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y My DayF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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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30

여의도의 승전보, 그리고 비밀 티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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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대리, 이번 프로젝트 진짜 고생 많았어. 덕분에 상반기 실적은 우리 팀이 1등이야."

목요일 오후, 마케팅 팀장님의 흐뭇한 칭찬과 함께 팀 내에 박수가 쏟아졌다. 지난 두 달간 코피를 쏟아가며 매달렸던 신규 브랜드 론칭이 대성공을 거둔 것이다.

"고생한 김 대리는 다음 주부터 2주 푹 쉬어. 내가 특별히 특별 휴가까지 얹어서 결재 올렸으니까." "진짜요? 팀장님, 사랑합니다!"

내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단어만이 떠올랐다. '런던'. 두 달 전, 고작 4일의 휴가를 내고 나를 보기 위해 서울로 날아왔던 강영현. 이번엔 내 차례였다. 나는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떨리는 손으로 스카이스캐너를 켜고 가장 빠른 런던행 직항 티켓을 예매했다.

[자기야, 오늘 회식이라 연락 잘 안 될 수도 있어. 런던은 점심시간이겠다. 밥 잘 챙겨 먹어!] 영현에게는 철저한 연막작전을 쳤다. 그는 내 프로젝트가 끝난 줄도, 내가 당장 내일 비행기에 오를 것이라는 사실도 꿈에도 모른 채 [응,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마! 사랑해!] 라며 귀여운 잔소리 답장을 보내왔다.

금요일 오전, 인천공항. 캐리어 안에는 내 옷보다 영현이가 좋아하는 안 매운 한국 과자, 컵밥, 그리고 엄마가 챙겨준 밑반찬들이 꽉 차 있었다. '이거 들고 가면 강영현 또 울겠지.'

14시간의 비행은 지루할 틈이 없었다. 두 달 전, 이 긴 시간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나를 향해 날아왔을 그의 마음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지면서도 벅차올랐다.

히드로 공항에 도착해 런던의 차가운 공기를 마시는 순간,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택배를 보낸다는 핑계로 미리 알아낸 그의 아파트 주소를 구글 맵에 찍었다. 튜브(런던 지하철)를 타고 그의 집이 있는 동네로 향하는 내내, 머릿속으로는 그를 마주했을 때의 수만 가지 시나리오를 그렸다.

금요일 저녁 7시. 영현의 아파트 1층 로비 앞. 퇴근 시간이 조금 지났으니 곧 도착할 터였다. 런던의 밤바람은 꽤 쌀쌀했지만, 캐리어 손잡이를 쥔 내 손에는 땀이 차올랐다.

저 멀리서 익숙한 실루엣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네이비색 수트 위로 트렌치코트를 걸친 강영현. 한 손에는 서류 가방을, 다른 한 손에는 마트에서 산 듯한 샌드위치 봉투가 덜렁거리고 있었다. 걸음걸이에는 하루의 고단함이 뚝뚝 묻어났다.

그가 로비 유리문을 열기 위해 고개를 든 순간, 기둥 뒤에 숨어있던 내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강 대리님, 샌드위치 말고 밥을 드셔야죠."

그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허공에서 우리의 시선이 부딪혔다. 영현의 커다란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지더니, 그가 쥐고 있던 샌드위치 봉투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어... 어? 김ㅇㅇ...?" 그는 마치 유령이라도 본 사람처럼 입을 벌린 채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뭐해, 안 안아주고." 내가 양팔을 벌리며 활짝 웃자, 그제야 현실을 자각한 영현이 미친 듯이 달려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너 미쳤어? 네가 어떻게... 아, 진짜 김ㅇㅇ!!" 그의 억센 팔이 내 허리가 부서져라 꽉 조여왔다. 그의 넓은 어깨에 얼굴을 묻자, 그토록 그리웠던 짙은 비누향이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런데 어깨가 축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영현아... 너 울어?" "안 울어, 미친아... 아, 나 진짜 돌아버리는 줄 알았네..."

그는 훌쩍거리며 내 어깨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런던 지사에서 피도 눈물도 없이 실적을 갈아치운다는 해외영업팀 에이스 강 대리는 온데간데없고, 주인 만나서 엉엉 우는 덩치 큰 고양이 한 마리만 남았다.

그의 아파트로 올라가 캐리어를 열어주자, 그의 눈물샘이 2차로 폭발했다. "이거 다 뭐야... 컵밥에 깻잎에... 자기야, 나 진짜 이거 다 먹고 싶었어." "알아, 대식가 양반. 런던 음식 맛없다며. 당분간은 내가 밥해줄게. 나 2주나 휴가 받았어."

내 말에 영현은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 내 허리를 껴안고 아이처럼 오열(?)했다. 9시간의 시차와 두 달의 그리움이, 한 상 가득 차려진 밑반찬들과 뜨거운 포옹 속에서 완벽하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런던의 햇살이 창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눈을 뜨자 두 달 전 서울의 내 자취방에서 그랬듯, 내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은 강영현의 맨팔이 느껴졌다.

"잘 잤어?" 그는 이미 깨어있었는지, 턱을 괸 채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응. 런던 공기 생각보다 좋네." "네가 와서 그래. 어제까지는 그냥 회색 도시였어."

우리는 아침을 간단히 먹고 영현이 그토록 말했던 하이드 파크로 나섰다. 주말의 공원은 평화로웠고, 우리는 한 손엔 커피를, 다른 한 손은 단단히 깍지를 낀 채 잔디밭을 거닐었다.

"ㅇㅇ아, 나 진짜 이번 분기 실적 1등 찍었어. 이 속도면 파견 1년 반으로 줄일 수 있을 것 같아. 내년 가을에는 서울로 완전 복귀할 거야." 그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 내년 가을엔 진짜로... 식장 들어가자. 나 더는 못 기다려." 런던의 푸른 하늘 아래, 장난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가장 진지하고도 묵직한 프러포즈였다. 나는 대답 대신 까치발을 들어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알았어, 강 대리님. 일단 남은 12일 동안 런던 데이트나 제대로 시켜줘요."

역조공 서프라이즈로 시작된 우리의 런던 휴가는, 이제 서로의 미래를 완벽하게 약속하는 가장 로맨틱한 챕터로 넘어가고 있었다.

런던에 온 지 3일째 되던 월요일 아침. 영현은 내 볼에 뽀뽀를 백 번쯤 퍼붓고 나서야 아쉬운 발걸음으로 출근했다. 그가 출근한 뒤, 나는 그동안 영현이 회사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해 박 대리님(여의도 마케팅팀)에게 톡을 보냈다.

마포 해외영업팀 최 사원과 사내 연애 중인 박 대리님은 마포 본사와 런던 지사의 소식통이나 다름없었다.

[박 대리님 : 어머, 김 대리님 모르셨어요? 강 대리님 런던 지사에서 별명이 '아이스 몬스터'래요. 일은 기계처럼 갈아치우는데, 웃지를 않아서요.]

박 대리님의 말에 따르면, 어릴 적 캐나다 유학 생활 덕분에 원어민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는 영현은 날카로운 외모와 압도적인 실적으로 런던 지사 여직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어떤 데이트 신청도 "서울에 약혼자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칼같이 잘라냈단다.

다만, 점심시간이나 퇴근 직전 휴게실에서 누군가와 통화할 때면 180도 돌변해 꿀 떨어지는 한국어(주로 "자기야", "보고 싶어", "사랑해")를 남발하는 모습이 목격되면서, 런던 지사 사람들에게 나는 실존 여부를 알 수 없는 '전설의 유니콘'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점심시간에 맞춰 영현의 회사 근처 샌드위치 가게에서 먹거리를 잔뜩 포장한 나는 서프라이즈로 그의 회사 로비를 찾았다.

[나 로비인데, 언제 내려와?] 메시지를 보내놓고 소파에 앉아 기다리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익숙한 네이비 수트의 강영현이 걸어 나왔다. 그런데 그의 옆에는 모델처럼 키가 큰 금발의 여직원이 바짝 붙어 걷고 있었다.

"Hey, Brian. Are you really not joining us for drinks tonight? (헤이, 브라이언. 오늘 진짜 우리랑 술 안 마실 거야?)"

그녀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영현의 팔을 슬쩍 잡으려 했다. 하지만 영현은 몸을 차갑게 빼며, 캐나다 특유의 억양이 섞인 유창하지만 건조한 영어로 대답했다.

"I told you, Chloe. I have to head home early. My girlfriend’s visiting from Seoul. (말했잖아, 클로이. 일찍 가야 해. 서울에서 여자친구가 와 있거든.)"

"Oh, the legendary girlfriend again? I’m starting to think she’s imaginary. (오, 또 그 전설의 여자친구? 난 이제 그분이 상상 속 인물인 것 같아.)"

클로이가 입을 삐죽이며 농담을 던졌다. 영현의 미간이 차갑게 좁혀지려는 찰나,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불렀다. "강영현!"

내 목소리가 로비에 울려 퍼지는 순간, 얼음장 같던 '미스터 강'의 얼굴에 순식간에 봄꽃이 피어났다.

"어? 자기야!!"

영현은 클로이를 완전히 투명 인간 취급한 채,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달려와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로비 한복판에서 나를 안고 빙글 한 바퀴를 돈 그는, 내 뺨과 이마에 정신없이 입을 맞췄다.

"뭐야, 어떻게 왔어! 길 안 잃어버렸어? 밥은 챙겨 왔어?"

조금 전까지 영어로 철벽을 치던 차가운 남자는 온데간데없고, 내 어깨에 얼굴을 부비는 대형견 한 마리만이 남아있었다. 그 충격적인 광경에 클로이를 비롯해 로비를 지나가던 런던 지사 동료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Oh, my god. Is that... her? (세상에, 저 사람... 그 여자친구야?)" 클로이의 중얼거림에 영현은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내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은 채,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동료들을 향해 영어로 외쳤다.

"Everyone, meet the legendary girlfriend you’ve all been hearing about— ㅇㅇ! (다들 인사해, 내 전설의 여자친구 ㅇㅇ이야!)"

결국 그날 점심은 영현의 동료들의 등쌀에 밀려 근처 펍(Pub)에서 간단하게 맥주와 피시 앤 칩스를 곁들인 회동으로 변했다.

영현은 테이블에 앉아서도 한시도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동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쏟아졌다. "Nice to meet you. I’ve heard a lot about you from Brian. (반가워요. 브라이언이 항상 당신 이야기만 하거든요.)"

다행히 업무상 영어를 쓸 일이 제법 있었던 터라 가벼운 스몰토크 정도는 무리가 없었다. 나는 어색한 티를 내지 않고 마주 웃으며 받아쳤다.

"It’s a pleasure to meet you too. I hope he hasn’t been giving you too much trouble. (저도 반갑습니다. 영현이가 여기서 말썽 피우진 않았나 모르겠네요.)"

내 농담 섞인 인사에 테이블의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은근한 경계심을 띠고 있던 클로이 역시 픽 웃으며 기분 좋게 맥주잔을 부딪쳐 왔다.

그 와중에도 영현은 내 접시에 감자튀김을 잘라 올려주며 끊임없이 귓속말로 한국어를 속삭였다. "은근슬쩍 기선제압 잘하네, 우리 김 대리님. 나만 쳐다볼 줄 알았는데 방금 좀 반할 뻔했어."

"조용히 해. 동료들 보는데."

짧은 점심 회동이 끝나고, 영현은 동료들의 환호와 박수를 뒤로한 채 나를 데리고 아파트로 돌아오는 길에 나섰다. 평소보다 그의 보폭이 훨씬 가볍고 신나 보였다.

"너 아까 클로이 표정 봤어? 다들 뻥인 줄 알았는데 네가 딱 나타나서 유창하게 영어로 받아치니까 기가 팍 죽었잖아. 아, 진짜 우리 자기 너무 멋있어. 내 여자야."

영현은 길을 걷는 내내 내 볼을 꼬집고, 어깨를 감싸 안으며 찬사를 늘어놓았다. 그가 런던에서 얼마나 나를 그리워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자랑하고 싶었는지 온몸으로 느껴졌다.

"너야말로 어떻게 철벽을 쳤길래 나를 상상 속 인물 취급을 하게 만들어?" "철벽이야 당연하지. 내 눈엔 20년째 너밖에 안 보인다니까. 오늘 네가 확인 사살까지 해줬으니까 이제 아무도 나한테 말 안 걸 거야. 완전 좋아."

그가 골목 모퉁이에서 내 허리를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차가운 런던의 오후였지만, 우리의 감정은 어느 때보다 완벽하게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동료들에게 '전설의 여자친구'가 실존함을 증명한 오늘, 런던 지사의 아이스 몬스터는 완전히 내 앞에서 무장해제된 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런던에서의 첫 주말. 시차 적응이 덜 된 탓에 이른 아침 눈을 떴지만, 침대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 강영현의 단단한 팔과 다리가 나를 커다란 이불처럼 옭아매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야... 나 화장실 좀 가자. 배도 고프고." 내 뒤척임에 영현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아예 내 위로 반쯤 몸을 겹쳐오며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안 돼. 10분만 더. 아니, 한 시간만 더 이러고 있자." 잠이 덜 깨 한껏 낮아진 동굴 같은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그의 맨가슴에 닿은 내 등줄기로 후끈한 열기가 전해졌다.

"너 진짜 고양이가 아니라 껌딱지야. 우리 오늘 내셔널 갤러리 가기로 했잖아." "미술관이 대수야? 내 품에 세상에서 제일 예쁜 작품이 있는데."

그는 능글맞게 웃으며 나를 돌려 눕히곤, 그 위로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아침 햇살이 비치는 침대 위, 그의 깊고 까만 눈동자가 내 입술을 향해 천천히 내려왔다. 런던의 주말 아침은 창밖의 서늘한 공기와는 정반대로, 숨이 턱 막힐 만큼 뜨겁고 끈적한 텐션으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침대 위에서의 기나긴 실랑이 끝에 간신히 밖으로 나선 우리는 오후 느지막이 포토벨로 마켓(Portobello Road Market)으로 향했다. 파스텔 톤의 예쁜 건물들과 북적이는 사람들로 활기가 넘치는 거리에서, 영현은 혹시라도 내가 인파에 휩쓸릴까 봐 내 어깨를 단단히 감싸 안고 걸었다.

"우와, 영현아! 저기 찻잔 세트 진짜 예쁘다." "사줄까? 한국으로 부치면 돼. 저기 있는 곰 인형은? 저것도 사줄까?"

그는 내가 시선만 둬도 지갑을 열 기세였다. 런던 지사에서 억대 실적을 올리는 에이스답게 씀씀이도 화끈해진 '미스터 강'을 말리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그러다 우연히 들른 작은 앤틱 주얼리 숍. 영현의 시선이 작은 은반지 하나에 꽂혔다. 세공이 섬세하게 들어간 낡았지만 아름다운 빈티지 링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 반지를 내 약지에 끼워보았다. 소름 돋게도 사이즈가 딱 맞았다.

"예쁘다. 원래 네 거였던 것처럼." 그는 내 손가락 마디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반지를 계산했다. "나중에 진짜 프러포즈할 땐 다이아몬드 제일 큰 걸로 해줄 건데, 그 전까진 이거 끼고 있어. 런던에서 내가 찜해놨다는 표시야. 알았지?"

길거리 한복판이었지만 나는 까치발을 들어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노팅힐의 낭만보다 내 눈앞의 이 남자가 수백 배는 더 다정하고 로맨틱했다.

런던에서의 2주는 그렇게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데이트들로 채워졌다. 영현이 퇴근하는 평일 저녁이나 여유로운 주말이면 우리는 런던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다. 어느 날 저녁 찾았던 버로우 마켓(Borough Market)에서 영현은 마치 물 만난 고기 같았다. 런던의 퍽퍽한 샌드위치에 지쳐있던 대식가는 생굴, 스카치 에그, 커다란 미트 파이를 양손 가득 들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야, 아 해봐. 이거 트러플 들어간 파이인데 진짜 맛있어." "너 많이 먹어. 난 너 먹는 것만 봐도 배불러."

나는 입가에 소스를 묻히고 먹는 그의 얼굴을 핸드폰 카메라로 연신 찍어댔다. 예전엔 "야, 작작 먹어라!"라고 등짝을 때렸을 텐데, 지금은 그가 맛있게 오물거리는 입술마저 사랑스러웠다.

"근데 넌 왜 안 먹고 나만 봐. 나 얼굴에 뭐 묻었어?"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나는 엄지손가락으로 그의 입술 끝을 닦아주었다. "아니, 그냥. 이렇게 너랑 시장에서 맛있는 거 먹고 돌아다니는 거... 20년 동안 수천 번은 했던 건데, 런던에서 하니까 기분이 묘해서. 너무 좋아서 그래."

내 말에 영현은 들고 있던 파이를 내려놓고,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시장통에서 내 이마에 꾹 입을 맞췄다. 특별한 이벤트 없이도, 함께 맛있는 것을 나눠 먹는 이 평범함이 우리에겐 가장 달콤한 기적이 되어가고 있었다.

배를 든든히 채우고 나면 우리는 항상 밤의 런던을 걸었다. 휴가의 끝자락이 다가오던 어느 밤, 런던 아이(London Eye)가 보이는 템즈강 둔치를 걸을 때였다. 밤바람이 제법 쌀쌀해지자 영현이 입고 있던 트렌치코트 앞섶을 열어 나를 품 안으로 쏙 집어넣었다.

"따뜻해?" "응. 근데 넌 안 추워?" "네가 품에 있는데 어떻게 추워. 심장에서 불이 나는데."

그는 낮게 웃으며 내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템즈강의 수면 위로 흔들리는 불빛들이 그의 눈동자 속에 가득 담겨 있었다.

"ㅇㅇ아. 네가 오기 전까지, 이 강변을 걸을 땐 런던이 너무 크고 외롭다고 생각했어. 근데 네가 내 코트 안에 들어와 있는 지금은, 이 도시가 온통 우리 것 같아."

그의 고백은 밤바람보다 부드러웠고, 강물보다 깊었다. 영현의 입술이 천천히 다가왔다. 우리는 런던의 화려한 야경을 배경으로, 세상에 오직 둘만 남은 것처럼 길고 깊게 서로를 탐했다. 코트 안으로 얽혀든 손길, 맞닿은 입술 틈으로 새어 나오는 뜨거운 숨결. 돌아가야 할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우리의 텐션은 애틋함을 넘어 지독하게 짙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2주가 훌쩍 흘러, 어느새 출국을 하루 앞둔 마지막 밤이 찾아왔다.

열려있는 내 캐리어 안에 옷과 짐을 욱여넣으면서도 우리 둘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탁, 하고 캐리어를 닫으려는 순간. 뒤에서 영현의 커다란 두 팔이 내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가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한참 동안 숨을 고르더니 낮게 읊조렸다.

"가지 마... 진짜 여권 숨겨버리고 싶어..."

그의 칭얼거림에 나는 애써 눈물을 삼키며 돌아서서 그를 마주 안았다. 그의 넓은 등을 토닥이며 애써 밝게 말했다. "여의도 마케팅팀 에이스는 다시 돈 벌러 가야지. 그래야 우리 강 대리님 장가올 때 맛있는 거 많이 사주지."

내 장난에 영현이 피식 웃으며 내 뺨을 어루만졌다. "1년. 아니, 10개월. 딱 10개월만 런던 본사 싹 다 씹어먹고, 제일 높은 고과 받아서 당당하게 복귀할게. 그러니까..."

그가 나를 번쩍 안아 들어 침대 위로 눕혔다. 어두운 방 안, 그의 뜨거운 눈빛이 나를 옭아맸다. "오늘 밤은 잠 잘 생각 하지 마. 한숨도 안 재울 거니까."

이별의 슬픔을 덮어버릴 만큼 강렬하고 애타는 밤. 우리는 아쉬움을 남기지 않으려는 듯 서로의 모든 것을 각인시키며, 런던에서의 마지막 밤을 가장 뜨겁게 불태웠다.

커튼 틈새로 스며든 런던의 흐린 아침 햇살이 눈꺼풀을 간지럽혔다. 밤새 나를 품에 가두고 놓아주지 않던 영현은, 아침이 되어서도 여전히 내 허리에 단단히 팔을 두른 채 새근새근 숨을 쉬고 있었다.

"으음..." 내가 살짝 뒤척이자, 그가 잠결에도 내 몸을 자기 쪽으로 더 바짝 끌어당겼다. 맨살에 닿는 그의 체온이 어젯밤의 짙었던 열기를 상기시켜 얼굴이 화끈거렸다.

"진짜... 한숨도 안 재우더니 잘만 자네." 내가 작게 속삭이며 그의 콧등을 손가락으로 살짝 쓸어내리자, 감겨있던 그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스르륵 눈을 떴다.

"깼어? 더 자도 되는데." 잠겨서 한껏 낮아진 목소리. 그는 내 손가락을 잡아 손바닥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곤, 이내 내 목덜미로 파고들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아... 진짜 보내기 싫다. 캐리어에 숨겨서 출근할까." 어제의 그 거칠고 짙었던 텐션은 온데간데없고, 아침 햇살 아래 나른하고 몽글몽글한 대형견 한 마리가 내 품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나는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조용히 웃었다. 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온기를 한국에 돌아가서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아쉬운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우리는 마지막 짐을 싸기 시작했다. 내가 챙겨왔던 밑반찬과 한국 과자들이 빠져나간 캐리어의 빈자리는 꽤 넓었다.

"어? 영현아, 이거 네 후드티잖아." 짐을 닫으려는데, 영현이 평소 집에서 즐겨 입던 커다란 회색 후드티를 내 캐리어 한구석에 욱여넣고 있었다.

"가져가. 내 냄새 배어있으니까, 나 보고 싶을 때 껴안고 자라고. 그리고 런던에서 네가 남겨두고 간 빈자리, 나도 이 핑계로 좀 채우게." 그의 말에 코끝이 징하게 울렸다.

"치, 대식가 양반. 내가 해준 밥 다 먹었으니까 이제 샌드위치 먹으면서 버텨야겠네." "걱정 마. 네가 해준 밥심으로 10개월 버틸 거니까. 한국 가면 내가 맛집 리스트 100개 뽑아놓을 테니까 다 같이 가."

그는 캐리어 지퍼를 채우고는, 바닥에 앉아있는 나를 번쩍 안아 올려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가서 밥 잘 챙겨 먹고, 야근 너무 많이 하지 말고. 아프면 바로 병원 가고." "알았어. 잔소리쟁이." 우리는 서로의 이마를 맞댄 채,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서로의 체온을 눈에 담고 마음에 새겼다.

그리고 마주한 히드로 공항 출국장 앞. 두 달 전, 인천공항에서 눈물바람으로 헤어졌던 것과는 사뭇 다른 공기였다. 여전히 손은 단단히 깍지를 끼고 있었지만, 우리의 표정은 슬픔보다는 묘한 확신으로 차 있었다.

"들어갈게. 공항버스는 조심히 타고." 내가 손을 흔들자, 영현이 나를 자기 코트 안으로 확 끌어당겼다. 주변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는 내 이마와 양 볼, 그리고 입술에 차례로 길고 깊은 입맞춤을 남겼다.

"ㅇㅇ아. 나 진짜 미친 듯이 일할 거야. 런던 지사 실적 내가 다 갈아치우고, 제일 높은 고과 받아서 본사에 당당하게 복귀 신청할 거야."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고 단단하게 빛났다. 사랑에 눈이 멀어 커리어를 포기하려 했던 두 달 전의 나약한 강영현은 더 이상 없었다.

"응. 나도 기대할게. 여의도 에이스 자리, 나도 절대 안 뺏기고 지키고 있을 거야. 네가 복귀하는 날, 내가 제일 멋진 커리어 우먼이 돼서 마중 나갈게."

우리는 서로의 미래를 응원하며 마주 웃었다. 20년의 세월이 만들어준 깊은 신뢰가, 8,800km의 롱디를 그저 서로가 더 멋지게 성장하기 위한 '짧은 유예 기간'으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주말을 보내고 맞이한 월요일 아침, 여의도 사무실. "김 대리! 런던은 잘 다녀왔어? 얼굴이 아주 폈네, 폈어!" 팀장님의 기분 좋은 인사와 함께 나의 일상이 다시 시작됐다.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켜고 밀린 이메일을 확인했다. 런던에서의 2주가 마치 한여름 밤의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졌지만, 내 약지에 끼워진 낡은 빈티지 링과 영현의 짙은 비누향이 배어있는 그의 후드티가 그 모든 시간이 진짜였음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점심시간, 나는 옥상 정원에 올라가 런던의 아침을 맞이할 영현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강 대리님, 출근 잘했어? 나도 오늘부터 다시 달린다. 우리 팀장님이 이번 하반기 프로젝트도 나한테 메인 맡기셨어. 나 진짜 승진할지도 몰라.]

사랑하는 남자가 타국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데, 나 역시 뒤처질 수 없었다. 내 자리를 단단하게 지키고, 내 커리어를 빛내는 것. 그것이 그가 돌아왔을 때 부끄럽지 않은 연인이자 평생의 동반자가 되는 길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같은 시각, 런던 지사의 회의실. "So, regarding the European market expansion plan... (그래서, 유럽 시장 확장 계획에 관해서는...)"

유창한 영어로 프레젠테이션을 주도하는 강영현의 눈빛은 서늘할 정도로 날카로웠다. 휴가 동안 꿀이 뚝뚝 떨어지던 대형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런던 지사 사람들이 두려워하면서도 동경하는 완벽한 '미스터 강'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회의가 끝난 후, 동료 클로이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Brian, you seem even more focused today. Did that famous girlfriend of yours give you some kind of magic potion? (브라이언, 오늘 평소보다 더 집중하는 것 같네. 전설의 여자친구분이 무슨 마법의 물약이라도 줬어?)"

영현은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를 정리하며, 약지에 끼워진 은반지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가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Something like that. I’ve got a very important appointment in Seoul in ten months. Can’t be late for that. (비슷해. 10개월 뒤에 서울에서 아주 중요한 약속이 있거든. 늦으면 안 돼서.)"

그의 시선이 창밖의 런던 하늘을 향했다. 두 사람의 거리는 다시 멀어졌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부딪히며 성장하는 두 사람의 템포는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서로의 발목을 잡는 것이 아니라, 날개를 달아주는 관계.

서울의 여의도와 런던의 템즈강, 8,800km를 가로지르는 우리의 주파수는 그 어떤 잡음도 없이 가장 선명하고 강력하게 카운트다운을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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