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1호에 사람이 들어왔다
30화. 첫 납품일

30화. 첫 납품일

H사 콜라보레이션 1차 물량 납품 당일.

아침 7시부터 1501호의 거실은 그야말로 소리 없는 전쟁터였다.

거실 바닥의 절반은 잘 접힌 종이 상자들로 가득 차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500개의 목걸이와 귀걸이가 빼곡하게 도열해 있었다.

두 사람의 동선은 좁은 거실 안에서도 단 한 번도 부딪히지 않았다. 완벽하게 짜인 톱니바퀴 같았다.

“2번 옵션, 검수 끝났습니다.”

서하가 작업용 돋보기를 낀 채 은 펜던트의 미세한 스크래치와 체인의 연결고리를 마지막으로 확인한 뒤, 검수가 끝난 트레이를 성진 쪽으로 밀어주었다.

“확인했습니다.”

맞은편에 앉은 성진은 트레이를 받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미리 접어둔 패키지 상자 안에 제품을 담았다. 완충재를 덮고, 보증서를 넣고, 상자를 닫은 뒤 옵션 번호에 맞는 바코드 스티커를 정중앙에 깔끔하게 붙였다. 테이프가 끊어지는 경쾌한 마찰음이 일정한 박자로 거실을 채웠다.

서하의 예민한 감각과 성진의 기계 같은 정확함이 만나자, 500개라는 엄청난 물량도 막힘없이 박스 안으로 차곡차곡 쌓여갔다.

오전 11시. 약속된 시간에 맞춰 용달 기사가 15층으로 올라왔다.

“아이고, 물량이 꽤 되네요! 대표님, 혼자 하시는 줄 알았는데 옆에 든든한 직원분이 다 도와주시네.”

카트를 끌고 온 기사가 땀을 닦으며 넉살 좋게 웃었다. 서하가 대답하기도 전에, 무거운 박스 세 개를 한 번에 번쩍 들어 카트에 싣던 성진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직원 아닙니다. 기사님, 박스 모서리 안 찌그러지게 상하차할 때 조금만 신경 써 주십시오.”

“아유, 걱정 마쇼. 내가 안전하게 센터까지 싹 모셔다드릴 테니까.”

기사가 떠나고, 복도를 가득 채웠던 무거운 수레 끄는 소리마저 멀어지자 1501호에는 다시 텅 빈 고요함이 찾아왔다.

서하는 짐이 빠져나가 휑해진 거실 한가운데 서서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산더미 같았던 박스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테이프 잔해 몇 개와 서하가 내린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만이 남아 있었다.

“끝났네요.”

서하가 유리잔을 집어 성진에게 건네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수고했습니다. 불량 하나 없이 완벽하던데요.”

성진이 잔을 받아 들며 서하의 머리칼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시원한 커피를 들이켜는 그의 넓은 등과 팔뚝을 보며, 서하는 묘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이 프로젝트 안에서 자신의 자리가 지워질까 봐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오늘, 숨 막히는 분업의 과정을 겪어내며 서하는 분명하게 깨달았다. 성진은 결코 그녀의 일을 뺏은 것이 아니었다.

오롯이 서하의 이름으로 나가는 결과물이지만, 이 박스들 안에는 성진이 밤새워 접은 종이의 각도와, 그가 엑셀로 뽑아낸 바코드의 정확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것은 온전한 내 일이면서, 동시에 우리 둘이 치열하게 엮어낸 ‘우리의 시간’이기도 했다.

“성진 씨 덕분이에요. 진짜로.”

서하의 맑고 편안한 웃음에 성진 역시 잔을 내려놓고 마주 웃었다. 가장 무거운 첫 번째 관문이, 두 사람의 완벽한 파트너십 아래 무사히 지나가고 있었다.

H사 기획전 페이지 공식 오픈 전날 밤 11시 30분.

1501호의 거실 불은 아직 환하게 켜져 있었다.

서하는 소파에 무릎을 모아 안고 앉은 채,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으며 태블릿 화면만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내일 자정에 열릴 H사의 ‘새벽 숲’ 기획전 프리뷰 페이지가 띄워져 있었다.

떨림, 기대, 그리고 그보다 훨씬 큰 두려움.

1인 공방으로 알음알음 단골들에게만 팔아오던 자신의 작업물이, 수십만 명이 오가는 대형 플랫폼의 메인 배너에 걸린다는 사실이 숨 막히는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사람들 반응이 없으면 어떡하지? 악플이 달리면 어떡해.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렸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부정적인 생각에 서하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화면을 엎어두려던 찰나였다.

‘삐리릭- 철컥.’

1502호의 비밀번호가 눌리는 소리와 함께 성진이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따뜻하게 데운 캐모마일 차 두 잔이 들려 있었다.

“아직 안 자고 있을 줄 알았습니다.”

성진이 소파로 다가와 서하의 손에 따뜻한 머그잔을 쥐여주었다. 그러고는 서하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아, 그녀의 굳은 어깨를 제 쪽으로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내일 오픈이죠. 떨립니까.”

“네. 심장 터질 것 같아요. 미치겠어요, 진짜.”

서하가 성진의 어깨에 이마를 콩, 기대며 앓는 소리를 냈다.

예전의 성진이었다면 이 순간에도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했을 것이다. ‘데이터상으로 수요가 확실하니 걱정할 필요 없다’, ‘H사 1면 배너면 기본 트래픽이 보장되니 무조건 팔린다’ 같은 숫자와 논리로 무장한 위로들.

하지만 오늘 성진은 숫자를 꺼내는 대신, 그저 서하의 어깨를 감싼 손에 온기를 더하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진짜 도망치고 싶어요. 악플 달릴까 봐 무섭고, 하나도 안 팔려서 파리만 날릴까 봐 무서워요. 내가 만든 게 사람들에게 별로면 어떡하죠.”

“……나도 그렇습니다.”

성진의 나지막한 대답에 서하가 고개를 들었다.

“성진 씨가요? 에이, 거짓말. 성진 씨는 늘 완벽하잖아요.”

“완벽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해도, 남들 귀에 어떻게 들릴지는 세상에 나가봐야 아는 거니까요.”

성진이 서하의 머그잔을 쥔 손을 자신의 큰 손으로 조심스럽게 포개어 쥐었다.

“나도 내 가수 앨범 발매 전날엔, 잠 한숨도 못 잡니다. 밤새 음원 사이트 새로고침 하면서 사람들 반응 찾아보고, 악플 하나에 심장 철렁하고 그럽니다. 도망치고 싶을 때도 많아요.”

서하의 두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

늘 크고 단단한 바위 같았던 남자, 거침없이 상황을 통제하고 해결책을 턱턱 내놓던 그 유능한 프로듀서가 처음으로 꺼내놓은 연약한 민낯이었다.

“성진 씨도… 무서워요?”

“당연하죠. 내 밤낮을 갈아 넣은 결과물을 남한테 평가받는 일인데, 어떻게 안 무섭습니까. 안 무서우면 가짜지.”

성진의 그 솔직하고 덤덤한 고백이, 서하의 요동치던 심장을 신기할 정도로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었다.

그는 서하를 달래야 할 어린아이나 보호해야 할 연약한 존재로 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창작의 고통과 평가의 두려움을 뼈저리게 아는, ‘같은 무게의 일을 하는 동료 창작자’로서 온전한 공감과 연대를 보내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불안해하는 거 당연한 겁니다. 오늘 밤새 혼자 떨지 말고, 같이 떨어요. 옆에 있어 줄 테니까.”

성진이 서하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자신의 어깨로 끌어당겼다.

서하는 쥐고 있던 따뜻한 머그잔의 온기를 느끼며, 성진의 가슴팍으로 조금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 막막한 어둠 속에서 자신과 똑같은 무게의 불안을 안고 기꺼이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더없이 벅차고 든든했다.

“……자정 넘어갈 때, 내 옆에 딱 붙어 있어야 돼요.”

“어디 안 갑니다. 손 꼭 잡고 같이 봅시다.”

고요한 1501호의 거실.

두 사람은 하나의 담요를 덮은 채, 마주하게 될 세상의 평가를 향해 나란히 어깨를 기대고 앉았다.

오픈 3일 차 오후.

거실 한가운데 선 서하의 휴대폰 너머로 H사 담당 파트장의 상기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대표님! 반응 완전 터졌어요! 지금 대중형 옵션은 1차 물량 싹 다 소진됐고요, 리미티드 에디션은 프리미엄가 붙어서 리셀 글까지 올라오고 난리도 아닙니다. 후기 게시판 한 번 확인해 보셨어요?

“아… 네. 보고 있어요. 저도 지금 믿기지가 않아서…….”

* 이 기세면 다음 주 2차 납품 물량으론 턱도 없어요. 대표님, 혹시 2차 물량 두 배로 늘려서 납품 가능하실까요? 아니, 세 배로 뽑아주셔도 저희 쪽에서 무조건 다 팔 수 있습니다!

전화를 끊은 서하는 멍한 얼굴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태블릿 화면에는 '새벽 숲' 라인에 대한 찬사 어린 리뷰들이 분초 단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재입고를 요구하는 알림이 끊임없이 울렸다. 대박이었다. 1인 공방이 꿈꿀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이고 화려한 성공.

하지만 서하의 표정은 마냥 기뻐 보이지만은 않았다.

퇴근 후 1501호로 건너온 성진이, 복잡한 얼굴로 앉아 있는 서하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표정이 왜 그럽니까. 축하 파티라도 열어야 할 판인데.”

“성진 씨… 나 방금 H사에서 연락받았는데요. 2차 물량 두 배, 아니 세 배로 늘려서 납품해 달래요. 무조건 다 팔린다고.”

“그렇게 핫합니까? 와, 우리 서하 씨 진짜 돈방석에 앉겠네요.”

성진이 기분 좋게 웃으며 대답했지만, 서하는 입술을 꾹 깨문 채 불안한 시선을 떨궜다.

“좋은데… 무서워요.”

“무섭다니요.”

“나, 1인 공방이잖아요. 여기서 물량을 세 배로 늘리려면 잠 한숨 안 자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요. 외주 공장에 디자인 넘기고 공장 찍어내듯 찍어내야 일정을 맞출 수 있을 텐데… 그럼 내가 애초에 지키고 싶었던 퀄리티가 무너질까 봐 겁나요. 근데 또, 이렇게 밀려들어 오는 물을 안 저으면 바보가 되는 건가 싶고…….”

갑작스럽게 닥쳐온 거대한 성장의 기로 앞에서, 서하는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보통의 매니저나 프로듀서였다면 이 완벽한 기회를 놓치지 말라며 외주 업체를 알아보고 어떻게든 물량을 맞춰 이익을 극대화하자고 밀어붙였을 것이다. 성진 역시 그 바닥의 논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성진은 태블릿을 덮어 서하의 손에서 빼내어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서하의 차가운 뺨을 다정하게 감싸 쥐었다.

“서하 씨.”

“……네.”

“물 들어온다고 무리해서 노 젓지 마이소.”

성진의 목소리는 한없이 차분하고 단단했다.

“H사 사람들은 물건 파는 게 직업인 사람들이니까 당연히 세 배, 네 배 뻥튀기하자고 하겠죠. 근데 남들 속도에 서하 씨가 억지로 끌려갈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브랜드가 망가지는 건, 못 팔아서가 아니라 감당 못 할 속도로 덩치만 커졌을 때입니다. 돈 몇 푼 더 벌자고 서하 씨가 밤새워 지키고 싶어 했던 디테일, 그거 버릴 겁니까.”

성진의 질문에 서하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크게 저었다.

“결정은 대표님이 하는 겁니다. 무리하지 말고, 대표님이 감당 가능한 속도로 갑시다. 2차 물량 늘릴 수 없다고 내가 H사 쪽에 연락할까요.”

그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서하의 브랜드가 거대한 성공을 좇아 휩쓸려 가는 것보다, 서하가 감당할 수 있는 속도로 건강하게 걸어가는 것을 택했다. 그 올곧은 지지에, 혼란스러웠던 서하의 머릿속이 씻은 듯이 맑아졌다.

“아니요. 연락은 내가 할게요.”

서하가 성진의 손을 겹쳐 쥐며 후련한 미소를 지었다.

“물량은 원래 계약한 대로만 갈 거예요. 퀄리티 타협은 절대 안 한다고 확실하게 못 박을게요.”

“잘 생각했습니다.”

“대신.”

서하가 몸을 바로 세우며, 어느 때보다 맑고 단단한 눈빛으로 성진을 마주 보았다.

“나, 작업실 따로 구하려고요. 직원도 정식으로 뽑고.”

성진의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

“언제까지 1501호 거실에서 박스만 접을 순 없잖아요. 물량을 늘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내 브랜드를 더 단단하게 책임지려면 제대로 된 공간과 체계가 필요한 것 같아요. 진짜 한서하 대표가 되어보려고요.”

오피스텔 거실을 벗어나, 진짜 자신의 회사를 세우고 시스템을 구축하겠다는 선언. 그것은 성진의 보호 아래 머물지 않고 스스로 성장하겠다는 가장 주체적인 결정이었다.

성진은 잠시 놀란 듯 서하를 바라보다가, 이내 더없이 뿌듯하고 자랑스럽다는 듯 깊게 미소 지었다.

“와. 방금 진짜 멋있었습니다.”

“그쵸? 나 좀 폼 났죠?”

“예. 이제 진짜 한서하 대표님 폼 나네요.”

성진이 서하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이 좁은 15층 복도에서 시작된 작고 외로운 공방의 시간은, 이제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닻을 올릴 준비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