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이 일방적인 덕질을 완전히 멈추겠다.’
그렇게 굳게 다짐한 지 정확히 3일 뒤.
강해인은 자신의 결연했던 다짐을 아주 합리적이고도 현실적인 방향으로 수정했다.
‘솔직히, 커피 한 번 까였다고 그 엄청난 미모를 영영 안 보겠다는 건 심각한 낭비이자 오만 아닐까?’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며 해인은 생각했다.
자기가 먼저 김칫국을 사발로 들이켜놓고 혼자 민망해서 발길을 끊기엔, ‘어느 날의 왈츠’ 사장님의 얼굴은 이 동네에 머물기엔 너무나도 압도적인 국가적 인프라였다.
게다가 원필이 자신을 콕 집어 싫어해서 밀어낸 것도 아니었다. 그저 철저하게 사적인 호의를 차단하는, 완벽한 자본주의적 프로페셔널이었을 뿐.
‘그래, 이건 개쩌는 가성비 덕질이다.’
단돈 5천 원짜리 거베라 한 송이, 만 원짜리 캄파눌라 한 다발만 사면 저 미친 얼굴을 1열에서 직관할 수 있다. 심지어 기가 막힌 꽃향기와 완벽한 포장 서비스까지 따라온다. 아이돌 콘서트 티켓팅 피켓팅에 비하면 이 얼마나 혜자스러운 팬 서비스인가.
다만 그간 매일같이 출근 도장을 찍은 건 스스로 생각해도 좀 과하게 질척거린 감이 있었다. 그래서 해인은 나름의 철칙을 세웠다.
주 1회.
딱 일주일에 한 번만 가서 얌전히 꽃만 사고 나오기.
스스로 정한 룰에 따라, 해인은 정말로 일주일에 한 번만 꽃집에 들렀다.
원필은 지난번의 민망했던 '커피 거절 사건'은 완전히 잊은 사람처럼, 변함없이 해사하고 다정한 미소로 해인을 맞이했다. 여전히 선은 그어져 있었지만, 그 선 너머의 태도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해인 역시 더 이상 쓸데없는 사담이나 호의를 건네지 않고, 쿨한 '그림 그리는 단골손님'의 포지션을 충실히 지켰다.
그렇게 완벽한 거리두기와 평화가 찾아온 줄 알았는데.
“……아, 진짜 안 그려지네.”
새벽 2시.
해인은 타블렛 펜을 책상 위에 신경질적으로 던졌다. 또다시 지독한 슬럼프, 아니 작화 블록(Block)이 찾아왔다.
화면 속 온실은 일주일 전보다 단 한 뼘도 진행되지 못한 채 멈춰 있었다. 오히려 더 엉망이었다.
주 1회로 눈 정화 횟수를 줄여서 영감이 부족해진 걸까? 아니면 꽃을 자주 사 오지 않아서 관찰력이 떨어졌나?
핑계를 이리저리 굴려보았지만,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모니터를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으면, 꽃잎과 덩굴이 그려져야 할 자리에 자꾸만 엉뚱한 잔상이 겹쳐 올랐다.
가시를 발라내던 길고 하얀 손가락, 미안하다며 선을 긋던 서늘한 콧대, 커피를 밀어내며 살짝 굳어지던 그 예민한 눈매까지.
식물을 그려야 할 손이 무의식중에 자꾸만 남자의 옆얼굴과 손목 선을 스케치하고 있었다. 해인은 벌써 세 번째 원필의 실루엣을 지워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미쳤나 봐. 나 진짜 단단히 미쳤나 봐.”
시각적 충격이 너무 컸던 탓이다. 잔상이 뇌리에 너무 깊게 박혀버려서 본업까지 방해를 받고 있었다.
이대로 앉아있어 봤자 선 하나 제대로 못 그을 게 뻔했다. 해인은 답답한 속이나 달랠 겸 자리에서 일어났다. 찬 바람이라도 쐬고 오면 환기가 좀 될 것 같았다.
늘 입던 후줄근한 회색 후드 집업을 걸치고 슬리퍼를 직찍 끌며 밖으로 나섰다.
새벽 공기는 제법 차가웠다. 해인의 좁디좁은 생활 반경 안에서 그나마 산책이랍시고 갈 만한 곳은, 빌라 단지 뒤편에 있는 조그만 동네 공원이 전부였다.
터덜터덜 걸어 공원 입구에 들어섰을 때였다.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떨어지는 낡은 벤치에, 누군가 혼자 앉아 있는 실루엣이 보였다. 동네가 조용해서 새벽에 사람이 있는 경우가 드문데.
해인은 무심코 그쪽으로 시선을 던졌다가,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미친.’
가로등 조명 아래, 혼자 벤치에 앉아 캔맥주를 홀짝이고 있는 남자.
단정한 앞치마도 빳빳한 셔츠도 없었다. 넉넉한 회색 후드를 대충 걸쳐 입고, 평소보다 훨씬 부스스하게 흐트러진 앞머리를 한 채 벤치 등받이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사람.

꽃집 사장, 원필이었다.
해인은 반사적으로 가로수 뒤로 몸을 반쯤 숨겼다.
그동안 해인에게 원필은 철저히 '어느 날의 왈츠'라는 예쁜 공간 안에 존재하는 완벽한 피사체였다. 계산대라는 물리적인 선, 그리고 사장과 손님이라는 안전한 경계가 있었기에 '덕질'이라는 가벼운 포장이 가능했다.
그런데 캄캄한 새벽 공원이라는 배경 속에 툭 던져진 그는, 온전히 '현실의 남자'였다.
다정한 미소나 정돈된 친절함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맥주 한 캔으로 피로를 달래는 평범한 이십 대 후반 남자의 나른함. 가로등 불빛이 만들어내는 콧대와 턱선의 짙은 음영은 꽃집 안에서보다 훨씬 치명적이고 서늘했다.
해인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대로 들키기 전에 조용히 돌아가야 했다. 아는 척을 해봤자 "어, 손님" 하며 또 보이지 않는 선을 그을 게 뻔하니까. 저 완벽한 혼술 타임을 방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슬그머니 발길을 돌려 조심스럽게 뒷걸음질을 치려던 찰나였다.
바스락.
어이없게도 슬리퍼가 마른 나뭇잎을 밟는 소리가 새벽 공기를 가르며 크게 울렸다.
“…….”
캔맥주를 입술에 대려던 원필의 고개가 천천히 해인 쪽으로 돌아갔다.
허공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정확히 맞부딪혔다.
도망치려다 한쪽 발을 들고 멈춰버린 엉거주춤한 자세의 해인과, 입가에 맥주 캔을 가져간 채로 눈을 약간 크게 뜬 원필.
짧은 정적이 흐른 뒤, 원필이 먼저 맥주 캔을 내렸다.
“어. 그림 그리시는…….”
이름을 모르는 그는 잠시 호칭을 고르듯 뜸을 들이다가,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꽃집에서 듣던 '솔 톤'의 응대용 목소리가 아니라, 바닥에 낮게 깔리는 편안한 진짜 목소리였다.
“단골손님.”
해인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피할 곳은 없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산책…… 나오셨나 봐요.”
“네. 퇴근하고 답답해서요. 손님도 산책이신가요?”
“아, 저도 뭐, 작업하다가 좀 막혀서 바람 좀 쐬려고…….”
해인은 목 뒤를 긁적이며 벤치에서 세 걸음쯤 떨어진 거리에 어정쩡하게 섰다.
꽃집 카운터를 사이에 두고 영수증을 주고받을 때와는 공기 자체가 달랐다. 차가운 새벽 공기 속에서 은은하게 풍겨오는 알코올 향과 낯선 니트 차림의 그는, 도무지 면역이 되지 않는 부류였다.
원필은 해인의 꾀죄죄한 후드 차림을 쓱 훑어보더니,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밤낮이 완전히 바뀌셨네요. 꽃집 오실 땐 항상 아침이시더니.”
“마감 때가 되면 보통 그렇죠. 사장님은 일찍 출근하셔야 하는데, 늦게까지 안 주무시네요.”
“저는 원래 잠이 좀 없어서요. 머리 좀 식히고 들어갈 참이었습니다.”
원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다시 맥주 캔을 입가로 가져갔다. 꿀꺽, 하고 목울대가 넘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가 대화의 주도권을 쥐여주지 않고 조용히 선을 긋는 것을 느끼며, 해인은 이만 물러나야 할 타이밍임을 직감했다.
“그럼, 맥주 맛있게 드세요.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손님.”
원필은 더 붙잡지 않고 벤치에 기댄 채로 가볍게 목례를 했다. 해인은 서둘러 몸을 돌려 공원을 빠져나왔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찬 바람을 쐬고 났음에도 불구하고, 해인의 심박수는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뛰고 있었다.
가로등 아래서 맥주를 마시던 헐렁한 니트 차림.
나른하게 풀려 있던 서늘한 눈매.
'단골손님' 하고 부르던 그 낮고 무심한 목소리.
해인은 자신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퍽퍽 내리쳤다.
덕질이라고, 얼굴만 감상하는 거라고 합리화하며 애써 거리를 두려던 노력은 방금 전 공원에서의 아주 짧은 조우만으로 완벽하게 무너져 내렸다.
꽃집이라는 공간이 지워진 밖에서 만난 그는, 그저 흔한 '동네 주민 1'로 치부해 버리기엔 너무 위험할 정도로 매력적인 남자였다. 거리를 두겠다고 결심한 게 무색할 만큼, 온통 그 짧은 잔상들이 머릿속을 헤집어놓고 있었다.
작업이 안 풀리는 이유가 영감이 부족해서라고? 꽃을 덜 사 와서 관찰력이 떨어졌다고?
천만에.
해인은 어두운 골목길을 걸으며 절망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꽃집 안의 단정한 사장님이든, 새벽 공원의 나른한 동네 남자이든.
아무튼, 강해인에게는 저 얼굴 자체가 구제 불능의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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