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y My DayF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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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7

울보 꼬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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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모델료 안 받겠습니다.]

원필의 그 나지막하고도 치명적인 한마디가 꽃집 안을 강타한 직후.

해인은 문자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저, 전 약속이 있어서 이만!!”

가방도, 타블렛도 그대로 내팽개친 채였다. 고장 난 로봇처럼 삐그덕거리며 뒷문을 빠져나와 사거리까지 전력 질주를 한 해인은, 약속 장소에 나와 있던 민주를 붙잡고 숨을 헐떡였다.

“야, 강해인. 너 얼굴이 왜 이래? 마감 끝났다고 낮술 했냐?”

“……민주야. 나 삼겹살 말고 소맥, 소맥부터 말아줘.”

그날 밤, 해인은 민주 앞에서 삼겹살을 안주 삼아 연거푸 소맥을 들이켰다.

내가 미쳤지, 화면을 켜놓고 나가다니. 아니, 근데 거기서 모델료를 안 받겠다는 멘트는 반칙 아니야? 이건 나를 놀리는 걸까, 아니면 진짜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는 해인을 보며, 민주는 상추쌈을 우적우적 씹으며 명쾌한 진단을 내렸다.

“강해인, 너 단단히 감겼네. 덕질은 무슨 얼어 죽을 덕질.”

그 팩트 폭력에 명치를 세게 얻어맞은 해인은 그날 고시원 침대에서 이불을 걷어차며 처절한 밤을 지새워야 했다.

다음 날 저녁.

해인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무거운 발걸음으로 ‘어느 날의 왈츠’ 문을 열었다.

가방도 장비도 다 두고 온 터라 안 갈 수도 없었다. 어제 그렇게 도망치듯 뛰쳐나갔으니, 오늘 그를 무슨 얼굴로 봐야 할지 눈앞이 깜깜했다.

딸랑-.

“……안녕하세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며 들어선 꽃집 안은 묘하게 고요했다.

원필은 카운터 안쪽에서 예약된 꽃다발을 포장하고 있었다. 해인을 발견한 원필의 얼굴에 아주 희미한, 하지만 숨길 수 없는 다정한 미소가 번졌다.

“오셨어요. 어제는…… 친구분이랑 맛있는 거 드셨습니까?”

“아, 네. 뭐…….”

해인은 시선을 애써 바닥으로 깔며 안쪽 테이블로 호다닥 숨어들었다.

다행히 원필은 어제의 그 ‘모델료’ 발언에 대해 더 이상 짓궂게 놀리거나 언급하지 않았다. 해인이 민망해할 것을 배려해 일부러 거리를 두며 묵묵히 제 일만 하는 듯했다.

그의 섬세한 배려 덕분에, 해인은 쿵쾅거리던 심장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다시 타블렛 펜을 잡을 수 있었다. 마감을 넘기고 한숨 돌린 상태라 메인 작업 대신 가벼운 컷들을 수정하며 시간을 보냈다.

어느덧 밤 10시.

가게 조명이 어두워지고, 밖에는 추적추적 얇은 밤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소리만이 고요하게 공간을 채우고 있던 그때였다.

정리를 마친 원필이 탕비실로 가는 대신, 꽃집 한구석에 놓여 있던 낡은 업라이트 피아노 앞으로 다가갔다.

‘어, 저거 그냥 인테리어용 아니었나?’

해인이 타블렛 너머로 시선을 빼꼼 들어 올렸다.

원필이 피아노 덮개를 열고 조심스럽게 건반 위에 손을 얹었다. 길고 유려한 손가락이 하얀 건반을 천천히 누르기 시작했다.

통, 토롱-.

어릴 적 치던 교재나 딱딱한 클래식 곡이 아니었다. 재즈풍으로 부드럽게 편곡된 가요의 멜로디였다. 조율이 완벽하지 않아 약간 탁하고 낡은 소리였지만, 능숙하게 화음을 쌓아 올리는 원필의 손목 스냅은 한두 번 쳐본 솜씨가 아니었다. 비 오는 밤공기와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는 리듬감이 빗소리와 섞여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만들었다.

해인은 아예 타블렛 펜을 내려놓고 턱을 괸 채 그의 연주를 감상했다.

‘진짜 사기 캐릭터네. 꽃에, 요리(허당이지만)에, 피아노까지.’

그의 옆얼굴은 가스등 불빛을 받아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다. 건반을 누르는 우아한 손놀림을 보니, 어제 들켰던 스케치를 당장 한 장 더 추가하고 싶어질 정도였다.

연주가 부드럽게 끝을 맺었다.

마지막 건반의 울림이 허공으로 흩어질 때쯤, 해인이 먼저 정적을 깼다.

“피아노 엄청 잘 치시네요. 전 그냥 장식용인 줄 알았어요.”

해인의 감탄에 원필이 건반에서 손을 떼며 멋쩍게 웃었다.

“가끔 고등학교 때 밴드부 하던 친구들이랑 합주도 하고 그러거든요. 다들 바빠서 자주 모이진 못하지만요.”

“아, 밴드부요? 어쩐지 건반 치는 느낌이 확 다르더라. 어릴 때부터 배우신 거예요?”

“네. 어머니가 피아노 학원을 하셨거든요. 그래서 제대로 배웠다기보단 그냥 어릴 때부터 학원에서 굴러다니면서 자연스럽게 건반을 치게 됐죠.”

원필의 덤덤한 대답에 해인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어, 진짜요? 저 어릴 때 다니던 피아노 학원 원장님도 아들이 있었는데. 그래서 그 애도 항상 학원에 있었거든요.”

해인은 옛날 생각이 나는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편안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 그 애가 유치원생이었으니까, 딱 네 살 차이였죠.”

“……아.”

“걔가 원래 되게 순하고 얌전한 애였는데, 엄청 울보였어요. 원장님이 레슨하느라 바쁘셔서 잘 못 챙겨주시니까 매일 로비 소파에 혼자 앉아서 훌쩍거렸거든요. 눈은 요만해가지고.”

원필은 피아노 의자에 비스듬히 앉은 채, 해인의 이야기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비 오는 밤, 나지막하게 울려 퍼지는 그녀의 건조한 목소리가 기분 좋게 귓가를 간질였다.

“어머니가 바쁘셔서 많이 외로웠나 봅니다.”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불쌍해서 달래준다고 사탕 같은 걸 자주 쥐여 줬거든요.”

해인은 마치 재미있는 전래동화라도 들려주듯, 손을 작게 까딱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랬더니 나중엔 제 뒤만 졸졸 따라다니면서 누나, 누나 하고……. 지가 무슨 유치원 화단에서 꺾어온 찌그러진 민들레꽃 같은 걸 저한테 주면서 그러는 거예요. 자기가 나중에 크면 나랑 결혼할 거라고. 자기가 맛있는 것도 다 사주고 예쁜 꽃도 매일매일 꺾어다 줄 테니까 자기랑 꼭 결혼해야 한다고.”

해인의 이야기를 듣던 원필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자신에게도 꼭 닮은 기억이 있었다. 매일같이 훌쩍이던 자신을 곁에서 챙겨주던, 단발머리의 예쁘고 다정한 누나. 어린 마음에 그녀가 너무 좋아서, 매일 꽃을 꺾어다 주며 결혼하겠다고 떼를 썼던 기억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우연치고는 참 귀엽고 애틋한 평행이론이라고 생각하며, 원필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귀여운 꼬마였네요.”

“그렇죠? 콧물 훌쩍거리면서 얼마나 진지하게 말하던지. 지금 생각해보면 진짜 골 때리는 꼬맹이였는데.”

해인은 턱을 괸 채 허공을 응시하며 기억을 더듬었다.

“어릴 때라 그 꼬맹이 이름은 도무지 기억이 안 나는데……. 아, 학원 이름은 기억나요. 제가 연희동 살았었거든요.”

“…….”

“거기 있던 ‘소리나무 피아노 학원’ 원장님 아들이었어요.”

그 순간이었다.

삑-! 쾅!

피아노 건반 위에서 무심하게 코드를 짚어보려던 원필의 손가락이 무언가에 세게 얻어맞은 듯 미끄러지며, 불협화음의 끔찍한 굉음을 냈다.

“앗, 깜짝이야.”

요란한 소리에 놀란 해인이 어깨를 움츠리며 원필 쪽을 바라보았다.

“사장님, 손가락 삐끗하셨어요?”

“…….”

하지만 원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피아노 건반 위에 손을 얹은 그 자세 그대로, 마치 전원이 꺼진 마네킹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며 웃고 있던 입술이, 마치 화면에 렉이 걸린 것처럼 기괴하게 멈칫하더니 서서히 아래로 굳어졌다. 여유롭던 미소가 갈라진 틈 사이로 믿을 수 없다는 듯한 경악이 차올랐다.

본문 삽화

“사장님?”

해인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불렀지만, 원필의 귓가에는 그녀의 목소리가 제대로 닿지 않았다.

연희동.

소리나무 피아노 학원.

네 살 차이, 초등학교 3학년의 단발머리 여자아이.

레슨하느라 바쁜 어머니를 기다리며 소파에 앉아 울던 자신에게, 사탕을 까서 쥐여 주며 달래주던 그 예쁘고 다정한 누나.

원필의 머릿속에서 수십 년 전의 낡고 흐릿했던 파편들이, 해인의 목소리와 함께 소름 끼치도록 선명한 고화질의 영상으로 조립되기 시작했다.

『누나! 나중에 나랑 결혼해! 내가 매일매일 꽃 꺾어다 줄게!』

코를 훌쩍거리며 떼를 쓰던 어린 날의 자신과.

민들레꽃을 받아 들고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던, 지금의 해인과 너무나도 닮은 그 건조하면서도 다정한 미소가.

원필의 시선이 느리게, 아주 느리게 허공을 가르고 해인에게로 향했다.

본래도 크고 선명한 원필의 까만 눈동자가 한계치까지 부릅떠진 채로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꼬맹이가.”

원필의 입술이 바짝 말라붙었다.

목소리가 덜덜 떨려 제대로 된 문장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자신을 숨 막히게 했던 스토커와 겹치는 우연에 경계하고 밀어냈던 여자.

꽃을 포장하다 말고 자신의 이마를 깨버릴 뻔했던 엉뚱한 여자.

캔버스 위에서 누구보다 눈부시게 반짝여 자신의 심장을 통째로 가져가 버린 여자.

그 강해인이.

“……손님이랑, 결혼하겠다고 했다고요?”

간신히 쥐어짜 낸 원필의 목소리에, 해인은 영문도 모른 채 눈을 끔벅였다.

“네. 매일 꽃 꺾어주겠다고 하면서 졸졸 따라다녔는데. 왜요? 사장님도 어릴 때 누구한테 프러포즈라도 하셨어요?”

해인은 그저 흔한 평행이론의 우연 정도로 생각하며 가볍게 웃어넘겼다.

하지만 원필에게 그것은 가벼운 우연 따위가 아니었다.

원필은 무릎 위로 떨어진 자신의 두 손을 꽉 쥐었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수고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거려 도저히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지금 자신이 무슨 엄청난 사실을 마주했는지, 해인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강해인은, 자신이 며칠 전부터 열병처럼 앓기 시작한 이 낯설고 지독한 짝사랑의 상대는, 까마득히 잊고 살았던, 어린 날의 귀여운 ‘첫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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