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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01

미인계에 걸린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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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터 우측 하단의 디지털시계가 오전 8시 43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끝.”

강해인은 타블렛 위를 맴돌던 펜을 내려놓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뻐근하게 굳은 목을 이리저리 꺾자 뚜둑, 하고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렸다.

화면 속에는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맞춰 채도를 낮추고 텍스트 박스를 키운 배너 일러스트가 띄워져 있었다. 파일명은 ‘[외주]H사_가을프로모션_메인배너_수정_최종_진짜최종_이게마지막.psd’였다.

단축키를 눌러 파일을 저장하고 메일에 첨부해 전송 버튼을 누르는 순간, 지난 밤새 혈관을 타고 흐르던 옅은 아드레날린이 차갑게 식으며 지독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아, 살았다.”

양손으로 거칠어진 얼굴을 쓸어내리자 손가락 끝에 옅은 연필심 가루와 지우개 똥이 묻어났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지금 자신의 꼴이 얼마나 처참할지 눈에 훤했다. 대충 틀어 올린 머리는 까치집이 되어 있을 테고, 눈 밑에는 무릎까지 내려올 듯한 다크서클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메일 전송이 완료되었다는 알림창을 확인한 해인은 뻑뻑한 눈을 비비며 작업 표시줄에 내려두었던 다른 창을 띄웠다.

[ 차기작_더미북_스케치_12p.clip ]

화면이 전환되자마자 해인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조금 전까지 작업했던 광고 외주는 그저 통장 잔고를 유지하고 작업실 월세를 내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해인의 진짜 본업이자, 현재 그녀의 영혼을 가장 갉아먹고 있는 메인 작업은 바로 이 그림책이었다.

“……안 예뻐.”

화면 속 스케치를 노려보며 해인은 중얼거렸다.

해당 페이지는 주인공이 비밀스러운 온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꽃과 덩굴들을 마주하는 핵심 작화 구간이었다. 독자가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압도적인 생동감과 향기를 시각적으로 느껴야만 하는 중요한 장면.

그런데 해인이 그린 꽃들은 어딘가 납작했다. 조화처럼 딱딱하고 생기가 없었다.

이틀째 핀터레스트와 구글 이미지를 뒤지며 온갖 꽃 사진을 참고했지만, 모니터라는 평면을 거쳐 들어온 자료들은 손끝에서 입체적으로 살아나지 않았다.

“안 되겠다. 진짜를 좀 봐야지.”

해인은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났다. 평면적인 사진 백 장보다, 눈앞에서 직접 보는 생화 한 송이의 선과 질감이 훨씬 직관적인 영감을 줄 때가 있다.

해인은 작업용 앞치마를 훌렁 벗어 의자에 걸쳐두고, 대충 눈에 띄는 검은색 볼캡을 푹 눌러썼다. 회색 트레이닝복 바지에 헐렁한 반팔 티셔츠, 그리고 삼선 슬리퍼. 동네 백수라 해도 믿을 완벽한 생활 밀착형 차림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나서자 아침 9시의 눈부신 햇살이 폭력적으로 쏟아졌다. 밤을 새운 야행성 인간에게 아침 해는 거의 흡혈귀가 햇빛을 맞는 수준의 타격감을 주었다.

“아, 눈부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바닥만 보고 걸었다. 해인의 생활권은 극단적으로 좁았다. 이 동네의 이 낡은 빌라에서 몇 년째 살고 있지만, 그녀가 아는 동선이라고는 집, 작업실, 그리고 골목 어귀의 편의점이 전부였다. 동네에 어느 식당이 새로 생겼고 어느 미용실이 머리를 잘하는지 따위는 해인의 관심 밖이었다.

꽃을 사려면 역 근처 번화가까지 나가야 하나. 피곤한데 그냥 다시 들어갈까.

그런 타협안이 스멀스멀 머리를 들 때쯤이었다.

늘 지나치던 코인 세탁소 옆, 오랫동안 비어있던 상가 자리에 무언가 낯선 풍경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어?”

회색빛 콘크리트와 붉은 벽돌이 전부인 삭막한 골목에, 이질적일 만큼 화사하고 정돈된 공간 하나가 불쑥 끼어들어 있었다.

깨끗하게 닦인 통유리창, 은은한 크림색 어닝, 그리고 그 아래로 무심한 듯 감각적으로 배치된 크고 작은 토분들.

해인은 슬리퍼를 끌던 발걸음을 멈추고 가게 위쪽에 달린 작고 단정한 나무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 어느 날의 왈츠 ]

누가 봐도 꽃집이었다.

‘우리 동네에 꽃집이 있었나?’

해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언제 오픈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집에서 걸어서 3분도 안 되는 거리에 이런 곳이 생겼다는 걸 여태 몰랐다는 사실이 새삼 자신의 좁은 생활 반경을 실감케 했다.

유리창 너머를 기웃거려보았다. 오전 9시. 갓 문을 연 듯 가게 안은 손님 없이 고요했다. 입구에는 ‘OPEN 09:00 - CLOSE 21:00’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마침 잘됐네. 멀리 갈 필요도 없고.’

해인은 주저 없이 가게 문손잡이를 당겼다.

딸랑-.

맑고 가벼운 종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서늘하게 에어컨이 돌아가는 공기 위로 확연히 다른 종류의 향기가 덮쳐왔다. 물을 흠뻑 머금은 흙냄새, 쌉싸름한 풀내음, 그리고 코끝을 맴도는 짙고 달큰한 꽃향기.

해인은 잠시 그 향기에 압도되어 숨을 들이켰다. 가게 내부는 밖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넓고 쾌적했다. 잡다한 소품으로 억지스럽게 꾸며놓은 게 아니라, 식물과 꽃 자체가 온전히 돋보이도록 여백을 살린 탁월한 미감이 엿보이는 공간이었다.

“저기요.”

인기척을 내며 해인이 안쪽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이었다.

가게 가장 안쪽, 커다란 작업용 테이블 앞에 서 있던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앞치마를 두르고 장미 가시를 다듬고 있던 남자의 얼굴이 해인의 시야에 온전히 담겼다.

“…….”

해인은 하마터면 속으로 헉, 소리를 낼 뻔했다.

시선을 사로잡은 건 꽃이 아니었다. 남자였다.

햇빛이 잘 드는 창가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피부는 서늘하게 느껴질 만큼 창백하고 맑았다. 이마를 자연스럽게 덮은 부스스한 흑발 아래로, 짙고 곧게 뻗은 눈썹이 뚜렷했다.

본문 삽화

무엇보다 인상을 지배하는 건 그 선들이었다. 얇은 쌍꺼풀이 진 긴 눈매는 날카로웠고, 일자로 반듯하게 떨어지는 높은 콧대는 베일 듯 예리했다. 굳게 다문 입술은 꼬리가 약간 아래로 처져 있어 전체적으로 쉽게 다가가기 힘든, 조각 같지만 서늘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마치 정교하게 깎아놓은 얼음조각 같았다. 아니, 분위기만 놓고 보면 흑백 느와르 영화에 나오는 예민하고 서늘한 킬러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뭐야. 동네 꽃집에 무슨 저런 미인계가…….’

해인이 너무 놀라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치려던 찰나였다.

시선이 마주친 남자가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전지가위를 내려놓으며 해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어서 오세요.”

조금 전의 그 서늘했던 얼굴이, 마치 거짓말처럼 허물어졌다.

무표정 아래 숨어있던 눈매가 부드러운 반달 모양으로 휘어지며 접혔다. 날카로워 보였던 눈 밑으로 도톰한 애교살이 차올랐고, 둥글게 풀린 뺨선 위로 환하고 맑은 미소가 번졌다. 단정하고 하얀 치아가 드러나며 웃는 얼굴은, 방금 전의 그 예민한 조각상과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방금까지 흑백 느와르였던 장르가 순식간에 청춘 로맨스 영화로 바뀌는 기적의 1초.

해사하다 못해 소년 같기까지 한 그 엄청난 간극에 해인은 뇌가 정지하는 것을 느꼈다.

“일찍 오셨네요. 찾으시는 꽃 있으세요?”

목소리마저 완벽했다. 귀에 편안하게 감기는 차분하고 낮은 중저음이었다.

해인은 멍청하게 벌어지려던 입을 꾹 다물고, 애써 직업적이고 이성적인 자아를 끌어올렸다.

“아, 그게…….”

말을 더듬던 해인의 시선이 남자의 얼굴에서 내려와, 그의 앞치마 위로 모아진 손에 머물렀다.

무의식적인 직업병이 발동하는 순간이었다.

해인은 사람을 볼 때 얼굴만큼이나 골격과 선, 특히 손을 유심히 보는 버릇이 있었다. 남자의 손은 해인이 지금껏 보아온 어떤 손보다도 피사체로서의 가치가 뛰어났다.

크고 우락부락하게 핏줄이 도드라진 상남자의 손이 아니었다. 손가락이 길고 관절의 뼈대가 얇고 단정했다. 연약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식물의 줄기나 꽃잎처럼 예민한 것들을 훼손하지 않고 정교하게 다루기에 최적화된, 아주 아름다운 선을 가진 손이었다.

저 손이 펜이나 붓을 쥐고 있다면, 아니, 얽혀있는 꽃줄기를 쥐고 있는 저 손의 형태를 당장 스케치북에 러프하게 담아내고 싶었다. 손목에서 이어지는 저 유려한 선을…….

“손님?”

부드럽게 부르는 목소리에 해인은 번쩍 정신을 차렸다. 미친, 처음 보는 남자 손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침을 흘릴 뻔했다. 해인은 모자챙을 꾹 눌러 얼굴을 조금 가리며 황급히 용건을 꺼냈다.

“그…… 작업실에 꽂아 둘 건데요. 화사한 걸로요.”

“작업실이요. 특별히 선호하시는 색감이나 종류가 있으실까요?”

“제가, 그…… 그림을 그리는데요.”

해인은 묻지도 않은 자신의 직업을 주절주절 늘어놓기 시작했다. 왠지 자신이 아침 9시부터 씻지도 않고 꾀죄죄한 몰골로 기어나와 미남 사장님을 감상하러 온 수상한 동네 백수로 보일까 봐 무의식적인 방어기제가 작동한 탓이었다.

“작업이 좀 막혀서요. 꽃이 잔뜩 들어가는 장면인데 잘 안 그려져서…… 자료 삼아 보려고요. 그러니까, 예쁜 것도 좋은데 좀 생동감 있고, 잎사귀나 꽃잎 모양이 뚜렷해서 스케치하기 좋은…… 아니, 그냥 사장님이 알아서 적당히 섞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횡설수설, 구차하고 맥락 없는 설명이었다. 해인은 민망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남자는 귀찮은 내색 하나 없이, 오히려 진지한 얼굴로 해인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그는 턱을 살짝 괸 채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작업이 막히셨을 때 환기할 목적이시라면, 단순히 색이 쨍한 것보다는 선의 흐름이 보이고 향이 은은한 게 더 도움이 되실 거예요. 시각적으로 덜 피로하거든요.”

남자는 그 길고 단정한 손을 뻗어 물통에 담긴 꽃들을 신중하게 골라내기 시작했다.

“메인으로는 코랄빛이 도는 작약을 쓸게요. 꽃잎이 겹겹이 피어나는 형태라 스케치하시기 재미있을 겁니다. 그리고 라인을 살리기 좋은 스위트피와, 여백을 채워줄 옥시를 조금 섞어 드릴게요.”

남자가 꽃을 조합하고, 불필요한 잎을 떼어내고, 가지런히 모아 쥐는 과정을 해인은 홀린 듯이 지켜보았다.

꽃과 미감에 있어서만큼은 확고한 전문성이 엿보였다. 손님의 횡설수설한 요구 속에서 정확한 니즈를 파악하고, 그에 맞는 최적의 조합을 망설임 없이 뽑아내는 태도는 완벽한 프로의 그것이었다.

해인은 타인의 전문적인 모습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자기 일에 몰두하는 사람 특유의 단단한 텐션이 이 작은 꽃집 사장님에게서 느껴졌다.

남자는 화려한 포장지 대신, 꽃의 색감이 돋보이도록 깔끔한 크라프트지와 무명 리본으로 심플하게 포장을 마무리했다.

“물은 하루에 한 번 갈아주시고, 줄기 끝은 사선으로 조금씩 잘라주시면 더 오래 보실 수 있을 거예요.”

계산대에 놓인 단말기에 카드를 꽂으며, 남자가 다정하지만 일정한 선을 긋는 듯한 정중한 어투로 설명했다. 영수증과 함께 건네받은 꽃다발은 해인의 품에 딱 기분 좋게 안기는 사이즈였다.

“감사합니다.”

해인이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설 때까지, 남자는 그 맑고 해사한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작업도 잘 풀리시길 바랄게요.”

딸랑-.

다시 종소리가 울리고 가게 밖으로 나왔을 때, 해인은 품에 안긴 꽃다발에서 훅 끼쳐오는 향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피로에 찌들어 있던 머릿속이 박하사탕을 먹은 듯 화하게 뚫리는 기분이었다.

터덜터덜 걸어 작업실로 돌아온 해인은 곧장 싱크대로 향했다. 남자가 일러준 대로 유리 화병에 깨끗한 물을 담고, 가위로 줄기 끝을 사선으로 잘라낸 뒤 꽃들을 꽂았다.

지저분한 케이블과 펜 타블렛, 널브러진 참고 자료들로 엉망진창이던 책상 한구석에 생화가 놓이자, 마치 흑백 화면에 컬러 조명이 켜진 듯 공간의 공기가 달라졌다.

해인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화병을 가만히 응시했다.

작약의 탐스러운 꽃잎, 스위트피의 여리여리한 선.

그리고, 그 꽃들을 다루던 길고 하얀 손.

무표정일 때의 서늘한 콧대와, 웃을 때 반달처럼 휘어지던 눈매.

“…….”

멍하니 허공을 보던 해인은 불현듯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타블렛 펜을 집어 들었다.

며칠째 아무리 선을 그어도 납작하고 죽어 보이던 온실의 스케치 레이어 위에 새로운 선을 긋기 시작했다. 손목의 스냅이 가벼워졌다. 눈앞에 놓인 꽃의 둥근 입체감과, 그 꽃을 무심하고도 정교하게 쥐던 손의 우아한 선율이 머릿속에서 얽히며 화면 위로 쏟아져 내렸다.

사각, 사각, 사각.

펜촉이 액정을 미끄러지는 소리만이 조용한 작업실을 채웠다. 꽉 막혀 있던 하수구가 뻥 뚫린 것처럼, 생기를 잃었던 덩굴과 꽃잎들이 해인의 손끝에서 입체적으로 피어나기 시작했다.

작업은 점심시간을 훌쩍 넘겨 해가 머리 위로 솟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마침내 며칠을 골머리 썩였던 페이지의 구도가 완성되었을 때, 해인은 만족스럽게 펜을 내려놓았다.

그녀의 시선이 다시 한번 책상 위 꽃다발로 향했다.

참고 자료는 충분했다. 아니, 자료 그 이상의 선명한 이미지가 망막 뒤편에 지워지지 않는 잔상처럼 남았다.

해인은 가늘게 눈을 뜨며, 방금 전 자신이 그린 스케치 하단에 남은 익숙한 실루엣을 톡톡 건드렸다. 꽃줄기 사이로 어렴풋이 겹쳐 보이는, 누군가의 길고 단정한 손의 궤적을.

“……생동감 하나는 확실하네.”

햇살이 닿은 작약 꽃잎이 조금 더 활짝 벌어지고 있었다.

강해인의 차기작에, 처음으로 동네의 낯선 향기가 배어든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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