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필의 입에서 나온 그 직설적이고도 낯간지러운 대사에, 해인은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버렸다.
밤공기는 분명 서늘했는데, 목덜미로 훅 끼쳐오는 열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해인이 멍하니 입술만 달싹이는 사이, 원필은 아주 자연스럽게 한 걸음 더 다가와 해인의 어깨에 걸린 무거운 백팩 끈을 쥐었다.
“가방 주시죠.”
“아, 아니요! 괜찮다니까요. 매일 메고 다니던 건데 뭘…….”
“어깨 끈 팽팽해진 거 다 보입니다. 주세요.”
해인이 뒷걸음질을 치며 방어하려 했지만, 원필은 다정하면서도 단호한 힘으로 가방을 가로챘다. 한쪽 어깨에 5kg이 넘는 쇳덩어리 백팩을 짊어지고도, 그는 아무렇지 않게 해인의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사각, 사각.
인적 드문 밤 골목. 두 사람의 발소리가 유독 크게 울려 퍼졌다.
고시원까지는 성인 여성의 걸음으로 5분. 뛰면 3분 컷인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다. 평소 같았으면 아무 생각 없이 터덜터덜 걸었을 그 짧은 골목길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한없이 길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해인은 이 어색하고 간지러운 침묵을 참지 못하고 기어이 입을 열었다.
“저기, 사장님.”
“네.”
“오늘 갑자기 왜 이러시는지, 제가 생각을 좀 해봤거든요.”
원필이 고개를 돌려 해인을 바라보았다. 가로등 불빛에 비친 그의 콧대가 무서울 정도로 단정해서, 해인은 침을 꿀꺽 삼키며 애써 말을 이었다.
“제가 고시원 살고 집도 없어서 짠해 보이시는 거죠? 윗집 누수 터져서 짐 바리바리 싸 들고 다니는 게 불쌍해서, 사장님이 워낙 배려심 넘치는 분이라 단골손님 서비스 차원에서 이러시는 건가 싶기도 하고요.”
나름대로 논리적이라고 생각하며 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진짜 그러실 필요 없거든요. 그거 동정이에요. 제가 좀 고생하는 것 같으니까 챙겨주고 싶으신 모양인데, 사장님이 자꾸 이렇게 과하게 잘해주시면 제가 부담스러워서 작업을 못 한다니까요.”
원필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해인도 엉거주춤 멈춰 서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원필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한 번 터뜨리더니, 해인 쪽으로 바짝 몸을 틀었다.
“해인 씨.”
“네, 네?”
“제가 그렇게 한가해 보입니까.”
원필의 목소리는 한없이 낮고 차분했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불쌍해서요? 단골손님 한 명 짠하다고 매일 야식 챙겨주고, 밤마다 내 개인 작업실 내주고, 퇴근길에 집 앞까지 가방 들어다 줄 정도로 제가 여유 넘치는 사람처럼 보이냐고요.”
“그, 그건…….”
“해인 씨.”
원필의 시선이 해인의 흔들리는 동공을 단단하게 얽어맸다.

“어떤 미친놈이 불쌍하다고 남 일하는 걸 구경합니까. 예쁘다고 대놓고 플러팅하면서.”
해인은 머릿속이 하얗게 표백되는 기분을 느꼈다.
“동정 아닙니다. 제가 지금 해인 씨한테 이렇게 유치하게 티 내는 건…….”
원필이 해인에게로 한 뼘 더 다가왔다. 그의 숨결이 이마에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그가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관심 있어서 들이대는 겁니다. 그러니까 헷갈리지 마세요.”
쾅.
해인의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동정심도, 사장님의 친절도 아니었다. ‘들이대는 겁니다’라는 단어가 김원필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해인의 머릿속은 수천 볼트의 전기가 통한 것처럼 짜릿하고 아득해졌다.
“아, 아니…… 사장님 같은 분이 왜 저한테…….”
“다 왔네요. 고시원 앞.”
해인이 횡설수설하는 사이, 어느새 두 사람은 낡은 고시원 건물 앞에 도착해 있었다.
원필은 어깨에 메고 있던 해인의 백팩을 내려 그녀에게 건넸다. 가방을 받아 든 해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올라가서 푹 쉬어요. 내일도 올 거죠?”
“……가야죠. 짐 거기 다 있는데.”
“다행이네요. 도망갈 구실이 없어서.”
원필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해인의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가, 닿지 않고 허공에서 멈췄다. 대신 그는 해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잘 자요, 해인 씨.”
다음 날.
해인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무거운 발걸음으로 ‘어느 날의 왈츠’ 문을 열었다.
간밤에 고시원의 좁은 침대 위에서 이불을 걷어차며 수백 번도 넘게 어제의 상황을 복기했다.
[관심 있어서 들이대는 겁니다.]
그 미친 대사가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아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최대한 쿨하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하자. 나는 프로다.
그렇게 다짐하며 가벽 안쪽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켰지만, 김원필은 오늘 작정한 모양이었다.
탁.
해인의 마우스 옆으로 예쁜 접시 하나가 놓였다. 어제는 마카롱이더니, 오늘은 윤기가 흐르는 초콜릿 무스 케이크였다.
“당 떨어지면 드시면서 하세요.”
원필은 굳이 카운터로 돌아가지 않고, 해인의 테이블 맞은편에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그리고 어제처럼 턱을 괸 채, 노골적으로 그녀를 빤히 응시하기 시작했다.
사각, 사각.
해인은 식은땀을 흘리며 타블렛 펜을 쥐었다. 정수리 위로 쏟아지는 그 집요하고도 다정한 시선을 도저히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선을 그어야 할 타이밍에, 펜이 미끄러지며 지독한 지그재그 선이 그어졌다.
“…….”
해인은 입술을 꽉 깨물고 [Ctrl+Z]를 눌러 선을 지웠다.
다시, 심호흡을 하고 사각.
이번에는 아예 선이 바깥으로 크게 삐져나갔다. 해인의 손목이 덜덜 떨리고 있는 탓이었다.
머리 위에서 바람 빠지는 듯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수전증 있으십니까.”
그 나지막하고도 명백히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에, 해인의 수치심이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아니거든요!”
해인이 펜을 탁 내려놓으며 고개를 홱 치켜들었다.
“누가 앞에 앉아서 그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까 신경 쓰여서 그런 거잖아요! 부담스러워 죽겠는데 어떻게 집중을 해요!”
스스로 생각해도 앙칼지고 날 선 반응이었다. 이 정도 쏘아붙였으면 무안해서라도 자리로 돌아갈 줄 알았다.
하지만 원필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턱을 괴고 있던 손을 풀더니, 테이블 위로 상체를 쭉 빼며 해인 쪽으로 몸을 바짝 기울였다.
그의 얼굴이 불쑥, 해인의 시야를 가득 채우며 밀고 들어왔다.
“제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해인의 고막을 때렸다.
원필은 짙고 까만 눈동자로 해인의 흔들리는 동공을 옭아매듯 똑바로 응시했다.
“제가 신경 쓰입니까, 해인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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