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원에서의 삶, 이른바 ‘카페 유목민’ 생활은 해인의 예상보다 훨씬 가혹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비좁은 화장실에서 대충 몸을 구겨 넣고 씻은 뒤, 무거운 백팩을 메고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와야 했다. 숨 막히는 고시원 복도를 벗어나 바깥공기를 마실 때면 늘 다짐했다.
최대한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겠노라고.
하지만 해인이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그녀가 십 년 가까이 살았음에도 이 동네의 지리에 놀라울 만큼 무지하다는 사실이었다.
[ 화요일, 오전 8시 40분. 카페 앞 횡단보도 ]
노트북을 펴놓고 작업하기 좋은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를 향해 걸어가던 길.
아침 출근길 인파 속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해인은, 건너편에 서 있는 익숙한 인영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양손에 도매시장에서 막 떼어온 듯한 신문지에 싸인 꽃뭉치를 한가득 든 남자. 원필이었다.
해인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려 했지만, 원필의 시선이 먼저 해인에게 닿았다.
“어, 안녕하세요.”
해인이 엉거주춤 인사를 건넸다. 평소 같았으면 환한 반달눈을 하며 “일찍 나오셨네요, 손님” 하고 받아쳤을 원필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
원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찰나의 정적. 길바닥의 소음이 무색하게 느껴지는 기묘한 뜸이었다.
약 2초 정도 해인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던 그는, 이내 꽃뭉치를 고쳐 쥐며 아주 건조하게 입을 열었다.

“……네. 안녕하세요.”
해사한 미소는 없었다. 그저 의무적인 목례뿐이었다.
초록불이 켜지고 두 사람은 횡단보도를 가로질러 서로의 방향으로 스쳐 지나갔다. 해인은 뒤통수가 묘하게 따가웠지만, 아침 일찍 꽃 시장에 다녀오느라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 수요일, 오후 1시. 골목 안쪽 샌드위치 가게 ]
외주 마감 기한에 쫓겨 밥 먹을 시간도 부족했던 해인은, 카페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작은 샌드위치 가게로 향했다. 대충 BLT 샌드위치 하나를 포장해서 길에서 씹어먹으며 작업할 요량이었다.
“BLT 하나 포장해주세요.”
결제를 마치고 뒤를 돌던 해인은 그 자리에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던 원필과 정확히 정면으로 마주친 것이다. 앞치마를 두른 채 지갑만 들고나온 차림이었다.
“헉.”
“…….”
해인의 입에서 바보 같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원필의 발걸음이 문턱에서 우뚝 멈췄다. 그의 눈빛은 횡단보도에서 마주쳤을 때보다 훨씬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니, 차분하다기보다는 어딘가 경직되어 보였다.
‘미친. 동네가 왜 이렇게 좁아? 나 무슨 스토커처럼 보이는 거 아니야?’
해인은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어색하게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사, 사장님도 점심 드시러…….”
“……네.”
원필은 이번에도 대답 전 미세한 뜸을 들였다. 미소는 아예 자취를 감췄다. 그는 해인과 닿지 않으려는 듯 카운터의 가장자리에 바짝 붙어 섰다.
묘한 한기가 느껴지는 태도에 해인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나는 것을 느끼며 서둘러 샌드위치를 받아 들고 도망치듯 가게를 빠져나왔다.
[ 목요일, 저녁 7시. 큰길 건너 할랄 음식점 ]
이쯤 되니 해인도 민망함의 한계치에 다다랐다.
하루걸러 하루, 아니 하루에도 두세 번씩 마주치다니. 아무리 같은 동네 생활권이라지만 이건 좀 심했다. 게다가 원필의 반응이 점점 굳어지는 걸 보면, 그 역시 이 잦은 우연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게 분명했다.
‘그래. 내가 동선을 바꾸자. 이참에 안 가본 길로 좀 다니지 뭐.’
해인은 큰맘 먹고 꽃집과 세탁소, 프랜차이즈 카페가 있는 구역을 완전히 벗어났다. 큰길을 하나 건너,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이국적인 간판의 할랄 음식점에 들어갔다.
향신료 냄새가 진동하는 구석 자리에 앉아 치킨 케밥을 주문하고 만족스럽게 한숨을 돌리던 찰나.
딸랑-.
가게 문이 열리고 들어온 남자의 실루엣에, 해인은 하마터면 마시던 물을 뿜을 뻔했다.
‘……강해인, 혀 깨물고 죽자 그냥.’
원필이었다. 그는 메뉴판을 볼 필요도 없다는 듯 카운터로 직행해 능숙하게 양고기 오버 라이스를 주문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이 가게의 오래된 찐 단골 바이브였다.
해인은 메뉴판으로 황급히 얼굴을 가렸지만, 이미 늦었다. 계산을 마치고 돌아서던 원필의 시선이 구석 자리에 웅크린 해인에게 꽂혔다.
“…….”
“…….”
숨 막히는 침묵.
원필은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해인을 벌레, 아니 무언가 소름 끼치는 이물질을 보듯 무표정하게 응시했다. 무려 3초에 달하는 길고 무거운 시선이었다.
이윽고 원필이 먼저 고개를 돌려 반대편 창가 끝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해인과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였다.
그날 해인은 케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른 채 흡입하고 도망쳐야 했다.
[ 일요일, 밤 11시. 새로 등록한 헬스장 ]
연이은 민망한 마주침에 해인은 완전히 항복했다.
동네 밥집, 카페, 편의점까지 전부 그의 구역인 것 같았다. 좁은 고시원과 딱딱한 카페 의자만 전전하다 보니 허리는 끊어질 듯 아파왔다.
이대로 가다간 디스크가 먼저 터지거나 미쳐버릴 것 같았다. 결국 해인은 작업실 공사 보증금으로 빼둔 비상금 일부를 헐어, 고시원 바로 옆 건물에 있는 헬스장 1개월권을 야심 차게 끊었다.
‘그래, 운동이나 하자. 헬스장이면 그 사장님이랑 마주칠 일도 없겠지.’
그녀는 치밀했다. 사람들과 마주치는 것 자체가 피곤해진 해인은 일부러 인적이 가장 드문 밤 11시를 골라 헬스장으로 향했다.
늘 입던 후줄근한 회색 후드 티셔츠에 펑퍼짐한 트레이닝복 바지 차림이었다.
조용한 헬스장 안에는 예상대로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해인은 만족스럽게 런닝머신 위로 올라가 속도를 높였다. 무념무상의 상태로 걷기 시작한 지 10분쯤 지났을까.
덜컥.
탈의실 문이 열리고, 누군가 웨이트 존으로 걸어 나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해인은 무심코 런닝머신 앞의 전면 거울을 통해 뒤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검은색 반팔 기능성 티셔츠에 스포츠 반바지.
수건을 목에 두르고 스트레칭을 하며 걸어 나오는 남자.
“…….”
해인은 런닝머신의 비상정지 버튼을 확 눌러버렸다.
삐빅, 하는 날카로운 기계음과 함께 벨트가 급정거하며 해인의 몸이 앞으로 크게 휘청였다.
거울 속, 덤벨을 집어 들려던 원필의 동작이 일시 정지 화면처럼 딱 멈췄다.
그의 시선이 거울을 통해 정확히 해인과 맞부딪혔다.
“하…….”
정적을 깨고 거울 너머로 원필의 낮고 거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까지의 '우연'들과는 공기의 질량 자체가 달랐다.
해인은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원필의 표정은 더 이상 당황이나 불쾌함 따위가 아니었다.
완벽하게 차갑게 식어버린, 날카롭게 날이 선 혐오와 경계.
그는 손에 쥐고 있던 덤벨을 바닥에 쾅,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아니야. 나 진짜 오늘 여기 처음 등록한 거란 말이야.'
해인이 머릿속으로 변명을 찾으며 런닝머신 손잡이를 꽉 쥐었을 때였다.
원필이 목에 두르고 있던 수건을 벤치 위에 툭 던지더니, 거침없는 보폭으로 해인이 서 있는 런닝머신 쪽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압도적인 체격은 아니었지만, 그가 뿜어내는 서늘한 분노의 기운에 해인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해인의 런닝머신 바로 앞.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멈춰 선 원필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낮고 얼어붙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예민한 걸 수도 있는데요.”
그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단골손님을 향한 일말의 친절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네?”
“혹시, 계속 저 따라다니십니까?”
단칼에 폐부를 찌르는, 가장 모욕적이고도 서늘한 직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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