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1호에 사람이 들어왔다
13화. 핑계가 사라진 자리

13화. 핑계가 사라진 자리

1501호에 사람이 들어왔다

그 한 걸음만으로도, 서하는 방금 전 레스토랑에서 들었던 고백이 꿈이 아니었다는 걸 실감했다.

1501호와 1502호. 언제나 이쯤에서 “쉬세요”라는 인사와 함께 등을 돌리던 자리였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각자의 방으로 사라지던 두 사람이, 오늘은 그 문 앞에서 한참이나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문제는 서하의 품에 안긴 장미 다발이 너무 컸다는 것이었다. 성진이 가까이 다가오자, 붉은 꽃잎들이 두 사람 사이를 우스꽝스러울 만큼 풍성하게 가로막았다.

“꽃 때문에 얼굴이 잘 안 보입니다.”

“성진 씨 마음이 너무 커서 그런가 봐요.”

서하가 장미 뒤에서 장난스럽게 대꾸하자, 성진은 귀끝을 붉힌 채 헛기침을 했다.

“그런 식으로 놀리지 마이소. 아직도 민망합니다.”

“안 놀리는 건데. 진짜 좋아서 그래요.”

서하가 꽃다발을 더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투박하게 크고, 숨길 수 없을 만큼 선명하고, 어쩐지 보는 사람까지 웃게 만드는 붉은 장미 다발. 완벽하게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더 박성진다웠다.

성진은 잠시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두 손을 내밀었다.

“무겁죠. 내가 들어주겠습니다.”

“안 돼요. 제 첫 꽃다발인데요.”

“첫 꽃다발이 이래도 됩니까.”

“네. 아마 평생 기억날 것 같아요.”

성진의 표정이 아주 느리게 풀렸다. 식당에서 고백을 꺼낼 때보다, 트렁크 앞에서 꽃을 들킨 순간보다도 더 깊은 안도감이 그의 눈가에 내려앉았다.

서하는 그 얼굴을 보며 문득, 며칠 전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성진 씨는 누가 챙기냐고. 늘 누군가의 불편함을 먼저 알아차리고, 자신이 젖는 쪽을 당연하게 선택하던 이 남자가 이제는 자신의 앞에서 이렇게 민망해하고, 안도하고, 조금은 기대고 싶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성진 씨.”

“예.”

“앞으로 저 챙기는 거, 혼자 너무 무리해서 하지 마세요.”

성진이 대답 대신 서하를 바라보았다. 서하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단호함이 있었다.

“저는 성진 씨가 저 때문에 힘들어지는 건 싫어요. 챙겨주는 것도 좋은데,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줬으면 좋겠어요.”

성진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익숙하지 않은 요구였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은 척하고, 힘들어도 먼저 손을 뻗는 쪽으로 살아온 그에게, 누군가에게 기대도 된다는 말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종류의 다정함이었다.

“알겠습니다.”

“진짜요?”

“예. 내가 피곤하거나 챙김 받고 싶어지면, 그때는 서하 씨한테 제일 먼저 기대겠습니다.”

“약속한 거예요. 혼자 끙끙 앓기만 해봐요, 진짜.”

서하가 장미 다발 너머로 눈을 흘기자, 성진이 결국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긴장감과 조심스러움으로 팽팽했던 두 사람 사이에, 비로소 빈틈없고 편안한 온기가 스며들고 있었다.

성진이 천천히 손을 들어, 서하의 뺨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조심스럽게 넘겨주었다. 거칠고 마디 굵은 손가락이 서하의 귓바퀴를 스치고 지날 때마다,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서하 씨.”

“네….”

“이제 핑계 안 대도 돼서 진짜 좋네요.”

성진이 서하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던 손을 그대로 내려, 그녀의 작은 손을 찾아 꽉 깍지를 꼈다.

예전 같았으면 손끝이 스치기만 해도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을 텐데, 지금 성진은 서하의 손을 제 손바닥 안에 완전히 가두고 놓아주지 않았다. 서하 역시 피하는 대신, 성진의 커다란 손을 마주 꽉 쥐었다. 성진의 체온이 닿자, 서하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저도요. 쓰레기봉투 안 들고 있어도 복도에서 성진 씨 얼굴 볼 수 있어서 좋아요.”

서하의 사랑스러운 대답에 성진이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아주 가볍고 짧게 입을 맞췄다.

쪽,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서하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성진은 제 행동에 스스로도 조금 쑥스러운 듯 헛기침을 하며 서하의 손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얼른 들어가서 쉬이소. 내일 아침에 나갈 때 문 두드리겠습니다.”

“내일요?”

“예. 오늘처럼 문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네. 내일 봐요, 성진 씨.”

서하가 도어락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성진은 잡고 있던 손을 천천히 놓아주며 그녀의 뒷모습을 끝까지 눈에 담았다.

‘철컥-’

1501호의 문이 닫혔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던 차갑고 단단한 벽은 이미 완전히 허물어진 뒤였다. 성진은 서하의 온기가 남은 자신의 오른손을 쥐었다 펴보며, 기분 좋은 미소와 함께 1502호의 문을 열었다.

내일 아침이면, 쓰레기를 버린다는 핑계 없이도 당당하게 앞집 문을 두드릴 수 있을 것이다. 15층의 고요한 복도에, 전에 없던 설렘의 계절이 완벽하게 자리 잡은 밤이었다.

고백 다음 날 아침 8시 30분.

서하는 평소보다 일찍 출근 준비를 마치고 현관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어젯밤의 고백이 꿈은 아니었을까, 아직도 심장 끝이 간질간질했다.

‘오늘은 어떻게 마주치려나.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까?’

‘삐리릭- 철컥.’

서하가 문을 열자,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이 든 캐리어를 들고 서 있는 성진이 보였다. 평소처럼 단정한 셔츠 차림이었지만, 분위기는 어제와 사뭇 달랐다.

“어, 성진 씨. 오늘은 분리수거 안 하러 가요?”

서하가 일부러 장난스레 묻자, 성진이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분리수거 말고, 여자친구 출근시키러 왔습니다.”

능청스럽게 툭 던지는 그 단어에 서하의 뺨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평소의 무뚝뚝한 철벽남은 온데간데없고, 여유롭게 입꼬리를 올린 채 장난을 치는 모습이 몹시 낯설면서도 심장 떨리게 설렜다.

“뭐예요, 진짜. 그런 말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요?”

“이제 핑계 댈 필요 없다 안 했습니까. 가시죠.”

성진은 쑥스러워하는 서하의 빈손을 아주 자연스럽게 잡아끌었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안, 두 사람은 나란히 손을 잡고 섰다. 예전 같았으면 층수 모니터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어색한 침묵을 지켰겠지만, 오늘 성진의 시선은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서하에게로 향해 있었다.

“어제 잠은 잘 잤습니까.”

“아뇨. 누가 밤에 폭탄선언을 해놓고 가서, 설레서 한숨도 못 잤어요.”

“다행이네.”

“네? 다행이라뇨.”

서하가 눈을 흘기자, 성진이 맞잡은 손을 가볍게 흔들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나만 밤새 뜬눈으로 설친 줄 알고 좀 억울할 뻔했거든요.”

서하는 그 솔직하고 귀여운 대답에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무뚝뚝한 줄만 알았던 남자가 연애를 시작하자 보여주는 이 여유로운 장난기는, 서하를 쉴 새 없이 무장해제시키고 있었다.

문고리에 몰래 간식을 걸어두거나, 우연을 가장해 로비에서 서성이던 핑계의 시대는 완벽하게 막을 내렸다.

오후 2시. 점심 식사를 막 마친 서하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점심은 먹었습니까.

평소라면 여기서 ‘먹고 일하이소’ 하고 대화가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곧이어 성진이 보낸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

자신의 식탁에 차려진 김치볶음밥과, 어제 서하에게 주기 전 빼두었던 장미꽃 한 송이를 꽂아둔 작은 화병 사진이었다.

나는 간단하게 김치볶음밥 먹고 있습니다ㅋㅋ 어제 주기 전에 한 송이 빼둔 장미도 꽂았고요.

서하는 사진 속 무심하게 꽂힌 빨간 장미를 보며 킥킥거렸다.

저는 든든하게 국밥 먹었어요! 이따 저녁에 맛있는 거 먹어요 우리 ㅋㅋ
국밥이라니, 취향이 탁월할 줄 알았습니다 ㅋㅋ 이따 픽업 가겠습니다.

농담을 자연스럽게 받아치며 이모티콘까지 붙여오는 성진의 카톡에, 서하는 실없이 웃으며 액정을 문질렀다.

그리고 저녁 8시.

공방 문을 나서자, 어김없이 성진의 검은색 SUV가 비상등을 켠 채 서하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수석 문을 열고 타자, 성진이 몸을 기울여 자연스럽게 안전벨트를 채워주었다. 훅 다가오는 묵직한 우디 향에 서하가 숨을 얕게 들이마셨다.

“들어왔어요?”

성진이 시동을 걸며 묻자, 서하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들어왔습니다. 오늘 진짜 힘들었어요. 거래처에서 수정을 몇 번이나 요구하는지.”

“누가 우리 서하 씨를 그렇게 괴롭힙니까. 명함 줘보이소. 혼내주고 오게.”

“푸핫, 진짜요? 가서 멱살이라도 잡아줄 거예요?”

“멱살은 좀 그렇고, 말로 타일러야죠. 우리 여자친구 힘들게 하지 말라고.”

능청스럽게 받아치는 성진의 대답에 차 안에는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가득 찼다.

굳이 핑계를 대지 않아도 함께 웃을 수 있는 출근길, 실없는 장난을 주고받는 메시지, 그리고 퇴근길의 따뜻한 조수석. 이웃이라는 이름으로 꾹꾹 눌러 참았던 시간만큼, 두 사람의 연애는 거침없고 달콤하게 15층의 고요한 일상을 채워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