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필의 뇌 구조가 하룻밤 사이에 완벽하게 재편성되었다.
과거의 트라우마? 오해로 인한 미안함? 부채감?
그딴 복잡하고 무거운 단어들은 ‘강해인’이라는 세 글자 앞에서 모조리 증발해 버렸다. 이제 원필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오직 하나, 지독하게 원초적이고 통제 불가능한 짝사랑의 시작이었다.
자신의 일에 미친 듯이 몰입하여 반짝이던 그녀의 모습이 망막에 인쇄라도 된 것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문제는, 한 번 자각해 버린 감정은 숨기려 할수록 온몸으로 요란하게 티가 난다는 것이었다.
챙그랑-!
“앗, 죄, 죄송합니다!”
가벽 너머에서 요란한 파찰음이 들렸다. 벌써 오늘만 세 번째였다.
헤드셋을 한쪽 귀에 걸치고 있던 해인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원필은 바닥에 떨어뜨린 전지가위를 황급히 주워 들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사장님, 어디 아파요? 오늘따라 왜 이렇게 뭘 자꾸 떨어뜨리세요.”
“아, 아닙니다! 제가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 전혀 아프지 않습니다! 너무 건강해서 탈입니다!”
군기가 바짝 든 신병처럼 쩌렁쩌렁하게 대답하는 원필의 모습에, 해인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
오늘 하루 종일 저 상태였다.
평소의 그 나른하고 차분하던 텐션은 온데간데없고, 원필은 마치 나사가 하나 빠진 양철 로봇처럼 삐그덕거렸다. 해인이 물이라도 마시러 일어날라치면 소스라치게 놀라며 정수기 앞을 비켜섰고, 가벼운 눈인사라도 건네면 귀끝까지 새빨개져서 허공을 쳐다보며 헛기침을 해댔다.
‘뭐지. 내가 어제 파스타 간을 또 이상하게 잡았나? 위장에 무리가 갔나?’
해인은 원필의 그 지독한 ‘뚝딱거림’이 자신을 향한 감정의 발로라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 고개를 갸웃했다.
반면, 원필의 속은 그야말로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미칠 노릇이었다.
그저 똑같이 타블렛 펜을 쥐고 화면을 노려보고 있을 뿐인데, 어제까지만 해도 ‘작업에 열중하는 단골손님’으로 보이던 그녀가 오늘부터는 숨 막히도록 예쁘고 멋진 ‘강해인’으로 보였다.
대충 틀어 올린 목덜미의 선도, 집중할 때마다 살짝 내미는 입술도, 펜을 쥔 손가락의 뼈대까지도.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 의미가 부여되고 심장이 제멋대로 나대기 시작했다.

가벽 너머에 그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온몸의 신경이 그쪽으로 쏠려, 본업인 꽃 포장조차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 기묘한 고장 증세는 비단 원필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아, 진짜. 왜 자꾸 쳐다보고 난리야…….’
타블렛 화면을 뚫어지라 노려보던 해인은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마른침을 삼켰다.
해인 역시 자신의 마음이 더 이상 가벼운 ‘가성비 덕질’이 아님을 뼈저리게 자각한 상태였다. 그 허술하고 귀여운 생활력과 따뜻한 배려에 완벽하게 스며들었음을 인정하고 나니, 해인 역시 원필을 예전처럼 편하게 대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하필 오늘따라 가벽 너머에서 원필의 시선이 수시로 날아와 꽂히는 게 느껴졌다. 힐끗. 눈이 마주치면 화들짝. 또 힐끗.
저쪽에서 뚝딱거리며 시선을 던지니, 이쪽에서도 의식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해인은 목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애써 펜을 놀렸지만, 모니터 위에는 의미 없는 선만 엉망진창으로 그어지고 있었다.
‘차라리 예전처럼 철벽 치고 응대할 때가 낫지. 저렇게 고장 난 얼굴로 쳐다보면 사람 심장 터지라고.’
밤 10시. 고요한 꽃집 안에 또다시 적막이 내려앉았다. 원필은 마른세수를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법 같은 건 진작에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래. 차, 차를 한 잔 타다 주자. 자연스럽게.’
원필은 탕비실에서 캐모마일 차를 두 잔 우려냈다. 쟁반에 머그잔을 올리고 해인의 테이블로 다가가는 그의 발걸음은, 마치 지뢰밭을 걷는 사람처럼 뻣뻣했다.
“저기, 차…… 차 한 잔 드시면서 하세요.”
원필이 조심스럽게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아, 네. 감사합니다.”
해인이 펜을 내려놓고 머그잔의 손잡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순간. 방향을 잘못 튼 원필의 손가락과 해인의 손등이 아주 살짝, 스치듯 맞닿았다.
“헉!” “앗!”
찌릿, 하고 정전기가 튄 것도 아닌데 두 사람은 동시에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손을 홱 거둬들였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일부러 닿으려고 한 게 아니라!” “아니, 아니에요! 제가 컵을 제대로 안 보고 잡으려다가!”
원필의 얼굴은 터질 듯이 붉어졌고, 해인 역시 파리하던 볼이 토마토처럼 달아올랐다. 두 사람은 서로의 시선을 피하며 허공에 대고 변명을 쏟아냈다. 그 요란한 손짓 발짓에 책상 위로 굴러가던 지우개가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제가 줍겠습니다!”
원필이 반사적으로 허리를 숙였다. “아뇨, 제 지우개니까 제가!”
당황한 해인 역시 동시에 책상 밑으로 고개를 숙였다.
쾅-!
“아윽!” “악!”
비좁은 책상 밑에서 두 사람의 이마가 정확히, 그리고 아주 경쾌하게 정면충돌했다. 엄청난 마찰음에 해인은 이마를 부여잡고 뒤로 넘어갔고, 원필 역시 바닥에 주저앉으며 신음을 흘렸다.
“아프, 으…….” “사, 사장님! 괜찮으세요?!”
눈물이 찔끔 날 만큼 아팠지만, 해인은 화들짝 놀라 원필의 상태부터 살폈다. 이마가 발갛게 부어오른 원필은 눈가에 눈물이 맺힌 채로, 해인을 향해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괘, 괜찮습니다! 제 이마가 워낙 튼튼해서! 손님 이마는 무사하십니까? 제가 미쳤지, 어떻게 손님 이마를……!” “아니, 튼튼하긴 뭐가 튼튼해요, 벌겋게 부었는데! 저야말로 죄송해요, 제가 주우면 되는 걸 괜히 머리를 들이밀어서…….”
바닥에 나란히 주저앉아 이마를 부여잡고 서로에게 사과를 쏟아내는 꼴이라니. 완벽한 미감을 자랑하던 서늘한 꽃집 사장님과, 시니컬하고 쿨하던 프로 일러스트레이터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짝사랑이라는 지독한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인지 능력과 운동 신경이 동시다발적으로 퇴화해 버린 두 명의 바보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일단…… 얼음찜질이라도 좀 하시죠.” “네……. 탕비실에 얼음이 있습니다.”
두 사람은 좀비처럼 비틀거리며 일어나 탕비실로 향했다. 지퍼백에 얼음을 대충 담아 이마에 가져다 댄 채, 테이블 양 끝에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 “…….”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만이 꽃집 안을 맴돌았다.
해인은 얼음주머니 뒤로 얼굴을 반쯤 숨긴 채, 속으로 머리를 박박 뜯었다. ‘미쳤어, 진짜. 아까 정전기 튀었을 때 왜 그렇게 오버했지? 게다가 머리는 왜 박아! 강해인 진짜 최악이야. 쿨한 단골손님 이미지는 다 박살 났네.’
반대편에 앉은 원필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원필은 붉게 달아오른 귓바퀴를 식히지도 못한 채, 속으로 땅을 치고 후회했다. ‘차라리 접시를 깨지. 이마를 박다니. 김원필, 이 멍청한 새끼. 다정하고 든든하게 다가가도 모자랄 판에 빙구처럼 구르고 난리야.’
각자의 머릿속에는 오직 자책뿐이었다.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상상 따위는 단 1퍼센트도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나만 등신같이 굴었다’는 처참한 패배감만이 두 사람을 지배하고 있었다.
얼음주머니를 이마에 얹은 두 사람의 한숨이, 고요한 밤공기 속에서 동시에 무겁게 흩어졌다.
그 지독하고도 귀여운 쌍방 삽질이 서로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건, 오직 당사자인 두 사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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