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y My DayF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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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05

우연은 두 번까지는 우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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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에서의 그 치명적이었던 새벽 조우 이후.

강해인은 스스로 생각해도 칭찬해 마지않을 초인적인 절제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아무리 머릿속에 가로등 아래의 나른한 실루엣이 아른거려도, 아무리 스케치북 귀퉁이에 무의식적으로 길고 유려한 손가락을 끄적이게 되어도, 해인은 악착같이 ‘주 1회 방문’이라는 철칙을 사수했다.

그녀의 이런 눈물겨운 노력은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여기서 발길을 더 늘렸다가는 정말로 ‘꽃집 사장님에게 수작 부리다 차여서 질척거리는 진상 손님’으로 완벽하게 전락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안전한 1열 관객으로 남기 위해서는 적당한 거리두기가 필수였다.

그렇게 무사히 일주일이 지나가고 있던 어느 새벽 3시.

“……아, 당 떨어져.”

모니터 불빛만 번쩍이는 어두운 작업실 안, 꼬박 7시간째 의자에 들러붙어 있던 해인이 배를 부여잡으며 중얼거렸다.

그림책의 채색 작업은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지만,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한 대가로 뇌의 포도당이 바닥을 드러낸 상태였다. 뭔가 달고, 짜고, 씹을 거리가 간절했다.

해인은 슬리퍼를 질질 끌고 주방으로 나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먹다 남은 생수 반 병, 유통기한이 언제인지 모를 케첩, 그리고 텅 빈 김치통. 완벽한 독거 프리랜서의 참담한 냉장고였다.

‘집 앞 슈퍼마트는 진작에 문 닫았을 텐데.’

해인은 후드 집업을 대충 꿰어 입고 지갑을 챙겼다. 빌라 바로 앞 슈퍼는 자정이면 셔터를 내렸다. 이 시간에 식량을 구하려면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에 있는 24시간 편의점까지 나가야 했다.

인적 끊긴 새벽 골목은 고요했다. 찬 공기를 마시며 걷다 보니 뻑뻑했던 눈이 조금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환하게 불을 밝힌 편의점 안으로 들어선 해인은 곧장 라면 코너와 매대 사이를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초코바 두 개, 매운 컵라면 하나, 그리고 캔맥주. 완벽한 야식 라인업을 품에 안고 음료수 냉장고 쪽으로 코너를 돌던 참이었다.

“……어?”

냉장고 앞에서 유제품을 고르고 있는 익숙하고도 비현실적인 실루엣.

헐렁한 회색 맨투맨 티셔츠에, 뿔테 안경을 쓴 남자.

본문 삽화

꽃집 사장, 원필이었다.

해인은 품에 안은 초코바를 떨어뜨릴 뻔했다.

안경이라니. 안경이라니!

평소의 예민하고 서늘한 인상이 뿔테 안경 하나로 순식간에 지적으로, 그러면서도 어딘가 무방비하게 누그러져 있었다. 안경 너머로 진지하게 딸기 우유의 영양성분표를 들여다보는 그 진지한 얼굴은 또 다른 의미로 치명타였다.

해인이 멍하니 서 있는 사이, 인기척을 느낀 원필이 고개를 돌렸다.

“아.”

원필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이내 부드러운 반달 모양으로 접혔다.

“손님. 또 밤샘이신가 봅니다.”

“아, 네……. 사장님도 안 주무시고요.”

“저는 아까 잠깐 눈을 붙였다가, 목이 말라서 깼거든요.”

꽃집도, 새벽 공원도 아닌, 환한 형광등 불빛 아래의 편의점.

이 시간, 이 좁은 동네에서 마주친 두 번째 우연이었다.

하지만 이번 만남에서 해인은 지난번 공원에서처럼 당황하거나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이건 하늘이 주신 야근 수당이다.’

열심히 일한 자에게 내려지는 달콤한 시각적 보상.

해인은 이 우연을 그저 ‘동네가 좁으니 같은 생활권에 사는 주민끼리 겹칠 수도 있지’ 정도로 가볍게 넘겼다. 애초에 걸어서 출퇴근하는 꽃집 사장님이니, 이 근처에 사는 게 당연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네. 작업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요.”

계산을 먼저 마친 원필이 가볍게 목례를 하고 편의점을 나섰다. 한 손에 딸기 우유가 든 검은 봉지를 달랑거리며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해인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 눈 정화 완벽하게 했다. 들어가서 마저 빡세게 칠해야지.’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온 해인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책상 앞에 앉았다. 미남의 안경 쓴 오프(Off) 모드를 보았으니 뇌에 도파민이 쌩쌩 도는 기분이었다.

딸깍, 딸깍.

마우스 클릭 소리가 경쾌하게 이어졌다. 드디어 막혀 있던 컷의 채색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투둑.

“……응?”

스피커에서 나는 소리인가?

해인은 헤드셋을 한쪽 귀에서 빼고 고개를 갸웃했다.

투두둑. 툭.

분명 집 안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였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듯한 불길한 파찰음.

해인은 의자에서 일어나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불이 꺼져 있던 거실의 스위치를 켠 순간.

“……미친.”

해인의 입에서 육두문자가 튀어나왔다.

거실 한쪽, 부엌과 이어지는 벽면의 실크 벽지가 시커멓게 젖어 울퉁불퉁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황급히 부엌 쪽으로 달려가 천장을 올려다본 해인은 아연실색했다. 형광등 틈새와 천장 몰딩 사이로 물이 뚝뚝, 아니 후두둑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바닥은 이미 흥건하게 물바다가 되어가고 있었다.

“어, 어떡해? 미친, 내 장비!”

도파민이고 나발이고, 현실의 재난 앞에 미남의 잔상은 0.1초 만에 증발했다.

해인의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 ‘내 생명줄과도 같은 6백만 원짜리 신티크(액정 타블렛)와 백업용 외장하드 3개’를 사수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녀는 허둥지둥 싱크대 하부장을 열어젖혔다. 라면 냄비, 프라이팬, 커다란 스텐 다라이까지 눈에 보이는 모든 그릇을 꺼내어 물이 떨어지는 천장 아래로 미친 듯이 깔기 시작했다.

챙! 텅! 톡! 투둑!

냄비와 양푼에 물방울이 부딪히는 끔찍한 불협화음이 온 집안에 울려 퍼졌다.

해인은 곧바로 작업실로 뛰어 들어갔다. 커다란 60리터짜리 플라스틱 리빙박스를 열어젖히고, 그 안에 타블렛, 노트북, 외장하드, 온갖 케이블들을 마구잡이로 쑤셔 넣었다.

“제발, 제발 물 튀지 마라…….”

고가의 전자 기기들이 담긴 리빙박스를 안전한 안방 침대 위로 피신시키고 나서야 해인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새벽 5시.

물바다가 된 거실 바닥을 닦아내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하늘이 야근 수당을 내려준 줄 알았더니, 수당 대신 물 폭탄을 던진 모양이었다.

아침 9시.

이른 시간부터 연락을 받고 달려온 빌라 관리인과 윗집 주인, 그리고 급하게 수소문해 부른 누수 탐지 기사님이 부엌에 모여 섰다.

기사님이 천장의 상태를 살피고 장비로 벽면을 찍어보더니,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이거 온수 배관이 터진 지 꽤 됐네. 벽 타고 천천히 스며들다가 오늘 한꺼번에 터진 거예요. 이거 공사 커집니다.”

“네? 공사요?”

밤새 물을 퍼내느라 다크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온 해인이 쉰 목소리로 물었다.

“윗집 바닥 뜯어서 배관 새로 다 교체해야 하고요. 아가씨 집은 이 젖은 천장이랑 벽지 싹 다 뜯어내고, 곰팡이 안 슬게 콘크리트 말려야 해요. 물먹은 합판은 놔두면 썩으니까 다 철거해야 하고.”

“그거 말리는 데 얼마나 걸리는데요……?”

“날씨가 이래서…… 벽 속까지 바짝 말리고 도배 새로 하려면, 넉넉잡아 한 달은 집 비우셔야 할 텐데.”

한 달.

해인의 눈앞이 아득해졌다. 당장 마감해야 할 외주가 산더미고 그림책 작업도 한창인데, 한 달 동안 이 집에서 쫓겨나야 한다니.

설상가상으로 윗집 주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해인의 남은 이성마저 툭 끊어놓았다.

“아니, 나 일상배상책임보험 그런 거 안 들어놨는데? 그리고 내가 지금 돈이 어딨어. 당장 공사비 댈 돈도 없으니까, 일단 나는 못 해줘요.”

“네? 아니, 아저씨 댁 배관이 터져서 여 집이 물바다가 됐는데 배째라시면 어떡합니까!”

관리인이 나서서 언성을 높였지만, 윗집 주인은 얼굴에 철판을 깐 채 “돈 없는 걸 어쩌라고!”라며 적반하장으로 소리를 질렀다. 흔히 말하는 막무가내 진상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논리 정연하게 따져 물으며 내용증명이라도 운운했을 해인이었다. 하지만 어젯밤의 밤샘 작업과 새벽의 물난리, 뜬눈으로 지새운 피로가 겹친 그녀의 뇌는 더 이상 복잡한 분쟁을 처리할 연산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아, 몰라. 다 필요 없고 그냥 눕고 싶다.’

해인은 길바닥에서 억울하다고 대성통곡하거나 멱살을 잡는 타입이 아니었다. 민망하거나 피곤할수록 오히려 극도로 건조해지는 성격.

지금 그녀에게 가장 시급한 건 윗집과의 법적 공방이 아니라, 당장 오늘 밤 등 붙이고 누울 ‘건조한 바닥’과 타블렛을 연결할 ‘콘센트’였다.

“기사님. 천장 철거는 언제부터 할 수 있죠?”

“돈만 해결되면 내일이라도 당장 사람 부르죠.”

“……알겠습니다. 짐은 오늘 중으로 뺄게요. 아저씨, 배상 문제는 나중에 부동산이랑 법대로 처리할 테니까 일단 공사나 빨리 시작하세요.”

해인은 파리해진 얼굴로 차갑게 쏘아붙인 뒤 안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아버렸다.

털썩.

장비가 가득 담긴 리빙박스 옆에 몸을 구겨 눕히며, 해인은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안양 단기 임대], [동네 원룸 한 달], [근처 고시원]

우연히 마주친 미남 사장님 덕분에 가슴이 몽글몽글했던 새벽 3시의 낭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제부터는 진짜 생존이 걸린, 가혹하고도 처참한 생활 동선의 변화가 시작될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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