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y My DayFICTION
‹ 어느 날의 왈츠 · 회차 목록
EPISODE 09

그건 진짜 오해예요

댓글

런닝머신 위, 거친 숨소리조차 멎어버린 것 같은 정적 속.

해인을 내려다보는 원필의 시선은 얇게 얼어붙은 살얼음판 같았다.

“혹시, 계속 저 따라다니십니까?”

단칼에 폐부를 찌르는 서늘한 직구.

그 엄청난 워딩에 해인은 순간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눈앞이 아득해졌다. 스토커. 지금 이 남자는 나를 자기 뒤나 밟는 변태 스토커 취급을 하고 있는 것이다.

“……뭐라고요?”

해인의 입술 사이로 헛바람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원필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한 걸음 더 다가서며, 낮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논리정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꽃집, 편의점, 새벽 공원, 코인 세탁소. 어제 샌드위치 가게, 방금 전 큰길 건너 할랄 식당. 그리고 여기 헬스장까지요.”

원필의 입에서 지난 며칠간 그들이 스쳐 지나갔던 공간들이 하나하나 읊어졌다.

“제가 예민한 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불과 일주일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제 사적인 생활 반경 안에서, 그것도 제 동선에 맞춰서 이렇게까지 계속 마주친다는 게……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지나치지 않나요?”

그의 목소리는 소리를 지르거나 윽박지르는 형태가 아니었다. 조심스럽고 정중했지만, 그 안에 담긴 확신은 견고했다. 그는 완벽하게 해인을 ‘의도적으로 접근하는 위험인물’로 상정해 두고 있었다.

해인은 그제야 원필이 왜 며칠 전부터 자신을 볼 때마다 굳어버렸는지, 왜 인사조차 무시하고 벌레 보듯 피했는지 깨달았다.

잦은 우연에 오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막상 상대방의 입을 통해 직접 ‘스토커 확정 취급’을 당하고 나니, 기분이 나빠도 너무 나빴다.

피가 차갑게 식으며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그동안 속으로 수백 번도 더 찬양했던 그 서늘하고 아름다운 콧대와 눈매가, 오늘만큼은 지독하게 재수 없어 보였다. 잘생기면 다야? 잘생기면 동네 주민 다 스토커로 몰아도 되는 거냐고.

보통의 여자 주인공들이었다면 여기서 눈물이 차오르거나, 당황해서 횡설수설 변명을 늘어놓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강해인은 억울하고 화가 날수록 머리가 차갑게 식고 말투가 또렷해지는 타입이었다.

해인은 런닝머신 손잡이를 꽉 쥐고 있던 손을 탁, 놓았다. 그리고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원필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물기 하나 없이 차갑게 얼어붙은 목소리였다. 원필의 미간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사장님이 어디 사시는지, 퇴근하고 어딜 가시는지 제가 무슨 수로 알고 따라다닙니까? 며칠 전에 저희 빌라 윗집 누수가 터져서 집이 완전 물바다가 됐어요. 공사하는 한 달 동안 지낼 곳이 필요해서 급하게 이 근처 고시원에 작은 방을 구한 것뿐이에요.”

“……고시원이요?”

“네. 한 평 남짓한 좁은 방구석에서는 도저히 펜을 잡고 작업을 할 수가 없어서, 매일같이 짐 싸 들고 밖으로 겉돌아야 했습니다. 아침 점심 저녁을 다 동네에서 해결해야 했고요.”

해인은 조금의 떨림도 없이 팩트를 꽂아 넣기 시작했다.

“자주 마주쳐서 오해할 수 있다는 건 이해합니다. 저도 사장님 계속 마주치는 게 민망해서, 일부러 원래 가던 카페랑 밥집 피해서 동선까지 바꾼 거예요. 아까 그 할랄 식당도 사장님 피해서 굳이 안 가던 곳까지 찾아간 거였고요.”

“…….”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아까 그 식당도 제가 먼저 구석에 앉아 있었고, 여기 헬스장도 제가 먼저 런닝머신 걷고 있었어요. 제가 무슨 수로 사장님이 나중에 거기 올 줄 알고 미리 가서 기다리고 있습니까?”

원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샌드위치 가게에서는 원필이 먼저 들어와 있었지만, 할랄 식당과 헬스장에서는 그녀가 먼저 공간을 점유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미행하는 사람의 패턴이라고 보기엔 물리적인 앞뒤가 맞지 않았다.

해인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쐐기를 박듯 서늘하게 말을 이었다.

“혹여나 잦은 우연에 저를 오해하실까 봐 부러 피해 다니려고 애쓰고 있었는데. 앞뒤 상황 확인도 안 하시고 다짜고짜 사람을 스토커 취급하시니까…….”

해인은 원필을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보았다.

“기분이 참 불쾌하네요.”

완벽한 패배, 아니 완벽한 일격이었다.

원필은 입술을 달싹였지만, 방금 전까지 조곤조곤 따져 묻던 논리가 산산조각 나는 바람에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앞으로 사장님이랑 한 번이라도 마주쳤던 가게는, 제가 좀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절대 안 가겠습니다. 꽃집 근처 골목으로도 안 다닐 테니까 안심하세요.”

해인은 런닝머신 위에서 내려와 수건과 물통을 챙겨 들었다.

“수고하세요.”

목례조차 생략한 차가운 인사말을 끝으로, 해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웨이트 존을 빠져나갔다.

쾅-.

탈의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고요한 헬스장 안을 무겁게 울렸다. 혼자 남겨진 원필은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서 닫힌 문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편, 탈의실로 들어온 해인은 캐비닛에 머리를 콩콩 박으며 속으로 육두문자를 씹어 삼키고 있었다.

자존심 상해. 짜증 나. 억울해. 재수 없어.

온갖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가장 해인을 뼈아프게 하는 현실적인 빡침이 하나 더 남아있었다.

‘아…… 큰맘 먹고 끊은 헬스장인데 돈 날렸네. 이딴 데를 내일부터 어떻게 와.’

해인은 후드 집업을 꿰어 입으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퉤.’

잘생긴 얼굴에 홀려 ‘가성비 덕질’ 운운하며 시각적 사치를 부렸던 과거의 자신을 한 대 치고 싶은 밤이었다.

이 회차의 댓글

이름과 비밀번호로 남기는 감상. 수정하거나 삭제할 때 같은 비밀번호가 필요해요.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

이름과 댓글은 공개됩니다. 비밀번호는 다른 곳에서 쓰는 것과 다르게 정해 주세요.

기존 소설 화면으로 보기 ↗

이야기 속 내 이름

한글 이름을 입력하면 조사가 함께 바뀝니다. 이 기기에만 저장돼요.

댓글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