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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03

마음은 정말 잘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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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라도 한 잔 사다 주면서 말도 좀 붙이고 그래야지!’

편의점 온장고 앞에 선 해인의 귓가에 어젯밤 민주가 남긴 일갈이 맴돌았다.

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나란히 진열된 캔커피와 병커피들을 노려보며, 해인은 무려 10분째 치열한 내적 갈등을 겪고 있었다.

너무 싼 캔커피는 성의 없어 보일까? 그렇다고 비싼 유리병 커피를 사면 너무 부담스러워하려나? 아예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테이크아웃해서 갈까? 아니지, 그건 진짜 ‘나 너한테 작업 겁니다’ 하고 광고하는 꼴이잖아.

결국 해인의 선택은 가장 무난하고 대중적인, 그러나 캔보다는 조금 고급스러워 보이는 온장고 속 페트병 라테였다.

따뜻하게 데워진 커피를 손에 쥐자 얼어있던 손끝에 온기가 돌았다. 그래, 이 정도면 딱 좋다. 너무 가볍지도, 너무 무겁지도 않은, ‘단골손님의 소소한 호의’를 빙자하기에 완벽한 아이템.

해인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오늘은 꾀죄죄한 트레이닝복 대신 나름대로 멀쩡한 셔츠와 슬랙스도 주워 입었다.

딸랑-.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평소의 고요하고 차분했던 공기 대신 한껏 들뜬 하이톤의 목소리가 먼저 해인의 고막을 때렸다.

“사장님은 어쩜 매일 봐도 잘생기셨네요. 여자친구 있으세요? 아, 너무 사적인 질문인가?”

카운터 앞에는 한껏 세팅된 머리에 화려한 원피스를 입은 여성 손님이 몸을 기울인 채 원필에게 적극적으로 말을 걸고 있었다.

해인은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추고 진열대 뒤로 몸을 살짝 숨겼다.

원필은 포장하던 꽃가위질을 멈추지 않은 채, 그 해사하고 눈부신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해인의 심장을 덜컹거리게 만들었던 바로 그 웃음이었다.

“칭찬 감사합니다. 꽃다발 다 되었습니다.”

“아, 벌써요? 사장님, 오늘 퇴근하고 뭐 하세요? 제가 이 근처 맛집 아는데, 언제 시간 되시면…….”

“영업이 늦게 끝나서요. 마감하면 바로 들어갑니다.”

원필의 목소리는 한없이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 내용에는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었다. 여성 손님은 포기하지 않고 카운터 위로 예쁜 상자 하나를 슬쩍 밀어 넣었다.

“그럼 이거라도 드세요! 유명한 디저트 카페에서 사 온 마카롱인데, 일하시다가 당 떨어지면 드시라고요.”

“마음은 정말 잘 받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일할 때는 단 걸 안 먹어서요. 꽃향기랑 섞이는 걸 별로 안 좋아하기도 하고요.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손님.”

정중하지만 완벽한 철벽.

원필은 눈웃음을 치면서도 마카롱 상자를 다시 손님 쪽으로 정중하게 밀어냈다. 여성 손님은 아쉬운 듯 입술을 비죽였지만, 원필의 태도가 워낙 부드럽고 젠틀했던 탓에 기분 나쁜 기색 없이 가게를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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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던 해인은, 등 뒤로 숨긴 따뜻한 페트병 커피가 유난히 뜨겁게 느껴졌다.

‘와. 저 얼굴로 장사하려면 저런 손님들 하루에도 트럭으로 상대하겠구나.’

해인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원필의 그 눈부신 미소는 호감의 표시가 아니라, 무수한 플러팅을 방어하기 위해 단련된 완벽한 ‘고객 응대용 방패’였던 것이다.

하지만 해인은 여전히 자신은 조금 다를 것이라 합리화했다.

방금 전 손님처럼 노골적으로 수작을 부리거나 치근덕대려는 게 아니니까. 자신은 그저 ‘꽃을 진지하게 대하는 일러스트레이터’로서, 훌륭한 참고 자료를 찾아준 전문가에 대한 순수한 감사를 표하려는 것뿐이니까.

해인은 마음을 다잡고 카운터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아,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진열대를 돌아 나온 해인을 발견한 원필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방금 전 곤란한 상황을 겪었음에도 그의 얼굴에는 피로한 기색 하나 없었다.

해인은 미리 준비해 둔 핑계 4호를 꺼냈다.

“오늘은 제 건 아니고요. 민주라고, 제 친구가 있는데…… 걔가 며칠 전에 남자친구랑 헤어졌거든요. 기분 전환하라고 한 송이만 사다 주려고요.”

“아, 친구분 선물용이군요.”

원필은 이내 프로의 얼굴로 돌아와 꽃장고 안을 살폈다.

“위로의 의미라면 캄파눌라나 거베라가 좋겠네요. 어느 쪽이 좋으세요?”

“음, 거베라로 할게요. 노란색으로요.”

원필은 조심스럽게 노란색 거베라 한 송이를 꺼내더니, 심플하게 포장을 시작했다.

줄기를 다듬고 리본을 묶는 유려한 손놀림. 해인은 침을 꼴깍 삼켰다. 지금이다. 나는 아까 저 손님처럼 부담스러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어필하면서, 자연스럽게 건네는 거야.

“다 됐습니다. 영수증 필요하세요?”

원필이 결제를 마치고 거베라 한 송이와 카드를 내밀었다. 해인은 카드를 받아 주머니에 넣으며, 등 뒤에 숨기고 있던 따뜻한 페트병 커피를 슬며시 카운터 위로 올려놓았다.

툭.

“이거, 오다 주웠다고 하기엔 좀 그렇고. 아까 저분처럼 부담스럽게 하려는 건 아니고요. 제가 요새 너무 자주 와서 귀찮게 해드린 것 같기도 하고, 매번 꽃도 찰떡같이 골라주셔서 감사해서요. 일하시면서 드세요.”

해인은 내심 원필이 ‘아, 해인 씨는 단골이니까 특별히 받을게요’라며 웃어주길 바랐다. 선을 긋던 그가 나에게만은 작은 호의를 허락해 주는, 그런 유치하지만 달콤한 우월감을 기대했다.

하지만, 해인의 예상과 달리 카운터 너머에는 서늘한 정적이 흘렀다.

“…….”

원필은 커피와 해인을 번갈아 보았다.

조금 전까지 해사하게 웃고 있던 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굳어졌다. 반달처럼 휘어졌던 눈매가 서서히 원래의 날카로운 선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처음 이 가게에 들어왔을 때 보았던, 그 예민한 흑백 느와르의 얼굴이었다.

해인의 심장이 쿵, 하고 불길하게 내려앉았다.

원필이 커피를 해인 쪽으로 슬쩍 밀어내며 입을 열었다. 방금 전 마카롱을 거절할 때와 소름 돋도록 똑같은 패턴이었다.

“저기, 손님.”

손님.

순식간에 거리가 벌어지는 호칭이었다.

원필은 정말 미안하다는 얼굴로, 하지만 너무나도 분명하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마음은 진짜 감사한데요.”

“…….”

“이런 건 안 받기로 했어요. 예전에…… 좀 곤란했던 적도 있고요.”

해인의 머리를 망치로 때리는 듯한 정중한 거절.

원필의 얼굴에는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방어적인 눈빛에서, 해인은 자신이 아까 치근덕대던 그 여성 손님과 완벽하게 동일한 ‘경계 대상’으로 분류되었음을 깨달았다.

자신은 특별한 단골도, 작업으로 교감을 나누는 지인도 아니었다. 그저 ‘꽃집 사장님의 미인계에 홀려 쓸데없는 호의를 베푸는 피곤한 손님 2’일 뿐이었다.

순간 해인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민망함과 알 수 없는 패배감이 몰려왔다. 보통의 여자 주인공이었다면 여기서 얼굴이 새빨개져서 변명을 늘어놓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인은 억울하거나 민망할수록 오히려 이성과 자존심을 꽉 붙잡는 성격이었다.

해인은 얼어붙었던 표정을 빠르게 갈무리하고, 밀려난 커피를 덤덤하게 집어 들었다.

“아. 그러시구나.”

해인의 목소리는 놀라울 만큼 평온하고 건조했다.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괜한 오지랖 부려서 부담스럽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아뇨, 죄송하실 것까지는…….”

“아닙니다. 꽃 감사합니다. 많이 파세요.”

원필이 무어라 덧붙이려 했지만, 해인은 짧게 목례를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걸음걸이의 속도까지 의식적으로 조절했다.

딸랑-.

문이 닫히고 훅 끼치는 바깥의 미지근한 공기를 마주하고 나서야, 해인은 참았던 숨을 길게 토해냈다.

“하아…… 미쳤어, 강해인. 진짜 김칫국을 사발로 들이켰네.”

손에 쥐어진 따뜻한 커피 페트병이 지금 자신의 처지처럼 구차하게 느껴졌다.

해인은 뚜껑을 거칠게 비틀어 열었다.

꿀꺽, 꿀꺽.

아직 따뜻하고 달달한 라테가 식도를 타고 넘어갔지만, 입안에 남는 뒷맛은 지독하게 썼다.

아까 그 손님에게 짓던 미소.

자신에게 꽃을 골라주며 짓던 미소.

선물을 거절할 때 짓던 미안한 표정까지.

그 모든 것은 자신을 향한 특별한 호의나 관심이 아니었다. 그저 ‘어느 날의 왈츠’라는 이 예쁜 공간에 찾아오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지극히 자본주의적이고 직업적인 서비스였을 뿐이다.

누구에게나 친절하지만, 누구에게도 곁을 내어주지 않는 사람.

해인은 빈 커피 페트병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며 쓰게 웃었다.

“아…….”

해인은 중얼거렸다.

“저 다정함은, 철저한 공공재였구나.”

착각의 대가는 꽤나 씁쓸했다.

해인은 손에 들린 노란 거베라 한 송이를 내려다보며, 이제 이 일방적인 덕질을 완전히 멈추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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