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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21

얼굴이 곧 개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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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인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그녀의 이성으로 도무지 통제가 되지 않았다.

“해인 씨. 오늘 마감이죠? 당 떨어질 텐데 이거 먹으면서 해요.”

가벽 너머로 불쑥 나타난 김원필이, 고급스러운 수제 초콜릿 상자를 해인의 노트북 옆에 내려놓았다. 걷어붙인 셔츠 소매 아래로 잔근육이 잡힌 팔뚝, 은은하게 풍기는 생화 향기, 그리고 무엇보다 저 미치도록 잘생긴 얼굴이 자신을 향해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해인의 심장은 이미 백기 투항을 한 지 오래였다.

‘아니, 솔직히 저 얼굴로 매일같이 들이대는데 안 넘어가는 여자가 세상에 어딨어? 내가 무슨 목석도 아니고.’

해인은 속으로 절규했다.

본업 존잘에, 성격 다정하고, 얼굴은 매일 봐도 짜릿할 만큼 완벽하다. 게다가 나한테 푹 빠져서 안달이 났다고 대놓고 선언까지 했다.

로맨스 판타지 소설에나 나올 법한 완벽한 남주인공이 제 발로 걸어 들어왔는데, 밀어내는 건 말도 안 되는 바보짓이었다.

해인도 김원필이 좋았다. 너무 좋아서 심장이 남아나질 않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딱 하나, 해인의 발목을 잡는 찝찝한 의문이 있었다.

‘근데 대체 왜 나한테?’

김원필 정도의 외모와 능력이면 줄을 서는 여자들이 트럭으로 한가득일 텐데. 왜 굳이 윗집 누수 때문에 고시원을 전전하며, 매일 후드 티를 뒤집어쓰고 마감에 찌들어 있는 자신에게 꽂힌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혹시 내 얼굴이 취향인가? 아니면 불쌍해서? 그것도 아니면 무슨 내기라도 하나?

그 지독한 인지부조화를 참다못한 해인이 결국 펜을 탁 내려놓았다.

“원필 씨.”

“네.”

원필이 초콜릿 포장을 뜯어주려다 말고 다정하게 눈을 맞췄다. 해인은 마른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는 돌직구를 날렸다.

“원필 씨, 저 진짜 진지하게 묻는 건데요.”

“네, 물어봐요.”

“원필 씨, 저 왜 좋아해요?”

해인의 뜬금없고 직설적인 질문에 원필의 눈이 살짝 커졌다.

“솔직히 말해서 원필 씨 정도면, 저보다 훨씬 예쁘고 잘난 사람들 얼마든지 만날 수 있잖아요. 근데 왜 하필 저예요? 제가 맨날 여기서 작업만 하니까 만만해 보였어요? 아니면 갑자기 제가 너무 불쌍해져서 동정심에…….”

“해인 씨.”

원필이 해인의 말을 자르며 의자를 끌어당겨 그녀의 마주 앉았다.

“동정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럼 대체 갑자기 왜 들이대신 건데요. 우리가 뭐 대단한 서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사장님과 단골손님이었잖아요. 저는 솔직히…… 원필 씨가 너무 좋은데, 갑자기 이러시니까 현실감이 없어서 좀 무서워요.”

해인의 솔직한 고백에, 원필의 입술 끝이 호선을 그리며 부드럽게 말려 올라갔다.

본문 삽화

‘내가 좋대. 강해인이 내가 너무 좋대.’

속으로 쾌재를 부른 원필은, 이제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느끼는 이 비현실적인 괴리감을 채워줄 완벽한 조각이 자신에게는 있었다.

원필은 책상 위로 몸을 살짝 기울이며 해인과 시선을 맞췄다.

“우리, 대단한 서사 있어요.”

“……네?”

“제가 갑자기 들이댄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원필이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또박또박 말을 뱉기 시작했다.

“연희동, 소리나무 피아노 학원.”

그 단어가 나오는 순간, 해인의 미간이 좁아졌다. 어제 자기가 신나게 떠들었던 그 피아노 학원 이름 아닌가.

“로비 소파에 앉아서 누나 올 때까지 매일 울던 애한테, 포도 맛 사탕 까서 입에 넣어주던 단발머리 누나.”

“……어?”

“체르니 30번 들어가면 피자 파티 한다고 꼬드기던 원장님. 그리고…… 유치원 화단에서 꺾어온 찌그러진 민들레꽃 주면서 나중에 커서 꼭 결혼하자고 졸랐던, 그 울보 꼬맹이 김원필.”

해인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거세게 흔들렸다.

머릿속에서 20년 전 콧물을 훌쩍이던 뽀얀 얼굴의 꼬마와, 지금 눈앞에서 숨 막히게 잘생긴 얼굴로 미소 짓고 있는 김원필의 얼굴이 무서운 속도로 오버랩되었다.

“……너.”

“기억나요, 누나?”

누나.

그 낮고 짙은 호칭이 해인의 고막을 강타했다. 해인은 입을 떡 벌린 채 손으로 제 입술을 틀어막았다.

“너, 너…… 네가 그 꼬맹이라고? 원장님 아들, 걔?!”

“네. 사탕 하나에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던, 누나 졸졸 따라다니던 그 김원필 맞습니다.”

해인은 뇌 회로가 완전히 정지하는 기분을 느꼈다.

이게 대체 무슨 미친 확률인가. 자신이 매일 밤 훔쳐보며 크로키를 하던 이 얼굴 천재가, 자신이 귀여워하며 사탕을 쥐여주던 그 꼬맹이었다고?

“처음엔 저도 몰랐어요. 스토커인 줄 알고 경계하다가, 고시원 사는 거 알고 미안해서 작업실 내준 거 맞아요. 근데 옆에서 그림 그리는 거 보면서, 같이 밥 먹으면서…… 이미 해인 씨라는 사람한테 완전히 반해있었거든요.”

“…….”

“근데 어제, 해인 씨 입에서 피아노 학원 얘기가 나오는 순간. 그냥 머릿속에서 퓨즈가 끊어지더라고요. 아, 이 여자는 처음부터 내 사람이 될 운명이었구나, 싶어서.”

원필의 눈빛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제야 해인의 머릿속을 맴돌던 모든 의문과 괴리감이 한순간에 증발해 버렸다.

왜 이 완벽한 남자가 자신에게 맹목적으로 들이댔는지.

얼굴이라는 최고의 개연성에, ‘20년 전의 첫사랑’이라는 완벽한 서사까지 얹어졌다. 이보다 더 납득이 가는 로맨스가 세상에 또 있을까?

머리 아프게 잴 필요가 없었다. 저 잘생긴 남자가, 무려 20년 전부터 이어져 온 인연으로 나를 이렇게 간절하게 원하고 있다는데.

해인의 멍했던 얼굴에 서서히,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해인이 헛기침을 하며, 애써 솟아오르는 광대를 꾹 눌러 내렸다.

“그 민들레꽃 주면서 했던 프러포즈, 아직 유효한 거예요?”

이번에는 원필의 눈이 동그랗게 커질 차례였다.

항상 당황해서 도망치기 바빴던 해인이, 먼저 당돌하게 훅 치고 들어온 것이다.

원필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참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너무 섹시해서 해인은 또 한 번 심장을 부여잡아야 했다.

원필이 해인의 손을 가져가 자신의 커다란 두 손으로 소중하게 감싸 쥐었다.

“당연하죠. 유효기간 무제한입니다.”

그가 해인의 손등에 아주 가볍게, 깃털처럼 입술을 내렸다 떼며 눈을 맞췄다.

“그러니까, 이제 헷갈려 하지 말고 나랑 연애해요. 해인 씨.”

그의 완벽한 얼굴과 그보다 더 완벽한 미소 앞에서, 거절이라는 단어는 해인의 사전에서 영원히 삭제되었다.

“……콜. 오늘부터 1일 해요, 우리.”

가벽 너머로 스며드는 은은한 꽃향기와 함께, 좁은 작업실 안이 핑크빛으로 완벽하게 물드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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