서하에게 이런 대형 쇼핑 플랫폼과의 협업은 꿈에 그리던 기회이자, 공방의 가치를 단숨에 끌어올릴 수 있는 엄청난 도약의 발판이었다.

‘삐리릭- 철컥.’

그때,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와 함께 성진이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서하가 좋아하는 동네 베이커리의 식빵 봉투가 들려 있었다.

“저녁은 묵….”

“성진 씨!”

성진이 채 인사를 끝내기도 전에, 서하가 후다닥 달려와 그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성진이 흠칫 놀라며 들고 있던 빵 봉투를 치켜들었다.

“뭐, 뭡니까. 무슨 일 있어요?”

“나 방금 메일 받았는데, 진짜 대박 났어요! H사 알죠? 거기 쇼핑 플랫폼에서 가을 시즌 콜라보 제안 들어왔어요!”

서하가 성진의 품에서 고개를 쏙 빼고 환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성진은 그제야 영문을 알겠다는 듯, 긴장을 풀고 커다란 손으로 서하의 등과 머리칼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H사면 엄청 큰 데 아닙니까. 와, 우리 서하 씨 진짜 출세했네. 축하합니다. 고생한 보람이 있네요.”

성진의 진심 어린 축하에 서하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뻐하며 성진의 옷자락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진짜 너무 좋아서 심장 터질 것 같아요. 디자인 스케치해 둔 거 엄청 많은데, 당장 오늘부터 샘플 만들어 봐야겠어요.”

서하가 방방 뛰며 노트북 앞의 의자에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성진은 빵 봉투를 식탁에 올려두고, 서하의 의자 옆으로 다가와 섰다.

“어디, 제안서 한 번 봐도 됩니까.”

“네! 여기요. 수량도 장난 아니에요.”

서하가 들뜬 목소리로 화면을 가리켰다. 성진은 허리를 약간 숙여 노트북 화면 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처음 메일을 읽어 내려갈 때만 해도 성진의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메일의 스크롤이 아래로 내려가고 구체적인 계약 조건과 일정이 적힌 첨부파일이 열리자, 성진의 짙은 눈썹이 서서히 밑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여자친구의 성과를 기뻐하던 다정한 남자의 얼굴은 사라지고, 수많은 앨범과 프로젝트를 통제하고 기획해 온 냉철한 '메인 프로듀서'의 눈빛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서하 씨.”

성진의 목소리가 한층 낮고 진지해져 있었다.

“이거 납기일이 다음 달 15일로 되어 있는데. 디자인 컨펌 기간 빼고 부자재 발주 넣고 나면, 순수하게 제작할 수 있는 시간이 2주 남짓입니다.”

“네? 아… 그렇네요. 일정이 좀 빠듯하긴 하다.”

“빠듯한 정도가 아닙니다. 초기 발주 물량만 500갠데, 이거 서하 씨 혼자 하루에 열 시간씩 꼬박 매달려도 날짜 못 맞춥니다. 게다가 패킹은 어쩌고요.”

성진의 빠르고 정확한 지적에, 디자인 생각만으로 부풀어 있던 서하의 머릿속이 단숨에 차가운 현실로 끌려 내려왔다.

성진은 마우스를 쥐고 계약서의 다른 조항들을 빠르게 훑어내렸다. 그의 마디 굵은 손가락이 쉴 새 없이 마우스 휠을 굴렸다.

“단가 책정도 너무 타이트합니다. 포장 패키지 비용은 H사 측에서 부담하는 건지, 아니면 이 납품가에 포함된 건지 명시가 안 되어 있어요. 불량 반품이나 CS(고객 응대) 책임 소재도 서하 씨 공방 쪽으로 떠넘겨진 조항이 보이고요.”

“어… 그건 제가 제대로 못 봤어요.”

서하가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좋은 기회라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져 미처 세세한 실무적인 맹점들을 파악하지 못한 탓이었다.

순식간에 눈앞에 쌓인 거대한 현실의 무게에 서하가 기가 죽어 어깨를 움츠렸다.

“이거… 제가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 벅찬 일일까요? 그냥 거절해야 하나….”

서하가 시무룩하게 중얼거리자, 화면에 고정되어 있던 성진의 시선이 그제야 서하에게로 향했다. 성진은 기죽은 서하를 보더니, 이내 작게 한숨을 쉬며 서하의 뺨을 다정하게 감싸 쥐었다.

“누가 거절하랍니까. 이렇게 좋은 기회를 왜 날려요.”

“그치만, 성진 씨 말 들어보니까 혼자서 기한도 못 맞출 것 같고….”

“혼자서 못 맞추면, 같이 맞추면 되죠.”

성진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초기 물량 제작할 때 손 많이 가는 단순 부자재 연결이나 패킹은 내가 밤새서라도 다 해줄 겁니다. 일정은 내가 어떻게든 뺄 테니까, 수량 걱정은 하지 마이소.”

그의 덤덤하지만 바위처럼 단단한 약속에 서하의 두 눈이 다시금 커졌다.

“그리고 이런 대형 플랫폼 회사들은 원래 첫 제안서에 자기들 유리한 조건만 잔뜩 걸어놓습니다. 쫄 거 하나도 없어요. 서하 씨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서 먼저 연락 온 건데, 우리가 굽히고 들어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성진은 서하의 손에서 마우스를 넘겨받았다.

“일단 메일 답장부터 다시 씁시다. 납기일은 퀄리티 유지를 위해서 무조건 일주일 뒤로 미루자고 못 박고, 패키지 비용은 따로 청구하겠다고 확실하게 짚어둬야 합니다. 메일 문구, 내가 좀 다듬어 줘도 됩니까.”

“네. 네! 당연하죠.”

서하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자, 성진이 키보드 위에 두 손을 올리고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망설임 없이 적혀 내려가는 비즈니스 메일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명확했다. H사의 제안에 감사를 표하면서도, 창작자로서의 권리와 현실적인 납기 조정안을 단호하고 정중하게 제시하는 완벽한 문장들이었다.

서하는 턱을 괸 채, 모니터 불빛을 받아 진지하게 빛나는 성진의 옆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늘 무뚝뚝하게 잔소리나 툭툭 던지던 이웃 남자가, 자신의 일에 이토록 빠르고 날카롭게 개입하여 모든 혼란을 정리해 주고 있었다. 마치 엉켜버린 실타래를 단숨에 풀어버리는 마법사 같았다.

‘아, 진짜 든든하다.’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하고 책임져야 했던 1인 공방의 외로운 시간들이, 성진의 든든한 등판 너머로 씻은 듯이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자, 한 번 읽어보고 괜찮으면 전송하이소.”

메일 초안 작성을 마친 성진이 의자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서하는 메일 내용을 읽어보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성진의 목에 두 팔을 꽉 감았다.

“성진 씨 진짜 최고예요. 너무 멋있어.”

서하의 적극적인 애정 표현에 성진이 헛기침을 하며 떨어지려 했지만, 내심 기분이 좋은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는 손길엔 다정함이 뚝뚝 묻어났다.

“멋있긴요. 앞으로 밤새서 상자 접을 생각 하니까 벌써 허리가 아프구만.”

“제가 나중에 소고기 사줄게요! 진짜!”

“소고기 사줄 돈으로, 나중에 앨범 나오면 디자인이나 하나 공짜로 해주이소.”

농담처럼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서하는 이 거대한 협업 프로젝트가 두렵기는커녕 몹시 설레기 시작했다.

복잡한 계약 조건도, 빠듯한 납기일도 더 이상 막막하지 않았다. 기꺼이 제 몫의 무게를 나누어 짊어지려는, 세상에서 가장 확실하고 든든한 ‘내 편’이 곁에 버티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