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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0

늦게 따라오는 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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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탈의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고요한 헬스장 안을 무겁게 울렸다.

원필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굳게 닫힌 문짝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혹여나 잦은 우연에 저를 오해하실까 봐 부러 피해 다니려고 애쓰고 있었는데. 앞뒤 상황 확인도 안 하시고 다짜고짜 사람을 스토커 취급하시니까…… 기분이 참 불쾌하네요.]

물기 하나 없이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목소리가 귓가에서 계속 맴돌았다.

하얗게 질린 얼굴, 상처받은 기색을 애써 누르며 똑바로 마주해 오던 단단한 눈빛.

그것은 원필이 2년 전 겪었던 맹목적이고 끈적거리는 집착의 눈빛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그것은 명백한 억울함이었고, 부당한 대우에 대한 정당한 분노였다.

‘……내가 무슨 짓을.’

원필은 마른세수를 하며 벤치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머리가 차갑게 식자, 방금 전 해인이 조곤조곤 짚어준 팩트들이 그제야 이성적인 퍼즐로 맞춰지기 시작했다.

할랄 식당에서도, 이 헬스장에서도 그녀가 먼저 와 있었다.

상식적으로 미행을 하는 사람이 타겟보다 먼저 장소에 도착해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동네가 좁으니 우연히 겹칠 수도 있다는 가장 단순하고 합리적인 가능성을, 원필은 과거의 트라우마에 눈이 멀어 철저히 배제해버린 것이다.

‘윗집 누수가 터져서 고시원에 들어갔다고 했지…….’

그래서 매일같이 피곤한 얼굴이었던 거다.

그래서 코인 세탁소에 몸집만 한 이불 빨래를 짊어지고 왔던 거고, 아침 점심 저녁을 다 밖에서 대충 때우며 카페를 전전했던 거다.

원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하루아침에 집이 물바다가 되어 쫓겨난 사람에게, 좁은 방구석을 피해 카페를 전전하며 근근이 작업을 이어가던 사람에게, 자신은 위로는커녕 끔찍한 오해를 뒤집어씌우고 모욕을 준 셈이었다.

“하아…… 미친 새끼.”

원필의 입에서 낮고 거친 자조가 터져 나왔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완벽하고도 끔찍한 자신의 오판이었다.

그날 이후, 원필의 일상은 눈에 띄게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꽃을 포장하다가도 가위질을 멈추고 멍을 때리기 일쑤였고, 잎사귀를 다듬다 제 손가락을 베이는 일도 생겼다.

가장 큰 변화는 그의 시선이었다. 원필은 자신도 모르게 수시로 유리창 밖을 힐끔거렸다. 행여나 헐렁한 후드 집업을 입고 검은 볼캡을 푹 눌러쓴, 꾀죄죄하지만 묘하게 단단한 분위기를 풍기던 그 단골손님이 지나가지 않을까 해서였다.

하지만 해인은 자신의 마지막 선언을 무서울 정도로 완벽하게 지키고 있었다.

[앞으로 사장님이랑 한 번이라도 마주쳤던 가게는, 제가 좀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절대 안 가겠습니다. 꽃집 근처 골목으로도 안 다닐 테니까 안심하세요.]

그 말 그대로였다.

해인은 ‘어느 날의 왈츠’ 앞 골목에서 완벽하게 자취를 감췄다. 출근길 카페 횡단보도에서도, 편의점에서도, 코인 세탁소에서도 그녀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사흘째 되던 날 오후.

무거운 마음으로 화분갈이를 하던 원필의 가게에, 동네 터줏대감인 부동산 사장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이고, 사장님. 날씨도 좋은데 꽃집은 언제 와도 향기가 기가 막히네.”

“어서 오세요, 사장님. 개업 축하 화분 보러 오셨나요?”

“응, 저기 사거리 쪽에 미용실 새로 오픈한 데 있잖아. 거기 보낼 금전수 튼실한 놈으로 하나 골라줘 봐요.”

원필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잎에 윤기가 흐르는 금전수 화분을 골라 포장하기 시작했다. 부동산 사장님은 가게 안을 스윽 둘러보며 특유의 넉살 좋은 오지랖을 가동했다.

“그나저나 사장님 댁은 요새 물 안 새요?”

“네? 아, 네. 저는 괜찮습니다.”

“다행이네. 요 며칠 저기 골목 안쪽 오래된 빌라에서 온수 배관이 싹 다 터져가지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잖아.”

원필의 손이 멈칫했다.

본문 삽화

“……배관이, 터졌다고요?”

“어유, 말도 마. 윗집 배관이 노후돼서 터지는 바람에, 그 밑에 층 천장으로 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대. 하필 윗집은 돈 없다고 배째라 나오는 바람에 지금 공사도 지연되고 복잡해.”

부동산 사장님은 쯧쯧 혀를 차며 수다를 이어갔다.

“거기 꼭대기 층에 그림 그리는 아가씨 하나 있잖아. 꽃집도 자주 온다며? 그 아가씨네 집이 직격탄을 맞아서 아주 물바다가 됐다니까.”

쿵.

원필의 발밑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림, 그리는 손님이요.”

“응, 허구한 날 밤새면서 컴퓨터로 그림 그리는 아가씨. 그 비싼 장비들 물먹을까 봐 새벽에 난리도 아니었대. 당장 집은 다 뜯어내야 하는데 보증금 뺄 돈은 없고. 어유, 짐도 다 못 빼고 근처 고시원에 달방 끊어서 들어갔잖아. 짠해 죽겠어 아주. 좁은 방에서 그림은 또 어떻게 그리나 몰라.”

부동산 사장님의 입을 통해 전해진 사실들은, 며칠 전 헬스장에서 해인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내뱉었던 해명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일치했다.

[공사하는 한 달 동안 지낼 곳이 필요해서 급하게 이 근처 고시원에 작은 방을 구한 것뿐이에요. 한 평 남짓한 좁은 방구석에서는 도저히 펜을 잡고 작업을 할 수가 없어서, 매일같이 짐 싸 들고 밖으로 겉돌아야 했습니다.]

원필은 쥐고 있던 리본 끈을 놓칠 뻔했다.

숨이 턱 막혀왔다.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녀의 말이 전부 사실이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마음 한구석에 아주 작게나마 남아있던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자기합리화의 방어벽이 산산조각 났다.

밤을 새워 퀭했던 눈은 집을 잃고 제대로 자지 못한 수면 부족 때문이었다.

유독 커다란 비닐봉지에 쑤셔 넣어왔던 이불은, 찝찝한 고시원의 침구였을 것이다.

편의점과 식당, 카페를 전전해야만 했던 건, 그녀에게 머물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장님? 왜 그래? 얼굴이 허옇네.”

“아…… 아닙니다. 흙먼지를 좀 마셨더니. 다 됐습니다, 사장님.”

원필은 떨리는 손을 감추며 황급히 결제를 마쳤다. 부동산 사장님이 화분을 들고 나간 뒤, 원필은 카운터 안쪽 의자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가슴 한가운데에 커다란 돌덩이가 얹힌 것처럼 무겁고 답답했다.

죄책감이 거대한 해일처럼 그를 덮쳐왔다.

집이 물바다가 된 그 참담한 새벽을 견디고, 제대로 씻지도 쉬지도 못한 채 카페 구석에서 그림을 그리며 버티던 사람에게. 자신은 일말의 상황 파악도 없이 ‘나를 스토킹하냐’며 날 선 비수를 꽂아버린 것이다.

‘너무 사과하고 싶다…….’

원필은 두 손으로 마른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고, 내가 미쳤었다고, 과거의 트라우마 때문에 바보같이 당신을 오해했다고 사과하고 싶었다. 그녀가 그 차가운 얼굴로 욕을 하든, 물을 뿌리든 전부 달게 받을 자신이 있었다.

원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가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점심시간이 지나 북적이는 골목길, 프랜차이즈 카페 앞, 편의점 가는 길목. 원필은 눈에 불을 켜고 그녀의 헐렁한 후드 집업이나 검은 볼캡의 그림자를 찾았다.

하지만, 없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어디를 가든 불쑥불쑥 나타나 원필을 긴장하게 만들었던 그녀는, 거짓말처럼 이 동네에서 증발해 버렸다.

그녀는 자신이 뱉은 말을 무서울 정도로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다.

[제가 좀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절대 안 가겠습니다.]

이 넓고도 좁은 동네에서, 그녀가 먼저 자신을 피해버리니 정작 원필은 그녀를 찾을 방도가 없었다. 이름조차 몰랐다. 그저 ‘그림 그리는 단골손님’이라는 것 외에는 그녀의 연락처도, 임시로 머문다는 그 고시원이 어디인지도 알 수 없었다.

원필은 텅 빈 골목 한가운데 서서 허망하게 주먹을 쥐었다.

자신을 옭아매는 우연이 끔찍해서 밀어냈는데, 막상 그 우연이 완벽하게 끊어지고 나니 이토록 숨이 막힐 줄은 몰랐다.

지독한 아이러니였다.

오해하고 밀어낼 때는 그렇게나 잦았던 우연이, 정작 간절하게 사과하고 싶어진 지금은 단 한 번도 허락되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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