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필은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하고 밀린 빨래를 해결하기 위해 늦은 밤 코인 세탁소를 찾았다.
건조기가 돌아가는 백색소음, 공간을 가득 채운 다우니 향기, 그리고 따뜻해진 수건을 반듯하게 개어 바구니에 담는 단순한 노동.
오늘도 평소처럼 세탁물을 정리하며 텅 빈 세탁소 안의 고요함을 즐기던 참이었다.
딸랑-.
유리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안으로 들어섰다. 이 시간에 코인 세탁소를 찾는 사람은 대부분 혼자 사는 동네 주민들이라, 원필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갓 건조되어 나온 따뜻한 수건 더미를 안아 든 채,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
자기 몸집만 한 커다란 검은 비닐봉지를 짊어지고 들어선 여자.
헐렁한 후드 집업에 화장기 없는 파리한 얼굴, 아무렇게나 틀어 올린 머리.
‘어느 날의 왈츠’의 단골손님이자, 그림을 그린다는 그 여자였다.
“어.”
원필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짧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하루 전 새벽, 편의점 냉장고 앞에서 마주쳤을 때까지만 해도 그저 신기한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이 좁은 동네에서, 그것도 밤낮이 바뀐 채 일하는 프리랜서라면 새벽 시간에 편의점이나 공원에서 한두 번쯤 마주칠 수도 있는 일이니까.
하지만, 오늘 이곳은 달랐다.
원필의 가게는 역 근처의 골목이었고, 이 코인 세탁소는 그곳에서 꽤 거리가 있는 주택가 안쪽이었다. 굳이 이쪽 주민이 아니라면 찾아올 이유가 없는, 완벽한 사생활의 영역.
그런데 그 사생활의 깊은 안쪽 공간에, 그녀가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세탁하러 오셨나 봐요.”
여자가 무거운 빨래 봉투를 내려놓으며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 평온하고 건조한 인사말을 듣는 순간, 원필은 자신이 안고 있는 수건 더미에 꽉 힘을 주었다.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감각이 뱀처럼 기어 올라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 네. 손님도, 빨래하시러…….”
여자는 세탁기 쪽으로 걸어가며, 무심한 얼굴로 물었다.
“오늘은 꽤 멀리까지 오셨네요. 꽃집은 저쪽 역 근처 아니었나요?”
원필은 애써 평정을 가장하며 대답했다.
“아…… 제 집이 이 근처라서요.”
“아, 저도 집이 이 근처거든요.”
저도 집이 이 근처거든요.
그 평범한 대답이 원필의 귓가에 닿는 순간, 머릿속에서 날카로운 사이렌이 울렸다. 몸이 먼저 굳어버리는, 지독한 조건반사였다.
“그럼 수고하세요. 저는 빨래 좀 돌려야 해서.”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원필은 쫓기듯 세탁 바구니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세탁소의 유리문이 닫히고 바깥의 서늘한 밤공기를 마주하고 나서야, 그는 벽에 등을 기대고 참았던 숨을 길게 토해냈다.

하아.
거친 숨결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손바닥에는 식은땀이 배어 있었다.
‘설마. 아니겠지.’
원필은 마른세수를 하며 머리를 흔들었다.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저 여자는 그저 자기 일에 치여 사는 피곤한 일러스트레이터일 뿐이다.
하지만 이성적인 통제에도 불구하고, 원필의 뇌리는 자꾸만 2년 전의 끔찍했던 기억으로 그를 끌고 내려갔다.
2년 전. 원필이 다른 동네에서 처음 꽃집을 열었을 때의 일이다.
시작은 평범했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가게를 찾아와 꼼꼼하게 꽃을 골라가던 조용한 손님. 언제나 다정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예의가 발랐다.
어느 날 그녀가 작은 캔커피 하나를 건넸다.
[사장님, 늘 예쁜 꽃 골라주셔서 감사해요. 일하시면서 드세요.]
호의를 거절할 이유가 없어 웃으며 받았던 그 커피 한 캔이 기점이었다.
손님의 방문 횟수는 매일로 늘어났고, 꽃을 사지 않는 날에도 가게에 들러 말을 걸기 시작했다. 마감 시간까지 가게 앞을 서성이며 원필이 퇴근하기만을 기다리는 날도 잦아졌다.
부담스러움을 느낀 원필이 조금씩 선을 긋고 거리를 두기 시작했을 때, ‘우연’을 가장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어, 사장님! 여기서 다 뵙네요. 이쪽으로 퇴근하세요?]
[어머, 사장님도 이 편의점 쓰시나 봐요.]
퇴근길 골목에서, 헬스장 앞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주말 새벽에 나간 코인 세탁소에서.
마치 원필의 위치를 GPS로 추적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는 그의 사생활 동선 곳곳에 나타나 해맑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우연이 세 번 이상 반복되면 그것은 집착이고, 일상이 침범당하는 공포가 된다.
결국 그녀가 원필의 빌라 공동현관문 앞까지 따라와 서성이는 것을 CCTV로 확인한 날, 원필은 경찰에 신고를 접수했다.
긴 시간의 경찰 조사와 고소, 지긋지긋한 합의 요구와 협박.
그 끔찍했던 일련의 과정들을 거치며 원필은 완전히 너덜너덜해졌다. 결국 그는 쓰던 전화번호를 해지하고, 정들었던 가게를 헐값에 넘긴 뒤 이 동네로 숨어들듯 도망쳐 왔다.
‘어느 날의 왈츠’는 그렇게 모든 것을 단절하고 새로 시작한 공간이었다.
그가 손님들에게 지나치게 다정하면서도 결코 틈을 주지 않는 철저한 방어벽을 세운 것도, 누군가가 내미는 작은 호의(커피나 간식)조차 소름 끼치도록 경계하게 된 것도 모두 그 일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 저도 집이 이 근처거든요.’
조금 전 그림 그리는 여자가 했던 말이, 2년 전 코인 세탁소에서 스토커가 했던 말과 완벽하게 겹쳐 들렸다.
[사장님, 저도 집이 이 근처거든요. 세탁소에서 보니까 되게 반갑다.]
원필은 무거운 세탁 바구니를 고쳐 쥐며 밤길을 걸었다. 걸음이 평소보다 조금 빠르고 날카로웠다.
머릿속에서 지난 며칠간의 기억들이 퍼즐처럼 맞춰지기 시작했다.
첫 방문 때부터 자신의 얼굴과 손을 뚫어지라 쳐다보던 시선.
매일같이 출석 도장을 찍으며 의미 없는 핑계로 꽃을 사 가던 행동.
그리고 불쑥 카운터 위로 내밀었던 따뜻한 페트병 라테.
커피를 거절당하자 그녀는 방문 횟수를 주 1회로 줄였다. 거기까지는 원필도 안도했다. 선을 그은 것을 제대로 알아들었구나, 눈치가 빠른 손님이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 이후의 행보는 오히려 더 미묘하게 겹쳐왔다.
새벽 2시, 인적 없는 공원 벤치에서의 우연.
새벽 3시, 집 앞 편의점에서의 우연.
그리고 오늘 밤, 동네 세탁소에서의 우연까지.
가게에서 거절당하자, 이제는 밖에서 동선을 겹치기 시작한 건가?
“……아니야. 너무 나갔어.”
원필은 골목을 돌며 작게 중얼거렸다. 트라우마가 빚어낸 과대망상일 수도 있었다.
그림 그리는 여자의 눈빛은 2년 전 그 스토커처럼 집요하거나 끈적거리지 않았다. 오히려 매번 귀찮은 듯 멍한 눈을 하고 있었고, 방금 전 세탁소에서도 엄청나게 피곤하고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일부러 남의 동선을 쫓아다니는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다.
‘동네가 워낙 좁으니까. 내가 예민한 걸 거야.’
원필은 자신이 사는 빌라 공동현관 앞에 도착해서야 조금 안도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 엘리베이터에 타자, 긴장이 풀리며 온몸에 피로가 몰려왔다.
집에 들어와 도어록이 잠기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원필은 현관문에 이마를 기댔다.
제발, 그저 지독한 우연의 일치이기를.
가게에서 그림이 잘 안 풀린다며 투덜거리던 그 건조한 목소리가, 영수증을 챙겨 들고 쿨하게 돌아서던 그 깔끔한 뒷모습이 연기가 아니기를.
아직은 섣부른 판단을 내릴 단계가 아니었다. 이 좁은 동네에서 몇 번 마주친 것 가지고 사람을 함부로 매도해선 안 된다.
원필은 애써 곤두선 경계심을 꾹 눌러 담았다. 그래, 그저 오해일 것이다.
저 손님만큼은 2년 전의 그 악몽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어야 했다. 원필은 그저 그렇게 되기를 조용히 빌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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