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이웃이라는 핑계를 접고
1501호에 사람이 들어왔다
금요일 저녁, 약속 시간 한 시간 전.
성진은 지하 주차장에 내려와 자신의 차 트렁크를 열어두고 한참 동안 미간을 짚고 서 있었다.
트렁크 안에는 원필의 과한 의욕이 빚어낸, 사람 상체만 한 거대한 붉은 장미 다발이 자리를 꽉 채우고 있었다.
‘분명 작고 수수하게 해달라 캤는데…….’
당장이라도 들고 올라가서 서하에게 안겨주고 싶었지만, 이 압도적인 크기의 시뻘건 장미를 들고 복도에 서 있을 용기가 도무지 나지 않았다. 자칫하면 서하가 부담스러워하며 뒷걸음질 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국 성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트렁크 문을 닫아버렸다.
어차피 레스토랑 예약도 해두었으니, 식사를 마치고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트렁크를 열어 자연스럽게 안겨주는 편이 훨씬 낫겠다는 치밀한 계산이었다. 문제는 그 자연스러움이라는 게, 지금 트렁크 안에 누워 있는 장미 다발의 크기 앞에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이었다.
약속 시간이 가까워지자 성진은 다시 15층으로 올라와 1501호 문 앞에 섰다. 초인종은 누르지 않았다. 이미 약속한 시간이었고, 괜히 벨소리까지 울리면 제 긴장만 더 티가 날 것 같았다.
이내 도어락이 열리고 서하가 복도로 걸어 나왔다. 차분한 베이지색 원피스를 입고 은은하게 화장까지 한 모습이었다. 평소 작업용 앞치마를 두르고 있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화사하고 단정한 분위기에 성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오래 기다렸어요, 성진 씨?”
“아뇨. 방금 나왔습니다. 제 차로 같이 가시죠.”
성진 역시 몸에 딱 맞게 떨어지는 짙은 차콜색 셔츠에 검은색 슬랙스 차림이었다. 평소의 헐렁한 후드티 대신 어깨와 피지컬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단정한 모습에, 서하 역시 속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두 사람 모두 오늘은 ‘단순한 이웃의 식사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온몸으로 인지하고 있었다.
서하가 보내온 링크 속 레스토랑은 한강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조용하고 분위기 좋은 곳이었다.
창가 쪽 가장 전망 좋은 자리에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에는, 기분 좋은 와인 한 잔과 함께 몽글몽글하고 밀도 높은 공기가 맴돌았다.
“성진 씨.”
와인잔을 매만지던 서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였어요? 나한테 그렇게 다정하게 굴기 시작했던 거.”
돌려 말하지 않는 직구였다. 성진은 쥐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고 가만히 서하를 마주 보았다. 피할 이유가 없는 질문이었다.
“팝업 쇼룸 날이요.”
“그때요?”
“예. 손 다친 거 숨기려다 들켰을 때. 서하 씨가 내 손목 잡고 왜 다 해주냐고, 그러다 성진 씨가 먼저 퍼진다고 화냈잖습니까.”
성진의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지만, 그때를 떠올리는 그의 눈동자에는 아주 작은 열기가 묻어 있었다.
“그때 처음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은 내가 뭘 해줬는지가 아니라, 내가 무리하고 있는지를 먼저 보는 사람이구나.”
서하의 손끝이 와인잔의 얇은 다리를 살짝 더 세게 붙잡았다.
“서하 씨는요.”
“저는…… 쓰리피스요.”
“예?”
성진이 예상 못 한 대답에 눈을 깜빡였다. 서하의 귓바퀴가 천천히 붉어졌다.
“엘리베이터에서 쓰리피스 정장 입고 타셨던 날요. 그 전에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은 했는데, 그날은 좀…… 다르게 보였어요. 아, 너무 솔직했나.”
서하가 민망함에 시선을 피하자, 성진은 대답 대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웃음이 새어 나가면 너무 티가 날 것 같았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서하가 자연스럽게 계산서를 찾듯 가방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성진의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손끝을 멈춰 세웠다.
“계산 안 해도 됩니다.”
“네? 아니, 오늘 제가 밥 산다고 먼저 약속 잡은 거잖아요.”
“일 좀 도와줬다고 밥 얻어먹으러 나온 거 아닙니다.”
성진의 무심한 듯 묵직한 대답에 서하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네?”
“보상받으려고 잘해준 거 아니란 소리예요.”
성진이 몸을 앞으로 조금 기울이며 서하를 똑바로 응시했다. 은은한 조명 아래 비친 그의 짙은 눈동자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서하에게 꽂혔다.
“이웃 핑계, 이제 그만 대려고요.”
쿵. 서하의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것 같았다.
“앞집 남자 말고, 진짜 남자로 서하 씨 옆에 있고 싶습니다.”
에두르는 법 없는, 박성진다운 가장 솔직하고 묵직한 고백이었다. 멋부리지 않은 투박한 문장 속에, 그동안 그가 자신을 향해 눌러 담았던 거대한 다정함이 고스란히 만져졌다. 항상 자신을 ‘챙겨주던’ 이 남자가, 이제는 아예 대놓고 그 자리를 달라고 치고 들어온 것이다.
“……저도요. 저도, 성진 씨랑 똑같은 마음이에요.”
서하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눈물이 살짝 고인 서하의 맑은 눈을 확인한 성진의 굳어 있던 어깨가, 그제야 스르르 풀려 내리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완벽한 고백을 마치고 식당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강변에 자리한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 밤바람이 제법 매섭게 불어왔다.
“어우, 밤 되니까 꽤 쌀쌀하네요.”
서하가 어깨를 움츠리며 양팔을 가볍게 문질렀다. 그 모습을 본 성진이 차 뒷부분으로 걸음을 재촉하며 차 키를 꺼내 들었다.
“트렁크에 담요 있습니다. 꺼내줄 테니까 추운데 조수석에 먼저 타 있으이소.”
“에이, 미안하게 어떻게 저만 쏙 타 있어요. 같이 꺼내요.”
서하가 잰걸음으로 성진의 뒤를 따라붙었다.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성진이 무심코 트렁크의 열림 버튼을 누른 찰나였다.
‘삐빅-’ 소리와 함께 묵직한 트렁크 문이 스르륵 위로 열리기 시작했다.
뒤늦게 서하의 인기척을 느낀 성진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홱 틀어 트렁크 앞을 막아섰다.
“아, 서하 씨! 진짜 차에 먼저……!”
하지만 성진의 넓은 등판으로 가리기엔, 트렁크 안에 누워 있는 붉은 장미 다발의 존재감이 너무나도 압도적이었다. 게다가 이미 활짝 열려버린 트렁크 안쪽을 향해 서하의 시선이 먼저 꽂히고 만 뒤였다.
“어……?”
서하의 두 눈이 커졌다. 트렁크 안에는, 주차장 조명을 받아 미친 듯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는 거대한 장미꽃이 떡하니 누워 있었다. 성진이 말한 담요는 그 꽃다발 구석에 찌그러져 보이지도 않았다.
적막이 흘렀다. 성진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이마를 짚었다. 치밀했던 고백 타이밍은 어설프게 빗나갔고, 식당에서 무겁게 잡았던 폼은 한순간에 바닥으로 추락했다.
“아니, 그게…. 분명 작고 수수하게 해달라 캤는데, 고백한다니까 지 딴에는 신경 쓴다고 이렇게 크게 맹글어 놔서. 하, 진짜….”
당황해서 횡설수설하며 사투리까지 튀어나오는 성진의 모습에, 결국 서하가 참지 못하고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그 웃음은 소리 내어 맑게 웃는 웃음으로 번졌다.
“아, 진짜 성진 씨 너무 귀여워요.”
“……귀엽다고요. 이 징그러운 게.”
“엄청 크고 징그럽긴 한데, 너무 성진 씨 같아서 좋아요. 숨기지도 못할 만큼 커다란 거, 무식하게 다정하고 따뜻한 거.”
서하는 트렁크 속 거대한 장미꽃을 끙끙대며 품에 안고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제야 성진의 굳어 있던 입매도 안도의 한숨과 함께 스르르 풀려 내렸다.
오피스텔 15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서하는 장미 다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복도를 걸었다. 1501호와 1502호. 두 사람의 관계가 처음 시작되었던 그 좁은 복도 한가운데에 멈춰 섰다.
성진이 서하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늘 조심스럽게 거리를 두던 평소와는 다른, 온전한 직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