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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6

무의식적인 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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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어느 날의 왈츠’ 안에는 전날보다 한층 더 짙고 어색한 공기가 맴돌았다.

그 원흉은 두 사람의 이마 한가운데에 나란히 붙어 있는 네모난 살구색 밴드였다.

책상 밑에서 얼마나 경쾌하게 들이박았는지, 자고 일어나니 이마에 둥그렇게 혹이 올라와 있었던 것이다.

해인은 앞머리를 영혼까지 끌어내려 밴드를 가리려 애썼고, 원필 역시 평소보다 앞머리를 푹 숙인 채 꽃을 다듬었다.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서로의 이마에 시선이 꽂히는 바람에, 두 사람은 헛기침만 연신 내뱉으며 눈을 피하기 바빴다.

‘쪽팔려. 진짜 짐 싸서 다른 동네로 튈까.’

해인은 타블렛 펜을 입술에 꾹 누른 채 속으로 절규했다.

자본주의적이고 쿨한 단골손님 이미지는 이미 박살 난 지 오래다. 어제 책상 밑에서 밴드를 붙이고 나란히 앉아 얼음찜질을 하던 그 처참한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하지만 쪽팔림은 쪽팔림이고, 일은 일이었다.

오늘은 출판사에 그림책 더미북(가제본)의 1차 완성본을 넘기기로 한 날이었다. 며칠 전 온실 씬의 구도를 엎고 새로 작업한 뒤로 진도가 훅훅 나간 덕에, 마감 기한을 간신히 맞출 수 있었다.

“……좋아, 끝.”

오후 4시.

마지막 페이지의 명암을 손보고 저장을 마친 해인이 의자 등받이에 푹 기대며 기지개를 켰다. 지독했던 메인 작업이 일단락된 것이다.

수정 요청이 오기 전까지는 며칠간 자유의 몸이었다. 온몸의 뼈가 녹아내리는 것 같은 피로와 동시에 짜릿한 해방감이 밀려왔다.

‘이제 좀 쉴까. 아니지, 감각 안 떨어지게 손풀기용 크로키나 몇 개 그려볼까.’

마감을 마친 일러스트레이터의 휴식치고는 꽤나 직업병스러운 발상이었다. 해인은 메인 작업 창을 내리고, 평소 낙서나 아이디어 스케치를 할 때 쓰는 빈 캔버스를 띄웠다.

아무 생각 없이 펜을 쥔 손목에 힘을 빼고 선을 긋기 시작했다.

보통 손을 풀 때는 눈앞에 보이는 사물이나 최근에 인상 깊게 본 장면을 무의식적으로 그리게 마련이다. 해인의 눈은 자연스럽게 가벽 너머, 커튼 틈새로 보이는 한 곳을 향해 있었다.

카운터 너머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하얀 리시안셔스를 포장하고 있는 남자.

원필이었다.

해인의 펜 끝이 액정 위를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가장 먼저 그려진 것은 그의 손이었다. 꽃줄기를 섬세하게 감싸 쥐는, 마디가 굵지 않으면서도 뼈대가 단정한 긴 손가락.

그다음은 시선을 위로 올려, 조금 아래로 처진 듯 예민한 입꼬리와 일자로 뻗은 높은 콧대. 그리고 이마를 덮고 있는 부스스한 머리카락까지.

사각, 사각.

해인은 자신이 지금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 명확하게 인지조차 하지 못한 채 펜을 놀렸다. 그저 ‘시각적으로 완벽한 피사체’를 화면에 옮겨 담는 행위 자체가 주는 묘한 안정감에 빠져 있었다.

화면에는 이미 여러 장의 러프 스케치가 흩어져 있었다.

어느 날은 턱을 괴고 멍하니 창밖을 보던 옆얼굴, 어느 날은 가위질에 집중하던 손목의 선, 그리고 오늘은 리시안셔스를 쥔 단정한 손.

‘이 정도면 거의 전속 모델인데.’

완성된 스케치들을 보며 해인이 실없이 웃음을 터뜨리려던 찰나였다.

징- 징-.

책상 위에 올려둔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화면에 [민주]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어, 민주야.”

[야! 강해인! 너 더미북 넘겼냐?]

“어, 방금 막.”

[미친! 잘했다 내 새끼! 야, 나 오늘 연차 썼거든? 지금 바로 그쪽으로 넘어갈 테니까 저녁에 고기나 구워 먹자!]

들뜬 민주의 목소리에 해인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마감 직후의 삼겹살이라니,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다.

“그래, 와라. 나 지금 고시원에 없으니까 역 앞 사거리 쪽으로 와.”

[어디? 너 요새 일한다는 그 사장님 잘생겼다는 꽃집?]

“야! 목소리 좀 낮춰!”

해인은 화들짝 놀라 주변을 살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통화 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황급히 핸드폰을 쥐고 꽃집 뒷문과 연결된 작은 골목 쪽으로 빠져나갔다.

“어, 거기. 역 앞 3번 출구에서 만나자. 내가 갈게.”

통화에 열을 올리며 멀어지는 해인의 뒷모습을 보던 원필이, 포장하던 꽃을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가벽 안쪽으로 걸어왔다.

원필의 손에는 작게 자른 사과와 포크가 놓인 접시가 들려 있었다.

어제 탕비실에서 또 이마를 박는 대형 사고를 친 이후, 그는 해인에게 다가가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마감이 코앞이라 예민해 보이기도 했고, 자신의 고장 난 모습을 또 보여줄까 봐 두렵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가 통화하러 나간 틈을 타, 슬쩍 간식만 책상 위에 올려두고 도망칠 참이었다.

“일단 여기 두고…….”

원필이 노트북 옆 빈 공간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몸을 돌려 나가려던 순간, 절전 모드로 들어가지 않고 환하게 켜져 있는 타블렛 액정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

원필의 발걸음이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그의 시선이 화면에 박힌 채, 문자 그대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새하얀 캔버스 위에는 거친 러프 선으로 그려진 여러 장의 스케치가 띄워져 있었다.

정교하게 채색된 그림책의 주인공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일상을 관찰하고, 몰래 담아낸 듯한 지극히 개인적인 드로잉들이었다.

꽃가위를 쥐고 있는 손.

반쯤 걷어붙인 셔츠 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뚝.

살짝 아래로 쳐진 입꼬리와 일자로 뻗은 콧대.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식물을 다듬는 옆얼굴까지.

모두 원필이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화면 이곳저곳에 각기 다른 날, 다른 자세로 그려진 원필의 모습들이 가득했다. 선 하나하나에 피사체를 향한 짙은 관찰력과, 버릇처럼 손이 가는 대로 그린 듯한 무의식적인 애정이 묻어 있었다.

원필은 마른침을 삼켰다.

심장이 쿵, 하고 발밑까지 떨어졌다가 다시 미친 듯이 박동하기 시작했다. 귓가에 이명이 들릴 정도로 거센 요동이었다.

‘이 사람은…… 나를 보고 있었구나.’

가슴 한구석이 벅차오르는 감각.

이것은 과거에 그를 옭아맸던 끔찍한 집착의 시선과는 달랐다. 자신을 통제하거나 소유하려는 음습한 시선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것을 발견한 창작자의 순수한 동경.

자기도 모르게 눈이 가고, 손이 가서, 무의식중에 캔버스 귀퉁이에 끄적여 놓고야 마는 그런 조심스럽고도 투명한 시선.

그 다정하고도 집요한 시선의 끝에, 다름 아닌 자신이 서 있었다는 사실이 원필의 이성을 완벽하게 마비시켰다.

원필은 홀린 듯이 화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자신의 옆얼굴이 그려진 거친 선 위를, 긴 손가락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쓸어내려 보았다. 액정의 차가운 감촉 대신, 손끝에서 심장까지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짜릿하고 따뜻한 열기가 번져갔다.

“하아…….”

숨을 참았던 탓에 뜨거운 숨결이 터져 나왔다.

어젯밤 해인이 일에 몰입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가 자신 혼자만의 일방적인 ‘반함’이었다면, 지금 이 스케치를 마주한 순간은 완전히 달랐다.

그녀도 자신을, 적어도 자신이라는 사람의 선과 조각들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

그 작은 교집합 하나가, 원필의 머릿속에 도사리고 있던 모든 두려움과 조심스러움을 모조리 끊어버렸다.

“……사, 사장님?”

그때, 등 뒤에서 당황으로 흠칫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통화를 마치고 뒷문으로 들어온 해인이었다.

해인은 타블렛 앞에 멈춰 서 있는 원필과, 그가 내려다보고 있는 환한 모니터 화면을 번갈아 보며 사색이 되어 있었다.

‘미친, 강해인. 화면 안 끄고 나갔어?!’

해인의 머릿속에서 비상벨이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남의 얼굴을, 그것도 신체 부위(손, 목선)를 부위별로 뜯어 관찰하듯 스케치해 놓은 화면을 당사자에게 들키다니. 이건 거의 변태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아, 그게! 오해, 오해하지 마세요!”

해인이 황급히 달려와 타블렛의 전원 버튼을 확 눌러 껐다. 화면이 까맣게 죽자 해인은 그 앞을 양팔로 막아서며 횡설수설 변명을 쏟아냈다.

“이거 진짜 무슨 이상한 의도로 그린 게 아니라요! 제가 손 풀 때 원래 눈앞에 보이는 걸 대충 크로키하는 버릇이 있어서! 사장님이 피사체로서 워낙, 그…… 훌륭하시다 보니까 뼈대나 선을 연습하기에 좋아서 무의식적으로 그린 거지, 절대 다른 흑심이나 그런 게……!”

변명을 하면 할수록 스스로 생각해도 구차하고 찌질했다. 해인은 차라리 혀를 깨물고 싶었다. 얼굴이 터질 것처럼 달아올라 시선을 바닥에 처박았다.

“죄송합니다. 불쾌하셨으면 다 지울게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과를 내뱉는데.

“불쾌하다뇨.”

머리 위로, 평소의 그 차분하고 단정한 솔 톤이 아닌, 묘하게 낮고 잠긴 목소리가 떨어졌다.

해인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원필은 화를 내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아니 숨길 생각조차 없어 보이는 깊은 설렘과 다정함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본문 삽화

원필은 해인을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천천히 끌어올렸다. 그저 영업용으로 눈을 접어 웃던 반달 미소가 아니라, 사람의 심장 깊숙한 곳을 건드리는 지독하게 사적인 미소였다.

“지우지 마세요.”

“……네?”

“저렇게 예쁘게 그려주셨는데, 왜 지웁니까.”

원필이 한 걸음 다가서며, 해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고요하고 까만 그의 눈동자 안에, 당황해서 얼어붙은 해인의 얼굴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앞으로도 연습 필요하시면, 얼마든지 저 보고 그리세요.”

“…….”

“저, 모델료 안 받겠습니다.”

쿵, 쿵, 쿵.

이번에는 책상 밑에서 이마를 부딪친 게 아니었다.

해인의 심장이 갈비뼈를 부수고 튀어나올 것처럼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끄적였던 스케치 몇 장이.

단단하게 그어져 있던 두 사람 사이의 안전한 선을 완전히, 그리고 완벽하게 지워버리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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