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현이 런던 지사로 떠난 지 어느덧 4개월이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우리의 장거리 연애는 예상보다 견고했다. 나는 여의도 마케팅팀에서, 그는 런던 해외영업팀에서 각자의 전장을 미친 듯이 누볐다. 특히 영현은 '조기 복귀'라는 유일한 목표를 향해 브레이크 고장 난 기관차처럼 일에 매달렸다. 모니터 너머로 보이는 그의 턱선은 날이 갈수록 베일 듯 날카로워졌고, 피로가 내려앉은 눈매엔 지독한 워커홀릭의 향기가 배어 있었다.
"무리하지 마. 밥은 챙겨 먹고 일하는 거야?" 내가 걱정스레 물을 때면, 그는 런던의 새벽 공기를 등진 채 씩 웃으며 대답하곤 했다. [자기 얼굴 보니까 배부르다. 나 이번 달 실적도 지사 1등 찍었어. 3년? 웃기지 마, 내가 내년 안에 무조건 끝장내고 들어간다.]
그의 독기 어린 다짐이 든든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넓은 어깨를 직접 안아주고 싶어 사무치게 그리운 밤들이 쌓여가고 있었다.
"김 대리님! 오늘 저녁에 무조건 시간 비우세요. 최 사원이랑 셋이서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금요일 오후, 사내 메신저로 박 대리님의 쪽지가 날아왔다. 요새 부쩍 가까워진 두 사람 사이에 내가 낄 자리가 맞나 싶어 거절하려 했지만, "오늘 김 대리님 안 오시면 저희 진짜 서운해요. 위로 파티란 말이에요!"라는 박 대리님의 강력한 주장에 결국 퇴근 후 약속 장소로 향했다.
마포의 한 프라이빗한 이자카야. 룸 안에는 박 대리님과 최 사원이 먼저 와서 앉아 있었다. "김 대리님, 오셨어요? 일주일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강 대리님 빈자리, 저희가 꽉 채워드릴 테니까 오늘 맘껏 드세요."
최 사원이 넉살 좋게 잔을 채워주었다. 시끌벅적하게 근황을 나누고 업무 스트레스를 풀었지만, 왠지 모르게 내 핸드폰 쪽으로 자꾸만 시선이 갔다. 평소라면 런던의 아침 출근 시간에 맞춰 영현에게서 모닝콜이나 톡이 와야 할 시간인데, 오늘따라 반나절이 넘도록 연락 한 통이 없었기 때문이다.
"영현 대리님, 오늘 바쁘신가 봐요? 김 대리님 계속 핸드폰만 보시네." 박 대리님이 짓궂게 웃으며 물었다. "아, 네. 오늘 런던 지사에 큰 본부 회의가 있다고 하긴 했는데… 그래도 아침 인사는 꼬박꼬박 하던 애가 조용하니까 좀 걱정되네요."
내가 입술을 삐죽이며 맥주를 들이켜려는 찰나였다. 드르륵, 하고 룸의 미닫이문이 열렸다.
"주문하신… 메뉴 나왔습니다."
종업원인 줄 알고 무심코 고개를 돌렸던 나는, 들고 있던 맥주잔을 하마터면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 어두운 네이비색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한 손에는 커다란 캐리어를, 다른 한 손에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약 꽃다발을 든 남자. 모니터 너머로만 수백 번을 쓰다듬었던 그 서늘하고 날카로운 눈매가, 지금 내 눈앞에서 다정하게 휘어지며 웃고 있었다.
"런던 지사 회의보다, 내 여자친구 위로 파티가 더 중요할 것 같아서."
"강… 강영현…?" 숨이 턱 막혔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 영현은 캐리어와 꽃다발을 바닥에 내팽개치듯 던져두고, 단숨에 다가와 나를 부서져라 꽉 껴안았다.
"놀랐지. 나 왔어, 자기야."
코트 자락에서 런던의 찬 공기와 기내의 낯선 냄새, 그리고 내가 미치도록 그리워했던 그의 짙은 비누향 향수가 확 끼쳐왔다. 그의 크고 단단한 두 팔이 내 허리와 뒷목을 옭아매듯 감싸 안는 순간,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미쳤어, 진짜… 미쳤어, 강영현…! 연락도 없이 어떻게…!" "두 달 내내 휴가 하루도 안 쓰고, 야근 수당 대신 휴가로 몰아 달라고 지사장님 바짓가랑이 붙잡고 늘어졌어. 딱 4일. 너 보려고 날아왔어."
내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자, 그는 내 정수리에 쉴 새 없이 입을 맞추며 나를 달랬다. 그제야 뒤에서 흐뭇하게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박 대리님과 최 사원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서프라이즈 대성공! 저희가 강 대리님 공항에서 픽업해서 여기까지 모시느라 얼마나 첩보 작전을 찍었는지 아십니까?"
그의 4일짜리 기적 같은 귀환은, 그렇게 완벽한 서프라이즈로 시작되었다.
우리는 최 사원과 박 대리님에게 눈물겨운 감사를 전하고, 곧바로 택시에 올라타 내 자취방으로 향했다.
"자기야, 아버님이랑 우리 엄마한테는 연락했어? 내일 주말이니까 다 같이 밥 먹자고 하실 텐데." 택시 뒷자리에서 내 손을 단 한순간도 놓지 않던 영현에게 묻자, 그가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
"절대 안 돼. 나 한국 온 거 아무도 몰라. 심지어 우리 회사 부장님도 모르게 몰래 들어왔어." "뭐? 부모님들 아시면 엄청 서운해하실 텐데." "서운하셔도 어쩔 수 없어. 부모님들 아시는 순간, 내 소중한 4일 중에 이틀은 양가 밥 먹고 친척들 인사하느라 다 뺏길 게 뻔해. 나 런던에서 진짜 뼈 빠지게 일하면서 이 4일, 온전히 너랑만 붙어 있을 생각으로 버텼어. 1분 1초도 남한테 안 뺏겨."
그의 절박하고도 단호한 선언에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영현은 나를 문벽으로 강하게 밀어붙였다. 도어락이 채 잠기기도 전이었다.
"하아… 진짜, 죽는 줄 알았어."
그의 거친 숨결이 내 입술 위로 쏟아졌다. 모니터 너머로 건네던 애틋한 말들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살갗을 부딪치며 서로의 체온을 확인하려는 맹렬한 갈증만이 폭발했다. 그의 커다란 손이 내 블라우스 안으로 파고들었고, 나는 그의 젖은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까치발을 들었다.
그가 품었을 외로움과 그리움이, 델 것처럼 뜨거운 입맞춤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날 밤, 좁은 자취방 안에는 부모님도, 런던의 시차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서로를 탐하고 끌어안는 두 사람의 짙은 온도만이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김 대리님, 갑작스러운 연차라니 무슨 일 있어요?" "아… 네, 팀장님. 제가 주말부터 몸살이 너무 심해서요. 화요일 오전까지 반차 쓰고 오후에 출근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월요일 아침, 나는 이불속에서 팀장님께 완벽한 '몸살 연기'를 펼치며 전화를 끊었다. 내 옆에는 내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은 채 맨살을 비비적거리는 덩치 큰 고양이, 강영현이 낄낄거리며 웃고 있었다.
"우리 김 대리님 연기 대상감이네." "누구 때문에 내 소중한 연차랑 반차를 다 털었는데. 조용히 해."
나의 핀잔에 그는 내 뺨에 쪽쪽 입을 맞추며 나를 더 꽉 끌어안았다. 우리의 주말과 월요일은 완벽한 '격리 상태'였다.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배달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넷플릭스를 틀어놓고 소파에 누워 끊임없이 대화를 나눴다.
"그래서, 그 클로이라는 영국인 직원이 또 너한테 커피 줬다고?" "아니, 그냥 팀원들 다 같이 돌린 건데 내 자리에도 둔 거지. 나는 손도 안 댔어. 내 책상에 네 사진 대문짝만하게 붙어 있는 거 걔네도 다 안다니까."
영현은 내 무릎을 베고 누워 런던에서의 일상을 조잘조잘 털어놓았다. 치열하고 외로웠을 타국에서의 생활을 담담하게, 때로는 장난스럽게 포장해 들려주는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나는 생각했다. 이 남자는 정말 나침반처럼 나만을 향해 세팅되어 있구나.
"ㅇㅇ아." "응." "나 이번에 실적 진짜 좋게 나왔어. 임원진들도 내 성과 보고 다들 놀랐다고 하더라." 그가 내 손을 잡아 자기 입술에 가져다 대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조금만, 진짜 조금만 더 기다려. 1년 반. 아니, 1년 안에도 끝낼 수 있을 것 같아. 파견 조기 종료시키고 한국 본사로 들어올 테니까, 그때는 우리..."
그는 말끝을 흐리며 내 네 번째 손가락 마디를 만지작거렸다. 굳이 '결혼'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아도, 그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는지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미소 지었다. "알았어. 무리하지 말고, 건강만 챙겨. 네가 언제 오든 나는 항상 네 쪽에 맞춰져 있을 테니까."
시간은 잔인할 만큼 빠르게 흘렀다. 화요일 아침, 반차를 낸 나는 영현을 배웅하기 위해 인천공항 출국장에 함께 서 있었다.
4일 전 서프라이즈로 나타났을 때의 기쁨은 잠시 접어두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첫 출국 때처럼 눈물이 나거나 가슴이 미어지지는 않았다. 지난 96시간 동안 우리가 나눈 밀도 높은 온기 덕분인지, 아니면 서로의 확고한 미래를 확인했기 때문인지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단단해져 있었다.
"나 갈게. 진짜 가기 싫은데, 빨리 끝내려면 다시 가서 돈 벌어야지." 영현이 아쉬운 듯 내 코트 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칭얼거렸다. 나는 그의 옷깃을 반듯하게 정리해주며 환하게 웃었다.
"가서 런던 지사 확 다 씹어먹어버려, 미스터 강. 나는 여의도 지키고 있을 테니까." "알았어. 회식 때 술 많이 마시지 말고. 최 사원 통해서 다 보고받을 거니까."
그는 마지막으로 나를 품에 꽉 끌어안았다. 공항의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전혀 개의치 않고, 내 입술에 길고 다정한 도장을 찍었다.
"사랑해, 김ㅇㅇ. 세상에서 제일." "나도 사랑해. 조심히 가."
뒤돌아 출국 심사대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4개월 전보다 훨씬 가볍고 경쾌해 보였다. 게이트 안으로 사라지기 전, 나를 향해 손을 번쩍 흔드는 그의 얼굴엔 슬픔 대신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오후 2시, 여의도. 공항 리무진에서 내려 회사 로비로 들어서는 내 발걸음 역시 가벼웠다. 목에 사원증을 다시 걸고, 커피를 한 잔 사 들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어머, 김 대리님. 몸살은 좀 어때요? 얼굴이 너무 좋아 보이는데?" 사무실에 들어서자 박 대리님이 눈짓을 하며 짓궂게 물었다. 나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아유, 주말 내내 푹~ 쉬고, 좋은 약을 아주 듬뿍 먹었더니 싹 나았네요."
키보드 위에 손을 얹고 모니터를 켰다. 런던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잠들어 있을 영현을 생각하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떨어져 있는 시간은 더 이상 우리에게 고통이 아니었다. 그는 런던에서, 나는 이곳 여의도에서 서로의 빛나는 커리어를 응원하며 완벽한 시차 적응을 해나가고 있었다.
[내 남친, 푹 자고 일어나. 나도 지금부터 다시 열심히 달릴게.]
비행기 모드일 그의 핸드폰에 톡을 남기고, 나는 마우스에 손을 얹었다. 96시간의 완벽했던 밀항이 끝난 화요일 오후. 우리의 연애는 8,800km의 거리가 무색할 만큼, 세상에서 가장 선명하고 뜨겁게 계속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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