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타 소동 이후, 두 사람이 밤의 꽃집을 공유하는 풍경은 한결 자연스러워졌다.
간을 맞추는 데 치명적인 결함이 있음을 인정받은 원필은 얌전히 식재료만 조달하는 물주(?) 역할을 맡았고, 해인은 작업실 대여료를 명목으로 그 재료들을 볶고 지져 훌륭한 야식을 연성해 냈다.
밥을 나누어 먹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힘을 발휘했다.
해인은 더 이상 원필의 얼굴을 보며 뚝딱거리지 않았고, 원필 역시 해인 앞에서는 완벽한 사장님의 가면을 벗고 한결 편안하고 헐렁한 얼굴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관계의 편안함과는 별개로, 해인의 본업은 지독한 난항을 겪고 있었다.
“……아, 진짜 미치겠네.”
밤 11시.
적막한 꽃집 안에서 해인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그놈의 온실 씬. 스케치를 엎고 새로 짠 구도로 채색까지 거의 다 마쳐가던 참이었는데, 전체적인 톤을 맞추고 보니 주인공과 배경이 묘하게 겉돌고 있었다. 예쁘긴 한데, 영혼이 없는 일러스트. 그림책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해인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째 이 한 장면에 매달려 밤을 새우다 보니 눈알이 빠질 것 같았다. 대충 타협하고 넘어갈까 하는 악마의 속삭임이 귓가를 맴돌았지만, 프로로서의 알량한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꼬인 거지. 색감? 아니면 애초에 구도가 너무 평면적인가?’
답답한 마음에 고개를 돌리자, 가벽 너머에서 내일 아침에 나갈 꽃바구니를 만들고 있는 원필의 뒷모습이 보였다.
해인은 멍하니 그의 주변에 늘어선 꽃들을 응시했다. 은은한 조명 아래,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간 꽃송이들과 자연스럽게 늘어진 잎사귀들. 그 불규칙함 속에서 원필은 기가 막힌 조화와 입체감을 찾아내고 있었다.
“…….”
그 순간, 해인의 머릿속에서 번쩍하고 스파크가 튀었다.
정돈된 온실. 예쁘게만 배치하려 했던 꽃들.
그게 문제였다. 주인공이 마주한 온실은 그저 예쁜 정원이 아니라, 압도적인 생명력이 폭발하는 야생에 가까운 공간이어야 했다. 원필이 꽂아둔 저 덩굴의 거친 선처럼, 화면을 가로지르는 과감한 앵글이 필요했다.
해인은 스프링이 튕기듯 벌떡 일어나 몸을 책상 앞으로 바짝 붙였다.
그녀는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여, 며칠 밤을 새워 완성해가던 채색 레이어들을 몽땅 선택했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Delete(삭제)’ 키를 눌렀다.
화면이 순식간에 새하얀 백지로 돌아갔다.
해인은 머리끈을 입에 물고, 치렁치렁하게 흘러내리던 머리를 대충 묶어 올려 질끈 동여맸다. 헤드셋을 뒤집어쓰고 볼륨을 최대로 높인 뒤, 타블렛 펜을 고쳐 쥐었다.
사각, 사각, 사각!
거친 러프 선이 하얀 캔버스 위로 폭풍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머리를 쥐어뜯던 지친 기색은 온데간데없었다. 무언가에 완전히 씐 사람처럼, 해인의 눈동자에는 모니터의 푸른 불빛만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 시간. 꽃바구니를 완성한 원필은 뻐근한 목을 돌리며 가벽 안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손님, 차 한 잔 더…….”
말을 건네려던 원필은, 평소와 확연히 달라진 해인의 텐션에 멈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해인은 헤드셋을 낀 채 모니터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녀의 펜 끝에서 놀라운 속도로 선이 그어지고, 지워지고, 다시 덧칠해지고 있었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짧게 미간을 찌푸리며 과감하게 화면 전체를 엎어버렸고, 원하는 선이 나오면 입술을 꾹 다문 채 신들린 듯 손목을 움직였다.
원필은 그 자리에 선 채로,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그녀를 응시했다.
사실, 원필도 알고 있었다.
강해인이라는 사람이 늘 헐렁한 후드 티에 화장기 없는 파리한 얼굴로 나타나지만, 오밀조밀하게 자리 잡은 이목구비가 꽤 호감을 주는 인상이라는 것을.
하지만 지금 원필의 발목을 붙잡고 시선을 옭아매는 것은, 단순히 그녀의 ‘호감형 외모’ 때문이 아니었다.
모니터 불빛에 반사된 그녀의 눈동자에는 지독한 열기와 확신이 가득했다.
며칠을 밤새워 그린 결과물을 단 1초의 망설임 없이 쓰레기통에 처박을 수 있는 과감함. 타협하지 않고 기어코 자신이 원하는 완벽한 형태를 끌어내고야 마는 집요함.
자신의 세상(캔버스) 안에서 모든 것을 통제하고 창조해 내는, 절대적인 창작자의 얼굴.
원필은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 멍한 기분을 느꼈다.
심장이 이상한 박자로 뛰기 시작했다. 트라우마로 인한 긴장감이나, 미안함에서 비롯된 부채감 따위가 아니었다. 이것은 훨씬 더 원초적이고 강렬한 떨림이었다.
‘아…….’
원필은 마른침을 삼켰다.
사람이 이렇게 반짝일 수가 있나.
화려한 조명 아래서 치장한 것도 아니고, 그저 후줄근한 차림으로 좁은 책상 앞에 앉아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을 뿐인데.
자기 일에 미치도록 몰입한 사람만이 뿜어낼 수 있는 그 단단하고 찬란한 에너지에, 원필은 속수무책으로 압도당하고 말았다.
사각, 사각, 사각.
적막한 꽃집 안을 채우는 펜 소리가, 마치 원필의 심장을 직접 긋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원필은 한참 동안이나 그 자리에 박힌 듯 서서 해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늘 자신이 가꾼 꽃들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지금 그의 눈앞에서 치열하게 선을 긋고 있는 저 여자의 생동감 앞에서는 그 어떤 화려한 꽃도 빛을 잃는 것 같았다.
오해하고 밀어냈던 며칠간의 시간들.
미안함에 어쩔 줄 모르며 자리를 내어주었던 감정들.
허술한 자신의 요리를 수습해 주며 편안하게 웃어주던 어젯밤.
그 모든 조각들이 한데 뭉쳐, ‘강해인’이라는 거대한 인력으로 탈바꿈하여 원필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큰일 났네.”
원필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제 가슴팍을 꾹 움켜쥐었다.
미안함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과거의 스토커와 달라서 안도한 것도 아니었다.
원필은 지금, 자신의 본업에 미친 듯이 몰입하여 눈부시게 빛나는 저 여자에게, 완벽하고도 속절없이 반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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