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y My DayFICTION
‹ 어느 날의 왈츠 · 회차 목록
EPISODE 11

너무 사과드리고 싶었는데

댓글

“아…… 진짜 어깨 빠지겠다.”

백팩 끈을 쥔 해인의 손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가방 안에는 노트북, 펜 타블렛, 충전기 어댑터, 보조배터리에 각종 스케치 노트까지 한가득이었다. 체감 무게만 5kg이 족히 넘는 이 쇳덩어리들을 짊어지고 매일 아침 먼 길을 걷는 짓도 이제 한계였다.

지난 며칠간 해인은 ‘어느 날의 왈츠’ 근처로는 발길도 주지 않겠다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 평소 다니던 동선과 완전히 반대 방향에 있는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로 출퇴근을 강행해 왔다. 고시원에서 걸어서 무려 30분이나 걸리는 먼 곳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그 카페는 와이파이만 빵빵할 뿐 커피 맛마저 지독하게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도저히 무리였다.

고시원의 딱딱하고 좁은 침대에서 선잠을 잔 탓에 허리는 끊어질 듯 아팠고, 밤샘 작업으로 멘탈은 너덜너덜했다. 이 무거운 백팩을 메고 그 먼 거리를 또 걸어갔다간, 그림책을 완성하기도 전에 길바닥에 쓰러져 정형외과에 입원할 판이었다.

“그래. 피하는 것도 체력이 있어야 피하지.”

해인은 결국 며칠 만에 고집을 꺾고 방향을 틀었다.

원래 작업하던, 고시원에서 고작 5분 거리에 있는 익숙한 카페로 가기로 한 것이다. 커피도 맛있고 의자도 편한 그곳. 하필이면 그 카페가 ‘어느 날의 왈츠’로 향하는 골목 초입에 있다는 게 유일하고도 가장 큰 문제였지만, 해인은 애써 스스로를 세뇌했다.

‘지금 시간 오전 11시. 한창 영업시간이니까 가게 안에 처박혀서 일만 하겠지. 밖으로 나올 일이 뭐 있겠어. 그냥 눈 딱 감고 가게 앞만 5초 컷으로 지나가면 끝이다.’

합리화는 훌륭했다.

게다가 솔직히 말하자면, 스토커 취급을 당해 분노하고 억울했던 감정도 시간이 지나며 묘하게 흐려진 상태였다. 기분이 나쁘긴 했지만, 그 서늘하고 치명적이었던 얼굴이 주는 시각적 타격감이 워낙 컸던 탓일까.

해인은 요 며칠 맛없는 커피를 들이켜며 낯선 카페에 앉아 있다가도, 막히는 구간이 오면 무의식적으로 캔버스 귀퉁이에 원필의 얼굴 선이나 길고 얇은 손가락을 스케치하곤 했다.

“미친. 자존심도 없냐, 강해인.”

스스로를 타박하며 애꿎은 지우개 툴로 러프를 박박 지워버렸지만, 머릿속에 각인된 미남의 잔상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시각 예술을 하는 사람으로서 그 압도적인 피사체에 끌리는 건 거의 본능에 가까운 불가항력이었다.

해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모자챙을 푹 눌러썼다.

어느덧 익숙한 골목에 접어들고 있었다. 저만치 앞에 ‘어느 날의 왈츠’의 크림색 어닝이 보였다. 해인은 런닝머신을 뛸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경보를 시작했다.

다섯 걸음, 네 걸음, 세 걸음.

유리창 너머를 절대 보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가게 앞을 휙 스쳐 지나가려던 찰나였다.

딸랑-! 덜컥!

맑은 종소리와 함께, 무언가 부서질 듯 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저기요! 손님!”

해인은 화들짝 놀라 제자리에 멈춰 섰다.

가게 문을 박차고 뛰어나온 남자가, 숨을 헐떡이며 해인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원필이었다.

본문 삽화

“허억, 하아…….”

늘 완벽하게 단정하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한 손에는 포장하다 만 꽃가위가 그대로 들려 있었고, 부스스한 앞머리는 헝클어져 이마에 붙어 있었다. 무엇보다 해인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지독하게 절박하고, 또 처참하게 무너져 있었다.

해인은 뒷걸음질을 치며 경계하는 투로 물었다.

“뭐, 뭡니까. 헬스장에서 분명히 말씀드렸을 텐데요. 그쪽 근처로 안 다닌다고요. 오늘은 제가 도저히 체력이 안 돼서 근처 카페 가느라 지나간 것뿐이지…….”

“죄송합니다.”

해인의 방어적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원필의 허리가 90도로 꺾였다.

길 한복판에서, 지나가던 행인들이 힐끗거릴 정도로 깊고 정중한 사과였다.

“……네?”

“제가, 제가 다 단단히 오해했습니다. 미쳤었나 봅니다.”

천천히 고개를 든 원필의 얼굴은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그 창백하고 아름다운 얼굴에 짙은 후회와 죄책감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것을 보며, 해인은 저도 모르게 멍해졌다.

“며칠 전에…… 부동산 사장님께 들었습니다. 윗집 누수 터져서, 고시원에 들어가셨다고요.”

“……아.”

“작업할 곳이 없어서 매일 짐 싸 들고 밖으로 도신다는 것도 들었습니다. 밤낮이 바뀐 것도, 세탁소에 오셨던 것도 전부…….”

원필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의 목울대가 크게 출렁였다.

“예전에, 가게를 할 때…… 좀 좋지 않은 일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비슷한 상황에 제가 너무 예민하게, 바보같이 반응했습니다. 손님이 먼저 절 피하셨는데도, 앞뒤 상황도 안 알아보고 그런 폭언을……. 정말 너무, 너무 사과드리고 싶었는데 그 뒤로는 도통 마주칠 수가 없어서.”

변명으로 들리지 않게 조심스럽게 꺼내놓은 그의 과거 이야기와, 진심이 뚝뚝 묻어나는 절박한 목소리.

해인은 가만히 원필의 얼굴을 응시했다.

자신을 스토커 취급하며 얼음장처럼 차가웠던 남자가,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눈가를 붉힌 채 자신 앞에 서 있었다.

어쩌면 속이 좁게 굴며 더 쏘아붙일 수도 있었다.

당신 트라우마는 당신 사정이고, 나는 불쾌했으니 사과 안 받겠다고 매몰차게 돌아설 수도 있었다. 그런데.

‘……와. 무슨 얼굴이 서사야.’

해인은 속으로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저 파리하고 처연한 미남이 두 손을 싹싹 빌 듯 모으고 애절하게 쳐다보는데, 어떻게 거기다 대고 침을 뱉는단 말인가.

흔히들 로맨스 소설에서 ‘이상형과 연애하면 얼굴만 봐도 화가 풀린다’고 하던데, 그게 이래서 나오는 말이었구나. 강해인은 비주얼이 주는 압도적인 개연성 앞에 속절없이 분노가 사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해인은 애써 헛기침을 하며 표정을 갈무리했다.

“……뭐, 사정이 있으셨다니 알겠습니다. 저도 오해할 만하게 자주 겹치긴 했죠. 사과하셨으니 된 걸로 하시죠. 저 지금 체력이 달려서 빨리 카페 자리 맡으러 가야 해서 이만.”

해인이 가방끈을 고쳐 쥐고 돌아서려는데, 원필이 다급하게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시선이 해인의 양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거대한 백팩에 머물렀다. 무거운 짐 때문에 후드티 어깨선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고, 손가락은 피가 안 통해 붉어져 있었다.

원필의 얼굴에 다시 한번 짙은 죄책감이 스쳤다.

“저기, 손님.”

“네?”

“혹시…… 정말 괜찮으시다면, 저희 가게 안쪽 공간에서 작업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네? 아니, 무슨…….”

해인이 놀라 눈을 크게 뜨자, 원필이 절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안쪽에 문 닫고 쓸 수 있는 제 개인 작업 테이블이 있습니다. 꽤 넓고, 조용합니다. 영업시간 중에도 손님들 시선 안 닿게 커튼 칠 수 있고요.”

“아니, 사장님 일하시는 공간을 제가 왜…….”

“저는 원래 문 닫고 나서도 야간이나 새벽에 예약 꽃 작업하느라 늘 매장에 남습니다. 어차피 불 켜져 있고 공간도 넉넉하니, 무겁게 짐 들고 멀리 다니지 마시고 거기서 하세요.”

원필은 행여나 해인이 또 거절하고 도망갈까 봐 속사포처럼 브리핑을 쏟아냈다.

“콘센트도 마음대로 쓰시고, 와이파이도 빵빵합니다. 커피 머신도 있고, 차 종류도 많으니까 전부 다 편하게, 그냥 다 무료로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원필은 거의 애원하듯 해인을 바라보았다.

“이거라도 핑계 삼아 사죄할 수 있게, 제발 꼭 받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가게 안쪽 공간을, 그것도 무료로. 콘센트와 무제한 커피까지.

평소의 해인이었다면 아무리 사죄의 의미라 해도 남의 영업장에 죽치고 앉아 있는 게 부담스러워 단칼에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체력은 글자 그대로 ‘방전 직전’이었다. 반대 방향 카페까지 오가며 체력을 다 갉아먹은 탓에 당장 저 쇳덩어리 같은 가방을 짊어지고 5분을 더 걸어갈 힘조차 없었다. 눈치를 보며 콘센트 자리를 찾아 헤맬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해인은 어깨를 짓누르는 백팩의 무게와, 눈앞에 서 있는 압도적인 미남의 간절한 눈빛 사이에서 잠시 갈등했다.

그리고, 생존을 향한 프리랜서의 본능이 수치심을 이겼다.

“……진짜 눈치 안 보고 전원 꽂아 써도 됩니까?”

해인의 입에서 나온 건조한 질문에, 원필의 얼굴에 그제야 희미한 화색이 돌았다.

“그럼요. 전기를 다 끌어다 쓰셔도 됩니다. 짐이 무거우실 텐데, 가방부터 이리 주시죠.”

원필은 안도감이 섞인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해인의 가방끈으로 손을 뻗었다.

가성비 덕질을 하려다 쫓겨났던 단골손님은, 얼떨결에 미남 사장님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어느 날의 왈츠’의 가장 깊고 내밀한 안쪽 공간으로 입성하게 되었다.

지독한 오해의 끝에서 열린, 새로운 생활권의 시작이었다.

이 회차의 댓글

이름과 비밀번호로 남기는 감상. 수정하거나 삭제할 때 같은 비밀번호가 필요해요.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

이름과 댓글은 공개됩니다. 비밀번호는 다른 곳에서 쓰는 것과 다르게 정해 주세요.

기존 소설 화면으로 보기 ↗

이야기 속 내 이름

한글 이름을 입력하면 조사가 함께 바뀝니다. 이 기기에만 저장돼요.

댓글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