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1호에 사람이 들어왔다
18화. 메인 프로듀서의 자리

18화. 메인 프로듀서의 자리

제안해 주신 납기일 연장 및 패키지 별도 청구 건, 긍정적으로 검토하여 계약 진행하고자 합니다.

노트북 화면에 떠오른 대형 쇼핑 플랫폼 H사 담당자의 회신 메일을 확인한 서하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성진 씨! 플랫폼 쪽에서 제안 다 수용하겠대요! 우리 조건대로 계약한대요!”

“거 보십시오. 쫄 거 하나도 없다고 안 했습니까.”

거실 소파에 앉아 기타 줄을 갈고 있던 성진이 덤덤하게 대꾸하면서도, 입가에는 숨길 수 없는 뿌듯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서하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뻐하며 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하지만 그 환희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메일의 스크롤을 내려 H사 측에서 요구한 세부 가이드라인을 확인하자, 서하의 얼굴에서 서서히 핏기가 가시기 시작했다.

“어떡해… 플랫폼 입점 규정이 엄청 까다로워요. 당장 다음 주 수요일까지 최종 샘플 제출해야 하고, 거기에 맞춰서 부자재 원가표, 옵션별 바코드 매칭 리스트, 패키지 물류 동선 기획서까지 다 내야 된대요. 나 이거 혼자 다 할 수 있을까….”

머리를 쥐어뜯는 서하를 지켜보던 성진이, 기타를 내려놓고 자연스럽게 작업대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서하의 모니터를 스윽 훑어보더니, 자신의 집으로 건너가 1502호에서 쓰던 본인의 노트북을 들고 돌아왔다.

성진은 서하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능숙하게 엑셀 창을 띄웠다.

“자, 일단 할 일부터 쪼갭시다. 최종 납품이 22일이고 샘플 제출이 다음 주니까, 일정표부터 함 짜봅시다.”

성진은 앨범 발매 프로젝트를 총괄할 때 밥 먹듯이 짜던 타임라인 표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의 손끝에서 복잡하고 막막했던 H사의 플랫폼 입점 요구사항들이 단숨에 날짜별, 항목별 체크리스트로 분해되어 시각화되었다.

“부자재 대량 발주는 늦어도 이번 주 금요일까지 무조건 넣어야 하고. 토, 일요일은 내가 패키지 상자 수량 맞춰서 접어놓고, 바코드 리스트는 서하 씨가 샘플 옵션 확정하는 대로 내가 엑셀로 매칭시켜서 파일 만들어둘게요.”

타닥, 타닥.

성진의 빠른 타이핑 소리와 함께, 1인 공방의 아날로그식 일정이 완벽하게 통제된 하나의 거대한 프로젝트 시스템으로 재편되고 있었다.

“서하 씨는 제품에만 집중하이소. 나머지 검수 기준이랑 원가표 폼은 내가 알아서 만들어 둘 테니까.”

성진의 일 처리는 빠르고 정확했으며, 빈틈이 없었다.

하지만 그 완벽한 타임라인을 멍하니 지켜보던 서하의 마음 한구석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작고 미세한 불안감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거… 내 일인데.’

분명 든든하고 고마웠다. 성진이 없었다면 시작조차 못 하고 허덕였을 게 뻔했다.

하지만 늘 디자인부터 제작, 포장까지 모든 과정을 혼자 감당해 왔던 서하에게, 자신의 공방 일이 순식간에 성진의 몫으로 무겁게 얹혀지는 듯한 이 상황은 고마움을 넘어선 짙은 미안함을 안겨주었다.

“성진 씨.”

서하가 조심스럽게 성진의 타자 치는 손을 멈춰 세웠다.

“왜요. 놓친 거 있습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성진 씨, 내 일에 성진 씨 시간을 너무 많이 뺏기는 거 아니에요?”

“내가 좋아서 하는 건데 무슨 상관입니까.”

성진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다시 키보드에 손을 올리려 하자, 서하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러다 내 일이 성진 씨 일이 되어버릴까 봐 무서워서 그래요. 내가 성진 씨한테 너무 기대기만 하는 것 같고… 고마운데, 미안해서 마음이 좀 무거워요.”

서하의 솔직한 고백에 성진의 손이 완전히 멈췄다.

그는 화면에 고정했던 시선을 돌려 서하를 가만히 마주 보았다. 불안함과 미안함이 뒤섞인 그녀의 맑은 눈동자를 읽어낸 성진은, 엑셀 창을 최소화하고 노트북을 덮었다.

“서하 씨.”

“…….”

“내가 앨범 만들 때, 프로듀서가 아무리 일정표를 기가 막히게 짜고 녹음실 세팅을 완벽하게 해놔도, 결국 마이크 앞에서 노래 부르고 앨범에 이름 박는 건 누굽니까.”

뜬금없는 성진의 질문에 서하가 눈을 깜빡였다.

“그야… 가수 본인이죠.”

“맞습니다.”

성진이 서하의 의자를 자신 쪽으로 살짝 당기며, 덤덤하고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디자인하고, 최종 퀄리티 결정하고, H사랑 계약하는 건 한서하 대표님 몫입니다. 서하 씨 고유의 영역이고, 거긴 내가 침범할 수도 없고 침범할 생각도 없습니다.”

“성진 씨….”

“나는 그냥, 우리 대표님이 디자인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옆에서 안 무너지게 시스템만 받쳐주는 겁니다. 서하 씨 브랜드에 일 잘하는 메인 피디 하나 고용했다고 생각하이소. 월급은 밥으로 받으면 되니까.”

성진의 비유는 명확하고 단단했다.

그는 서하의 주체성을 깎아내리며 통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가장 빛날 수 있도록 궂은일을 도맡는 ‘서포터’의 자리를 자처하고 있었다. 소유권과 결정권은 온전히 서하에게 남겨둔 채, 자신은 그저 그녀의 체력과 시스템을 돕는 사람이라는 명확한 선.

그 단정하고 배려 깊은 선긋기에, 서하의 가슴을 짓누르던 무거운 불안과 미안함이 봄눈 녹듯 스르르 씻겨 내려갔다.

“……월급 너무 짠 거 아니에요? 일 엄청 빡세게 시킬 건데.”

서하가 눈가를 살짝 붉힌 채 장난스레 대꾸했다.

“각오하고 계약한 겁니다. 자, 그럼 대표님. 얼른 샘플 작업부터 마무리하시죠.”

성진이 노트북을 다시 열며 기분 좋게 웃었다. 서하 역시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작업대 앞에 자세를 고쳐 앉았다.

새벽 1시. 1501호의 거실.

공간은 고요했지만, 그 안을 채우는 공기는 어느 때보다 치열하고 밀도가 높았다.

서하는 밝은 스탠드 조명 아래서 돋보기를 낀 채 은선을 꼬고 샘플을 세공하는 데 온전히 집중하고 있었다. 그 옆 거실 테이블에서는, 성진이 무소음 마우스로 조용히 부자재 수량표를 체크하고 납품용 상자의 각을 맞춰 접고 있었다.

은선이 부딪히는 맑은 금속 소리와, 종이 상자가 반듯하게 접히는 사각거리는 소리가 거실의 공기를 평화롭게 가르고 섞였다.

이전까지만 해도 같이 밥을 먹고 넷플릭스를 보며 데이트를 하던 연애의 공간은, 이제 서로의 가장 치열한 본업을 지지하고 지탱해 주는 완벽한 협업의 공간으로 변모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