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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06

자는 곳과 일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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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사정은 딱한데…… 보증금 없이 당장 오늘부터 한 달 살 수 있는 방이 이 동네에 흔치가 않아. 알잖아, 여기 역세권이라 방값 비싼 거.”

동네 터줏대감인 부동산 사장님이 믹스커피를 홀짝이며 난색을 표했다.

해인은 파리해진 얼굴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마른세수를 했다.

“진짜 고시원밖에 없을까요?”

“그렇다니까. 에어비앤비나 단기 원룸은 최소 백만 원 단위로 깨지는데, 윗집에서 당장 배상해 줄 돈도 없다며. 아가씨 생돈 날리게 생겼는데 그 큰돈을 어떻게 써. 나중에 소송 걸어서 받아낸다 쳐도 당장 주머니 사정이 부담스럽지.”

사장님의 팩트 폭력은 뼈아프지만 정확했다.

지금 해인의 통장 잔고가 아예 바닥인 것은 아니었으나, 프리랜서의 수입이란 늘 들쭉날쭉한 법. 언제 입금될지 모르는 외주비와, 당장 공사비가 어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덜컥 단기 임대 원룸을 계약할 만큼 간이 크진 않았다.

결국 해인은 부동산 사장님의 소개로, 원래 살던 빌라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떨어진 상가 건물 4층의 여성 전용 고시원에 입주하기로 했다.

끼이익.

방문을 열자마자 숨이 턱 막히는 좁은 공간이 해인을 맞이했다.

말이 방이지, 성인 여자가 두 팔을 뻗으면 양쪽 벽에 손이 닿을락 말락 한 크기였다. 벽 한쪽에는 싱글 침대가 꽉 차게 들어가 있었고, 발치에는 자그마한 책상과 미니 냉장고가, 그리고 문 옆으로는 몸을 간신히 구겨 넣고 샤워기를 틀어야 하는 1평 남짓한 화장실 겸 욕실이 전부였다.

그나마 여성 전용층이라 외부인 출입이 통제되고, 방마다 개인 화장실이 달려 있어 최소한의 안전과 프라이버시가 보장된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이건 진짜 아니지.”

침대 위에 리빙박스를 올려놓은 해인이 책상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책상의 폭은 해인의 6백만 원짜리 신티크(액정 타블렛)를 올려놓기엔 턱없이 좁았다. 타블렛을 놓으면 키보드와 마우스를 둘 공간이 없었고, 무엇보다 의자를 뒤로 뺄 공간조차 나오지 않았다. 여기서 쪼그려 앉아 하루 10시간씩 그림을 그렸다간 일주일 만에 디스크가 터져 응급실에 실려 갈 게 뻔했다.

해인은 빠르게 현실을 직시하고 결론을 내렸다.

‘이곳은 오직 자고 씻는 곳이다.’

작업은 절대 불가능.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무거운 타블렛 대신 백업용으로 챙겨 온 노트북과 소형 펜 타블렛을 들고 밖으로 나가는 것. 전원 콘센트를 오래 쓸 수 있고, 몇 시간씩 앉아 있어도 눈치가 덜 보이는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를 전전하는 이른바 ‘카페 유목민’ 생활의 시작이었다.

“하아…… 내 팔자야.”

짐을 대충 바닥에 밀어두고 침대에 몸을 던지려던 해인은, 덮여 있던 이불에 얼굴이 닿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고시원에서 기본으로 제공하는 침구였다. 육안으로는 나름 깨끗하게 세탁된 것 같았지만, 묘하게 꿉꿉한 냄새가 났다. 섬유유연제 향에 섞인, 낯선 타인의 체취 같은 미세한 냄새.

예민한 탓일 수도 있고, 기분 탓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안 그래도 집이 물바다가 되어 쫓겨난 마당에, 이불마저 찝찝한 상태로 덮고 자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유목민 생활 시작하기 전에 빨래부터 하자.”

해인은 침대 패드와 이불을 둘둘 말아 커다란 비닐봉지에 쑤셔 넣었다. 고시원 복도 끝에 공용 세탁기가 있긴 했지만, 누군가 빨래를 돌리고 있는 데다 이 큰 이불을 돌리기엔 용량도 턱없이 작아 보였다.

핸드폰으로 검색해 보니, 고시원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24시간 코인 세탁소가 있었다.

무거운 빨래 봉투를 짊어지고 터덜터덜 걷는 해인의 몰골은 그야말로 피난민이 따로 없었다. 어제부터 이어진 스펙터클한 불운의 연속에 영혼은 이미 반쯤 가출한 상태였다.

‘제발 오늘 하루만 무사히 끝나게 해주세요. 더 이상 스펙터클한 일은 사절입니다…….’

투덜거리며 코인 세탁소의 유리문을 밀고 들어선 순간이었다.

포근하고 따뜻한 섬유유연제 냄새가 훅 끼쳐오는 공간 속, 대형 건조기 앞에서 방금 막 뽀송뽀송해진 세탁물들을 커다란 바구니에 옮겨 담고 있는 한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검은색 후드티에 넉넉한 핏의 검은색 면바지.

꾸밈없이 편안한 차림이었지만, 어깨에서 등으로 떨어지는 선이 묘하게 시선을 끄는 사람.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

해인은 입을 살짝 벌린 채 걸음을 멈췄다.

본문 삽화

꽃집 사장, 원필이었다.

그는 갓 건조되어 나온 따뜻한 수건 더미를 안아 든 채 해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젯밤 편의점 냉장고 앞에서의 우연이 채 가시기도 전이었다. 불과 하루 만에, 그것도 집에서 15분이나 떨어진 이 낯선 세탁소에서 또다시 그를 마주친 것이다.

동네가 좁은 건지, 아니면 자신의 생활 반경이 그쪽으로 이동한 건지.

그런 이성적인 분석은 해인의 머릿속에서 단 1초도 머물지 못하고 날아가 버렸다. 해인의 시신경을 가득 채운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미친…… 오늘도 잘생겼다.’

건조기의 노란 조명 탓인지, 아니면 섬유유연제 향기 탓인지.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넘긴 원필의 얼굴은 일상의 피로마저 잊게 만들 만큼 눈부셨다. 꽃집 안에서의 단정함, 새벽 공원에서의 치명적인 나른함, 편의점에서의 지적인 모습에 이어 이번에는 ‘갓 빨래를 마친 무해한 동네 청년’ 버전이었다. 이쯤 되면 거의 미모로 다단계 영업을 하는 수준이 아닌가 싶었다.

해인은 아침부터 누수로 집을 잃고 고시원을 전전하며 너덜너덜해졌던 멘탈이, 방금 전 1초의 눈 맞춤으로 깨끗하게 다림질되는 기적을 체험했다.

“어.”

원필이 먼저 아는 체를 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의 움직임에는 아주 미세한 멈칫거림이 있었다.

편의점에서 만났을 때처럼 바로 웃으며 인사하는 대신, 그는 수건 더미를 쥔 손에 아주 찰나의 순간 힘을 주었다가 빼며 멈춰 섰다. 무언가 예기치 못한 것을 발견하고 본능적으로 몸이 굳어지는 듯한, 아주 찰나의 정적.

하지만 해인은 그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무거운 빨래 봉투를 든 해인은 그저 아는 사람을 만나 반갑다는 듯 가볍게 목례를 했다.

“안녕하세요. 세탁하러 오셨나 봐요.”

“아…… 네. 손님도, 빨래하시러…….”

“네. 집에 세탁기가 좀 문제가 생겨서요.”

구구절절 윗집 배관이 터져서 물바다가 되었고 고시원에 피난을 왔다는 구차한 사연을 늘어놓고 싶진 않았다. 해인은 대충 얼버무리며 대형 세탁기 쪽으로 걸어갔다.

“오늘은 꽤 멀리까지 오셨네요. 꽃집은 저쪽 역 근처 아니었나요?”

“아…… 집이 이 근처라서요.”

원필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평소의 그 해사한 웃음과는 어딘가 결이 달랐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혹은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미묘하게 차분하게 가라앉은 얼굴이었다.

해인은 그게 그저 빨래를 마치고 피곤해서 그런 것이려니 생각했다.

“그럼 수고하세요. 저는 빨래 좀 돌려야 해서.”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원필이 세탁 바구니를 들고 밖으로 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해인은 세탁기에 이불을 쑤셔 넣고 동전을 털어 넣었다.

세탁기가 경쾌한 기계음과 함께 힘차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뱅글뱅글 돌아가는 비눗물 거품을 멍하니 바라보며, 해인은 남몰래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집은 물바다가 됐고, 당분간 카페 유목민으로 살아야 하는 처참한 신세가 되었지만.

“나쁘지 않네.”

적어도 이런 스펙터클한 불행의 중간중간에, 저런 엄청난 미남의 얼굴로 힐링할 수 있는 우연이 끼어든다면.

해인은 세탁소 안을 가득 채운 다우니 향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피곤하고 꿉꿉했던 하루의 끝.

강해인은 오늘 하루 자신에게 주어진 이 소소하고도 압도적인 시각적 보상을, 아무런 의심 없이 살포시 즐기기로 했다.

그 우연이, 상대방에게는 어떤 의미로 쌓여가고 있는지 전혀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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