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갚지 않아도 되는 마음
1502호의 무거운 철문이 닫히고, 거실에는 숨 막힐 듯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성진은 식탁 의자를 빼주며 서하를 앉히고, 자신은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겉으로는 평소처럼 차분하고 단정한 얼굴이었지만, 테이블 아래로 내려놓은 두 손은 땀이 밸 정도로 꽉 쥐어져 있었다.
‘성진 씨. 나, 진지하게 할 말이 있어요.’
방금 전 복도에서 서하가 내뱉은 그 서늘한 첫마디가 계속해서 성진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며칠간 이어진 서하의 거리 두기, 그리고 오늘 유난히 무거운 표정. 성진의 머릿속에는 이미 ‘그만하자’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기정사실처럼 굳어지고 있었다. 심장이 바닥 없는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기분이었지만, 성진은 애써 입술을 꽉 깨물며 덤덤하게 서하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서하는 무릎 위에 올려둔 두 손을 꼼지락거리더니, 주머니에서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 위로 밀어놓았다.
구깃구깃하게 접혔다 펴진, 하얀색 무지 엽서.
성진이 고백하던 날 장미꽃과 함께 건네주었던 바로 그 엽서였다.
“……이걸 왜.”
성진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고백의 흔적을 되돌려주는 건, 정말로 끝을 의미하는 것 같아 눈앞이 아득해졌다.
“방금 집에서 청소하다가, 예전 스케치 노트 아래 눌려 있던 걸 다시 읽었어요.”
서하가 붉게 짓무른 눈을 들어 성진을 마주 보았다.
“여기 적혀 있잖아요. 미안하다며 숨지 말고, 안 괜찮을 땐 화내고 기대달라고.”
“…….”
“근데 나, 하나도 그렇게 못 했어요. 오히려 성진 씨가 내민 손을 짐으로 만들고 선 그어버렸어요.”
서하의 입에서 나온 것은 이별 통보가 아니었다.
성진은 그제야 멈춰 있던 숨을 훅, 하고 길게 토해냈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어깨가 스르르 풀려 내리며, 꽉 쥐고 있던 주먹에도 힘이 빠졌다. 헤어지자는 말이 아니었다. 그 압도적인 안도감에 하마터면 실소를 터뜨릴 뻔했다.
하지만 서하의 이어지는 고백은 성진의 가슴을 또 다른 방향으로 찌르기 시작했다.
“고마웠어요. 성진 씨가 내 일 돕느라 엑셀 표 만들고, 밤새워 상자 접어준 거. 근데… 어느 순간부터 내 일 안에서 내가 자꾸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어요. 회의실에서도, 메일에서도 나는 뒤로 빠져 있고, 성진 씨가 내 브랜드의 대표가 되어 있는 것 같아서 무서웠어요.”
서하의 솔직한 고백에 성진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리고 성진 씨 눈은 매일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고, 피곤해 죽을 것 같은데 나 때문에 억지로 버티는 게 뻔히 보였어요. 그래서… 더 기대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이 사람을 축내고 있구나 싶어서.”
서하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을 이었다.
“미안해서, 어떻게든 갚아야 할 것 같았어요. 성진 씨가 쏟은 시간만큼, 내가 받은 도움만큼 정산해서 돌려주지 않으면 내가 너무 이기적인 사람 같아서….”
그 말을 듣는 순간, 안도감으로 풀려 있던 성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정산이요.”
성진의 목소리가 낮고 서늘하게 거실을 울렸다.
화가 난 목소리였다. 서하를 윽박지르거나 몰아붙이려는 분노가 아니었다. 자신이 건넨 순수한 애정이 철저하게 ‘계산서’로 취급받았다는 것에 대한 뼈아픈 서운함이었다. 감정이 격해진 탓에 성진의 입에서 짙은 사투리가 툭툭 튀어나왔다.
“내가 서하 씨한테 수고비 받을라꼬 밤샜는 줄 압니꺼?”
성진이 책상 한쪽에 놓여 있던, 서하가 사준 비싼 비타민 상자를 턱끝으로 가리켰다.
“나는 그냥, 내 사람이 밥 한 숟갈이라도 더 편하게 묵고, 잠 한 시간이라도 더 자길 바라서 그런 겁니다. 서하 씨 혼자 끙끙대는 게 보기 싫어서, 내가 할 수 있는 제일 빠른 방법으로 치워준 거라고요. 근데 그걸 빚으로 만들고, 물건이랑 돈으로 갚아내려 했어요, 서하 씨는.”
“성진 씨, 그건…….”
“내가 바란 건 비싼 쿠션이나 돈이 아니라, 그냥 고생했다고 어깨 한 번 기대주는 거였어요.”
성진이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서운하네, 한서하.”
성진의 솔직하고 아픈 질책에 서하의 눈에서 기어이 참았던 눈물이 툭 떨어졌다. 서하는 변명하지 않았다. 자신의 그 알량한 미안함과 방어기제가 성진에게 얼마나 큰 상실감을 주었는지 완벽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미안해요…. 진짜, 미안해요. 내가 너무 바보 같았어요.”
서하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흐느끼자, 굳어 있던 성진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 화를 내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진심이 왜곡된 것이 속상했을 뿐이다.
성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을 돌아 서하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 서하의 젖은 뺨에서 손을 떼어내고, 자신의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울라고 한 소리 아니에요.”
“흐으, 성진 씨 진심을 내가 빚으로 만들어서….”
“그래도, 서하 씨가 왜 그렇게까지 도망쳤는지는 알겠네요.”
성진이 서하의 무릎 위에 올려진 손을 단단하게 덮어 쥐었다. 그의 목소리는 다시 평소의 차분하고 다정한 온도로 돌아와 있었다.
“내 잘못도 커요.”
“…….”
“서하 씨 걱정한다는 핑계로, 묻지도 않고 서하 씨 영역까지 함부로 밟고 들어갔네요. 그냥 내 방식대로 빨리 치워주면 다 도움인 줄 알았지, 내 등 뒤에 서 있어야 했던 서하 씨 기분은 미처 생각을 못 했어요.”
성진의 덤덤한 사과였다.
자신의 방식이 틀리지 않았다고 고집부리는 대신, ‘도움’이라는 이름으로 서하의 주체성을 깎아내렸음을 완벽하게 인정하고 물러서는 태도.
“앞으로는 그렇게 안 할게요. 그러니까 서하 씨도, 미안하다고 선 긋고 도망가는 짓은 이제 그만합시다.”
서하가 붉어진 눈으로 성진을 내려다보았다. 성진은 그녀의 손을 꼭 쥔 채, 눈을 맞추며 또박또박 짚어 나갔다.
“자, 오늘 룰 다시 정합시다.”
“……룰이요?”
“예. 일 관련해서 최종 결정권은 무조건 한서하 대표님한테 있는 걸로. 나는 옆에서 일정표나 짜고 엑셀만 돌릴게요. 대외적인 연락이나 실무 결정에서 절대 서하 씨 안 건너뜁니다.”
성진의 명확한 첫 번째 룰에 서하가 눈물을 닦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서하 씨도 약속하이소. 무겁고 버거우면, 숨지 말고 안 괜찮다고 말하기.”
“네….”
“마지막으로, 내가 돕는 건 빚이 아니에요. 그냥 연인끼리 당연히 주고받는 마음이니까 갚을 생각 마이소. 대신 내 도움이 부담스럽고 선 넘는다 싶으면, 지금처럼 언제든 단호하게 말해주고요.”
성진이 서하의 손등을 엄지로 부드럽게 문지르며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콜?”
“……콜.”
서하가 젖은 코를 훌쩍이며 씩 웃었다. 성진은 그제야 완전히 안도하며, 바닥에 쪼그려 앉은 채로 서하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녀의 품에 고개를 푹 묻었다.
“와. 나 진짜, 오늘 방 빼야 하는 줄 알고 심장 터지는 줄 알았네.”
무뚝뚝하고 서늘하던 평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서하의 배에 얼굴을 부비며 안도하는 덩치 큰 남자의 어리광이었다.
서하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자신을 안고 있는 성진의 넓은 등과 정수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오해와 서운함으로 차갑게 식어 있던 15층의 공기가, 서로를 향한 건강하고 단단한 약속과 함께 비로소 따뜻하고 완벽한 온도를 되찾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