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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02

참고 자료는 핑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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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화의 유통기한은 생각보다 짧았다.

일주일 전, 해인의 작업실에 입성해 놀라운 영감과 시각적 충격을 안겨주었던 코랄빛 작약은 며칠 전부터 꽃잎의 끝이 바래기 시작하더니, 오늘 아침 기어이 툭, 하고 무거운 꽃송이를 바닥으로 떨구고 말았다.

책상 위를 장식했던 화려한 생동감이 사라지자, 작업실은 다시 칙칙한 흑백의 공간으로 돌아간 듯했다. 해인은 빈 줄기만 남은 화병을 보며 입술을 비죽였다.

“……참고 자료가 다 떨어졌네.”

참으로 뻔뻔하고도 직업적인 중얼거림이었다. 그림책의 핵심인 온실 씬은 이미 스케치를 넘어 채색 단계에 접어들었건만, 해인은 굳이 ‘색감 참고용’이라는 그럴싸한 명분을 하나 더 덧붙였다.

지갑과 핸드폰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섰다. 어차피 작업실에만 박혀 있으면 몸도 찌뿌둥하니, 산책 겸 다녀오는 건 건강에도 이로울 것이라며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그리고 5분 뒤.

딸랑-.

“어서 오세요.”

가게 문을 열자마자 익숙한 중저음과 함께 눈이 부신 미소가 해인을 반겼다. 해인은 속으로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아, 진짜. 적응 안 되게 생겼네.’

앞치마를 두른 원필은 오늘도 창백하리만치 서늘한 미모를 뽐내고 있었다. 무표정하게 화분을 옮기던 그가 해인을 발견하고 눈매를 반달처럼 휘며 웃을 때마다, 해인의 시신경이 번쩍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일주일 만이시네요. 저번에 사 가신 작약은 다 졌나요?”

“네. 잎이 다 떨어져서…… 오늘은 화병을 좀 사려고요. 저번엔 빈 유리병에 대충 꽂았더니 영 모양이 안 나서요. 아, 화병에 꽂을 꽃도 같이요.”

해인의 핑계 1호가 발사되었다. 원필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게 한쪽에 진열된 화병들로 해인을 안내했다.

유리공예품처럼 투명하고 얇은 화병을 고르는 원필의 길고 단정한 손가락을, 해인은 이번에도 대놓고 감상했다. 저 손은 진짜 보험이라도 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이 화병에는 선이 얇은 델피늄이나 조팝나무를 꽂아두면 그림 그리실 때 선을 관찰하기 좋으실 거예요.”

원필은 해인의 직업(일러스트레이터)을 정확히 기억하고, 그에 맞춘 추천까지 곁들였다. 얼굴도 잘생겼는데 본업까지 완벽하다니. 해인은 감탄하며 지갑을 열었다.

그것이 본격적인 핑계의 서막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어서 오세요.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아, 네. 내일모레가 부모님 결혼기념일이라서요.”

핑계 2호, 부모님 결혼기념일.

물론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평소 같았으면 모바일 상품권이나 송금으로 쿨하게 퉁쳤을 해인이었다. 굳이 양손 무겁게 생화 꽃바구니를 들고 본가로 내려간 덕분에, 해인의 어머니는 “네가 웬일로 이런 짓을 다 하냐. 철들었냐?”며 기함하셨다.

원필이 정성스레 카네이션과 리시안셔스를 엮어 바구니를 만드는 동안, 해인은 카운터에 턱을 괴고 그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꽃줄기를 사선으로 자르는 가위질 소리, 리본을 매듭짓는 단정한 손놀림, 그리고 집중할 때 살짝 내려앉는 곧은 속눈썹.

자료 수집이라는 명목 하에, 해인의 머릿속에는 꽃보다 꽃집 사장님의 시각적 데이터가 더 많이 쌓이고 있었다.

그리고 또 며칠 뒤.

“저기, 사장님.”

“네. 오늘은 어떤 작업 때문에 오셨나요?”

본문 삽화

이제는 원필이 먼저 묻는 지경에 이르렀다. 해인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이번엔 색감 참고용이요. 노란색이랑 파란색이 대비되는 느낌이 필요한데, 모니터로 보는 거랑 실물로 보는 게 달라서요.”

핑계 3호, 색감 대비 연구.

원필은 잠시 고민하더니 샛노란 프리지어와 쨍한 푸른빛의 용담초를 꺼내 들었다.

“이 조합은 어떠세요? 명도 차이가 확실해서 채색하실 때 참고하기 좋으실 겁니다.”

원필은 이제 해인의 작업 프로세스에 거의 보조 어시스턴트 급으로 빙의한 상태였다. 해인은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결제 서명을 갈겼다.

그렇게 2주가 흘렀다.

작업 핑계, 기분 전환 핑계, 친구 선물 핑계, 심지어는 ‘어제 비가 와서 우울하다’는 밑도 끝도 없는 감성 팔이 핑계까지 동원해가며 꽃집의 문턱을 닳도록 넘나든 결과.

“미친…… 여기가 식물원이냐, 작업실이냐?”

해인의 십년지기 절친이자 대학 동기인 민주가 작업실 문을 열자마자 내뱉은 첫마디였다.

민주의 손에는 해인과 함께 먹으려 사 온 엽기떡볶이 봉지가 들려 있었다. 그러나 매콤한 떡볶이 냄새는 작업실 문을 열자마자 훅 끼쳐오는 짙은 풀내음과 꽃향기에 처참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해인의 작업실은 그야말로 꽃밭이었다.

책상 위에는 노란 프리지어와 푸른 용담초가 꽂힌 화병이, 창틀에는 하얀 조팝나무가, 미니 냉장고 위에는 붉은 거베라가 위풍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평소 칙칙한 무채색의 늪 같았던 공간이 순식간에 양재동 화훼공판장 축소판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아, 왔냐.”

해인은 타블렛에서 눈을 떼지도 않은 채 건성으로 손을 흔들었다. 민주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꽃들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너 전공 바꿨어? 원예학과로 편입했냐? 아니면 무당집 차릴 준비 해? 방구석에 웬 꽃이 이렇게 많아!”

“그림책 그린다니까. 이번 씬에 꽃이 많이 들어가서 참고 자료로 산 거야.”

“참고 자료? 야, 이 정도면 온실을 통째로 렌털한 수준이잖아. 너 외주 뛰어서 번 돈 다 여기다 꼴아박았지?”

정곡을 찔린 해인이 흠칫하며 펜을 멈췄다.

물론 떡볶이 봉지를 식탁에 내려놓은 민주의 눈초리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해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강해인. 내가 널 하루 이틀 보냐? 넌 집 밖으로 한 발자국 나가는 것도 끔찍하게 귀찮아하는 인간이야. 그런 애가 꽃이 시들기도 전에 이렇게 종류별로 사다 나른다? 그것도 동네에서?”

민주는 눈을 가늘게 뜨며 결정타를 날렸다.

“어지간히도 잘생겼나 보다?”

“…….”

타블렛 위를 맴돌던 해인의 손이 뚝 멎었다.

아, 역시 십년지기는 무섭다.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르다.

“누가 잘생겨. 그냥 꽃이 싱싱해서 그래.”

“지랄하네. 네가 언제부터 유기농, 친환경, 싱싱함 이런 거 따졌어? 삼각김밥도 유통기한 하루 지난 거 버젓이 씹어 먹는 애가.”

민주가 코웃음을 치며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빨리 불어. 어디야? 역 앞? 아니면 그 세탁소 옆에 새로 생긴 거기?”

“……세탁소 옆.”

결국 해인은 순순히 백기를 들었다. 민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손뼉을 쳤다.

“거기 간판 예쁘더라니. 사장님이 젊어? 훈남이야?”

“훈남 정도가 아니야.”

해인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진지하게 지난 2주간의 데이터를 브리핑하기 시작했다.

“서늘하고 예민한 흑백 느와르 킬러상인데, 웃으면 갑자기 청춘물 남주인공으로 장르가 바뀌어. 피부는 형광등 100개 켜놓은 것처럼 맑고, 쌍꺼풀 얇고 콧대 엄청 높아. 결정적으로…… 손이 미쳤어. 꽃가위질하는데 그 손목 선이 예술이야.”

줄줄 읊어대는 해인의 구체적이고도 노골적인 외모 찬양에, 민주는 입을 떡 벌렸다.

“와, 너 진짜 단단히 미쳤구나? 그래서. 번호는 땄어? 작업은 걸어봤고?”

“무슨 작업을 걸어. 나 그런 거 못 해.”

“답답아! 맨날 집구석에서 그림만 그리더니 연애 세포가 다 말라 비틀어졌냐? 그렇게 뻔질나게 드나들었으면 커피라도 한 잔 사다 주면서 말도 좀 붙이고 그래야지! 맨날 ‘참고 자료 주세요’ 이러고 영수증만 받아오냐?”

“사장님이 일할 때 텐션이 되게…… 범접하기 힘든 프로의 느낌이 있단 말이야. 말 걸면 방해될 것 같기도 하고.”

해인의 변명에 민주는 혀를 끌어찼다.

“어유, 화상아. 돈은 돈대로 쓰고 진도는 하나도 못 빼고. 너 호구 잡힌 거 아니야? 사장님이 속으로 ‘아싸, 저 칙칙한 호구 또 왔네. 오늘은 안 팔리는 꽃 재고처리 해야지’ 이러는 거 아냐?”

“아니거든? 사장님 진짜 친절해. 꽃 조합도 엄청 신경 써서 해주고, 향기랑 선까지 다 고려해서 추천해 준단 말이야.”

“그게 상술이야, 이 바보야! 친절한 척하면서 지갑 털어가는 거!”

민주의 현실적인 타박에 해인은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굳이 더 반박하지 않았다.

떡볶이 포장을 뜯으며 민주가 투덜거렸다.

“아무튼, 이번 주말에 나랑 같이 가. 그 킬러상인지 뭔지 내 눈으로 직접 견적 좀 봐야겠다.”

“안 돼. 나 단골이라 사장님이 얼굴 아는데, 너 데려가면 너무 티 나잖아.”

“무슨 티? 친구가 꽃집 구경 좀 하겠다는데! 야, 빨리 젓가락이나 가져와.”

민주와의 소란스러운 저녁 식사가 끝나고, 밤이 깊어서야 작업실에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민주가 휩쓸고 간 자리를 대충 치운 해인은 책상 앞에 멍하니 앉아 프리지어 화병을 바라보았다.

‘어지간히도 잘생겼나 보다?’

민주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부정할 수 없었다. 참고 자료, 색감 연구, 기분 전환. 그 모든 건 그저 다 큰 어른이 자기합리화를 위해 갖다 붙인 알량한 핑계에 불과했다.

자신은 그저, 그 서늘하고도 다정한 미소가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그 유려한 손가락이 식물을 다루는 모습을 감상하고 싶어서 그 꽃집의 문지방을 닳도록 넘나든 것이다.

해인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부끄러움이 뒤늦게 밀려왔다.

“이건 뭐…….”

가슴이 찢어지게 아픈 짝사랑이나, 우연이 겹쳐 운명이 되는 로맨틱한 서사 같은 게 아니었다.

이 감정의 본질은 훨씬 더 단순하고 일방적이었다.

“거의 실물 볼 수 있는 아이돌 덕질이잖아.”

얼굴 천재, 본업 천재, 다정한 팬 서비스(상술).

자신은 그저 앨범을 깔별로 사 모으는 수니처럼, 꽃을 종류별로 사 모으며 미모의 사장님을 감상하는 안방 팬 1열에 불과했다.

엄청나게 돈이 많이 드는, 아주 건전하고도 은밀한 덕질.

해인은 책상에 이마를 콩 박으며 중얼거렸다.

“내일은 커피라도 사다 드려볼까…….”

입으로는 상술에 낚인 호구라고 자조하면서도, 해인의 머릿속은 벌써 내일 꽃집에 갈 구실과 동선을 짜느라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단단히 감겨버린, 노답 1열 팬의 탄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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