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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8

브레이크가 고장 난 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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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꼬박 새웠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던 원필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이불을 걷어차며 벌떡 일어났다.

“미치겠네, 진짜…….”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는 그의 입가에는, 밤새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실없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수면 부족으로 퀭했지만, 눈빛만큼은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것처럼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강해인이 그 울보 꼬맹이의 첫사랑 누나였다. 어릴 적 피아노 학원 로비에서 훌쩍이던 자신에게 사탕을 까서 입에 쏙 넣어주던, 예쁘고 다정하고 조금은 시니컬했던 그 누나.

원필은 세면대를 짚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실실 웃음을 흘렸다.

첫사랑이라서 좋아진 게 아니었다. 그녀가 자신의 공간에 발을 들이고, 낡은 후드 티를 입고 모니터 앞에서 치열하게 반짝이던 그 순간부터 이미 속절없이 빠져들고 있었다. 이미 좋아지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 사람이 막연하고 애틋하게 기억에 남아있던 첫사랑이었다는 사실.

그 완벽한 서사는 원필의 마음에 타오르기 시작한 불씨에 드럼통째로 기름을 들이붓는 격이었다.

‘더 이상 피할 이유가 없잖아.’

스토커의 트라우마도, 선을 그어야 한다는 강박도 모두 어젯밤 피아노 건반 위에서 산산조각 났다. 자신의 가장 초라하고 어렸던 시절을 달래주었던 사람. 그리고 지금, 완벽하게 성장한 자신의 세상을 온통 흔들어놓고 있는 사람.

원필은 거울을 보며 앞머리를 털어 넘겼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녀 앞에서 어떻게 표정 관리를 해야 할지 몰라 뚝딱거리며 삐그덕대던 양철 로봇은 이제 없었다. 브레이크가 완벽하게 파열된, 아니 스스로 브레이크를 부숴버린 직진 연하남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오후 1시. 해인은 꽃집 앞 골목을 서성이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어젯밤, 썰을 풀던 중 갑자기 피아노를 ‘쾅’ 내리치고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굳어버렸던 원필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어디 아픈 거냐고 물어도 넋이 나간 사람처럼 허공만 보길래, 해인은 지레 겁을 먹고 대충 짐을 싸서 도망치듯 고시원으로 돌아왔었다.

‘오늘 얼굴 어떻게 보지. 내가 피아노 학원 얘기해서 트라우마라도 건드렸나?’

온갖 찝찝한 상상을 하며 조심스럽게 꽃집 문을 열었다.

딸랑-.

“안녕하세요…….”

해인이 눈치를 보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 순간이었다.

“오셨어요?”

카운터 너머에서 화분을 다듬고 있던 원필이, 고개를 번쩍 들며 인사를 받았다. 해인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평소 손님을 맞이하던 그 정돈된 자본주의 미소가 아니었다. 어제까지 눈치를 보며 삐그덕거리던 고장 난 얼굴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꽃집 안의 모든 조명을 한데 모아 켜놓은 것처럼, 티 없이 맑고 해사하고, 묘하게 끈적한(?) 열기가 담긴 엄청난 미소였다.

본문 삽화

“어, 네. 사장님…… 어제는 괜찮으셨어요? 갑자기 안색이 안 좋으시길래.” “아, 어제는 제가 잠시 감격스러운 일이 있어서 넋을 놨습니다. 아주 괜찮습니다. 오늘 컨디션 최고예요.”

원필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해인의 어깨에 매달린 무거운 백팩을 아주 자연스럽게 넘겨받았다. 평소 같았으면 “아니에요, 제가 들게요!” 하고 실랑이를 벌였을 해인이지만, 오늘따라 그의 행동이 너무 거침없고 자연스러워서 얼떨결에 가방을 뺏기고 말았다.

“가방 무거우실 텐데 얼른 앉으세요. 제가 커피 내려드릴게요.”

가벽 안쪽 테이블로 해인을 에스코트한 원필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탕비실로 향했다. 해인은 얼떨떨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뭐지? 어제 밤사이에 복권이라도 당첨됐나?’

잠시 후, 원필이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늘 마시던 아이스 아메리카노 옆에, 평소엔 없던 작고 예쁜 접시가 놓여 있었다. 마카롱과 조각 케이크였다.

“이건 뭐예요?” “아, 작업하시다 보면 당 떨어지시잖아요. 단 거 좋아하시길래.” “제가 단 거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해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원필의 어깨가 흠칫 굳었다. [사탕을 까서 자주 쥐여 줬거든요.] 어릴 적 매일같이 훌쩍거리던 자신을 달래려 사탕과 초콜릿을 입에 넣어주며, ‘단 거 먹으면 기분 좋아져. 나도 이거 엄청 좋아하거든’ 하고 말하던 단발머리 누나의 목소리가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원필은 황급히 눈동자를 굴리며 변명했다.

“아, 그, 며칠 전에 편의점에서 초코바 사시는 거 봤거든요! 그리고 보통 집중해서 일하시는 분들은 단 거 좋아하시니까요.” “아하. 잘 먹겠습니다. 감사해요.”

다행히 의심 없이 넘어간 해인이 마카롱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달콤한 필링이 입안에 퍼지자, 피곤했던 해인의 눈매가 기분 좋게 휘어졌다. “음, 맛있다.” 하고 작게 중얼거리는 그 무방비한 얼굴을 보며, 원필은 하마터면 테이블 위로 고꾸라질 뻔한 심장을 간신히 다잡았다.

‘미치겠다. 왜 저렇게 예뻐 보이지.’

예전에는 그저 건조하고 시니컬한 매력이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자신의 첫사랑이라는 콩깍지까지 단단히 씌고 나니 그녀의 모든 사소한 행동이 솜사탕처럼 달콤하게 느껴졌다. 마카롱 부스러기가 입술에 묻은 것조차 심장을 부여잡게 만들 만큼 귀여웠다.

원필은 자기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해인의 테이블 맞은편에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그리고 턱을 괸 채, 노골적으로 그녀를 빤히 응시하기 시작했다.

사각, 사각.

처음에는 타블렛에 집중하려던 해인이었지만, 정수리 위로 쏟아지는 그 집요하고도 다정한 시선을 도저히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참다못한 해인이 펜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저기요, 사장님.” “네.” “오늘 꽃…… 안 다듬으세요? 예약 작업 많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다듬어야죠. 근데 지금은 딴 거 하고 싶어서요.”

원필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고, 나긋나긋했다. 해인은 목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뭘요?” “그냥, 구경이요.” “……네?” “구경하고 싶어서요. 해인 씨 작업하시는 거.”

해인 씨. 단골손님이 아니라, 처음으로 불린 자신의 이름이었다. 게다가 그 낮고 다정한 목소리로 ‘구경하고 싶다’며 대놓고 직진해 오는 태도에, 해인의 뇌 회로가 일시 정지하고 말았다.

“아니, 남 일하는 걸 왜 구경…….” “예뻐서요.”

쿵. 해인의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네?”

해인이 멍청하게 되묻자, 원필은 살짝 눈을 내리깔며 테이블 위를 톡톡 두드렸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여전히 여유롭고 치명적이었다.

“그림 그리실 때 엄청 집중하시잖아요. 그때마다 사람이 막, 반짝반짝하는 것 같아서.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거든요.”

원필은 애써 수위를 조절하며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신이 내 첫사랑이라서 미치도록 예뻐 보인다’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그녀가 기겁을 하고 도망갈 게 뻔했다.

하지만 수위를 조절한 게 그 모양이었다. 해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뭐야. 이 사장님 오늘 왜 이래? 뭐 잘못 먹었어? 아니면 꽃향기에 너무 취했나?’

해인은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모니터 뒤로 얼굴을 반쯤 숨겼다. 예뻐서 구경한다니. 살면서 그런 노골적인 플러팅은 처음 들어봤다. 그것도 매일 밤 무의식적으로 스케치북에 얼굴을 박아대며 앓게 만들었던, 이 지독하게 잘생긴 미인계의 당사자에게!

해인은 타블렛 펜을 거의 부러뜨릴 듯이 꽉 쥐었다.

“사, 사장님. 일 안 하시면 월세 못 냅니다. 가서 꽃이나 마저 다듬으시죠.” “월세 낼 돈은 충분히 벌어 놨습니다.” “아, 진짜! 저 쳐다보면 부담스러워서 선이 안 그어지거든요?!”

결국 해인이 꽥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원필은 항복하듯 두 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그럼 뒤에서 조용히 일하겠습니다.”

원필이 싱긋 웃으며 가벽 너머로 사라졌다. 하지만 물리적인 시선이 사라졌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해인은 자신의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쿵쾅쿵쾅쿵쾅.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어 도저히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 턱을 괴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던 원필의 나른한 눈빛과, 낮게 깔리던 목소리. ‘예뻐서요’ 하던 그 미친 대사가 환청처럼 계속 귓가를 맴돌았다.

결국 그날 밤, 해인은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안 되겠다. 오늘은 여기서 더 있다간 말라 죽을 것 같아.’

해인은 작업하던 파일을 저장하고 노트북을 탁 덮었다. 거칠고 다급한 손길로 백팩에 타블렛과 장비들을 쑤셔 넣기 시작했다. 오늘만큼은 이 무거운 쇳덩어리들을 짊어지고서라도 당장 이 숨 막히는 공간을 벗어나야만 했다.

드르륵. 의자를 거칠게 밀어 넣고 가방을 둘러멘 해인이 커튼을 젖히고 나왔다.

“저, 오늘은 이만 가볼게요.”

도망치듯 빠른 인사말이었다. 카운터에서 내일 쓸 리본을 정리하고 있던 원필이 고개를 들었다. 시계를 보니 밤 11시 3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원필은 아무 말 없이 두르고 있던 앞치마를 벗어 의자 위에 걸쳐두었다. 그러더니 카운터 안쪽에서 자신의 검은색 바람막이 재킷과 차 키를 챙겨 들고 카운터 밖으로 걸어 나왔다.

해인이 당황해서 눈을 끔벅였다.

“사장님? 어딜…….” “데려다줄게요.” “네? 아니요, 고시원 여기서 걸어서 5분이면 가는 거 아시잖아요. 바로 앞인데 뭘 데려다줘요.” “밤길 위험하잖아요. 그리고.”

원필이 재킷을 툭 걸쳐 입으며, 해인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그의 시선이 해인의 흔들리는 눈동자에 다시 한번 무겁게 내려앉았다.

“제가 해인 씨랑 조금 더 있고 싶어서 그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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